퀴어페미니즘

수업 쪽글입니다. 이 글로 지난 학기 수업 쪽글은 끝. 퀴어와 페미니즘의 관계를 쓴 글에 대한 요약 정리 쪽글이고요. 입문서 성격이 강한 글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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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과 퀴어 이론은 어떻게 만날까? 둘은 서로 다른 입장에서 다른 논의를 전개하는 정치학일까, 서로 교차하기도 하고 갈라지기도 하며 또 다른 지형을 탐문하는 정치학일까? 물론 단 한 번도 퀴어 이론과 페미니즘(그리고 트랜스젠더리즘)이 별개일 수 없다는 입장이라면 이런 식의 질문은 그 자체로 또 다른 곤란함을 야기한다. 별개인 적 없는데 별개로 사유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둘을 구분해서 이해하는 이들에게 이 질문은 유의미하다. 이미 1990년대 중반 페미니스트와 퀴어 이론가가 둘의 접점을 모색했음에도(Feminism Meets Queer Theory) 여전히 둘을 분리해서 사유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둘을 별개로 사유하는 이들에겐 일단 각각을 구분해서 설명하고 그 다음 연결하는 방식이(상당히 문제가 많다고 해도) 수월하게 인식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는 측면에선 유용할 수도 있다.
퀴어 페미니즘을 논하는 미미 마리누치(Mimi Marinucci)의 책은 페미니즘과 퀴어 이론의 교차점을 출발한다. 이것은 1994년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가 “Against Proper Objects”에서 페미니즘의 주요 논제를 젠더로만 환원할 수 없다는 비판적 입장보다는 1992년 헨리 에이브러브 등(Henry Abelove, Michele Aina Barale, David M. Halperin)이 편집한 책 The Lesbian and Gay Studies Reader의 서론에서 시도한 구분에 따른다는 뜻이기도 하다. 에이브러브 등은 페미니즘이 젠더에 초점을 맞추고 논하듯 레즈비언과 게이 이론은 섹스와 섹슈얼리티에 초점을 맞춘다며 레즈비언과 게이 이론을 규정하려 했다. 마리누치 역시 “퀴어 이론의 경우, 섹스와 섹슈얼리티를 강조한다. 페미니즘 이론의 경우 젠더와 섹스를 강조한다”(106)고 말하며 둘을 구분한다. 그렇다면 이때 페미니즘은 무엇인고 퀴어 페미니즘은 무엇인가?
퀴어 페미니즘에 있어 페미니즘은 대체로 제2 물결 페미니즘을 뜻한다. 마리누치는 제2 물결 페미니즘을 탐문하는 작업은 대개 두 가지 경로로 진행된다고 설명한다. 첫째, 포스트 페미니즘은 제2 물결의 미션이 이미 성취되었기에 페미니즘은 더 이상 필요없다고 얘기한다(107-8). 둘째, 제3 물결 페미니즘은 제2 물결 페미니즘의 방식으로는 위계와 권력을 문제 삼을 수 없기에 제2 물결은 철지났을 뿐만 아니라 진부하다고 주장한다(108). 포스트 페미니즘과 제3 물결 페미니즘 혹은 퀴어 페미니즘은 둘 다 제2 물결 페미니즘에 부정적으로 반응하지만 대응은 전혀 다르다. 전자가 페미니즘의 불필요를 논한다면 후자는 새로운 페미니즘의 필요를 주장한다. 마리누치에게 퀴어 페미니즘은 새로운 필요로서, 지금 등장해야 하는 흐름이자 방향이다. 이를 위해 페미니즘과 퀴어 이론 모두에서 인종차별주의와 계급차별주의가 존재했음을 인정하고 이를 반성할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비판적으로 지배의 논리와 위계를 문제삼아야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퀴어 이론과 페미니즘은 교차한다. 퀴어 이론은 언제나 이분법과 위계에 비판적이며 페미니즘 역시 억압과 위계에 비판 이론이다. 그리하여 퀴어 페미니즘은 페미니즘 내에 존재한 LGBT 혹은 퀴어 혐오, 퀴어 연구/섹슈얼리티 연구에 존재한 여성 혐오를 방지하는 작업일 뿐만 아니라 둘의 교차점에서 더욱 날카로운 비판 이론이 된다.

유비하지 않고 틀을 바꾸는 작업

어떤 현상을 유비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 그러니까 ㄱ현상과 ㄴ현상은 비슷한 형태니까 같이 얘기할 수 있다고 논의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
장애-퀴어 세미나를 하며 가장 어려운 지점은 장애와 퀴어의 연관성을 찾는 게 아니다. 장애와 퀴어의 유비 관계는 쉽게 포착할 수 있다. 둘 다 이 사회의 비규범적 존재고, 추방되고 은폐된 타자며, 그러면서도 구성적 외부다. 한때 퀴어는 장애 범주로 분류된 적 있고, 장애인과 퀴어 모두 프릭으로 전시된 역사가 있다. 둘의 유비 관계를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다. 그래서인지 초기에 읽은 많은 장애-퀴어 이론이 이렇게 유비를 밑절미 삼아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식의 설명은.. 단지 장애와 퀴어 만의 연관 고리가 아니다. 유비를 통해선 비규범적 범주 누구와도 연관 고리를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유비 관계는 두 범주를 교차하며 사유함이 아니라 별개의 범주로 사유한다. 유비를 통한 접근은 둘의 교차 가능성이 아니라 둘의 분리 가능성을 모색한다. 그래서 유비로 사유하는 건 곤란하다. 유비로 사유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가 아니라 유비로 사유할 때 오히려 많은 걸 놓칠 수 있다.
그래서 장애-퀴어 이론을 어떻게 모색하고 기존 논의를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가? 물론 나는 아직 잘 모른다. 이 지점은 나보단 세미나의 다른 구성원이 더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어서.. 난 아직도 머뭇머뭇.. 워낙 배움이 느리고 고민이 얕아 그렇기도 하고…
유비하지 않는 사유, 동시적 경험/상호교차로 다시 사유하는 작업은 트랜스젠더 논의에서도 중요하다. 기존 논의에서, 퀴어 이론 뿐만 아니라 페미니즘 이론에서 트랜스젠더는 누락된다. 퀴어 이론은 많은 경우 성적 지향을 밑절미 삼는, 성적지향 이론으로 얘기되고 그리하여 동성애(!, 여기서 또 한 번 얼마나 많은 누락과 배제가 작동하는지 알 수 있다) 이론의 다른 명칭으로 유통된다. 그러면서도 퀴어 이론은 트랜스젠더의 몸 혹은 젠더퀴어의 몸을 그 상징성으로 재현한다. 트랜스젠더 몸은 퀴어 이론의 상징으로 전유되는 동시에 퀴어 이론에서 추방된다. 페미니즘 논의에서도 마찬가지다. 많은 페미니즘 논의는 여성 아니면 남성으로 이해하는 젠더를 토대 삼고, 트랜스젠더를 별개의 범주로 논한다. 그리하여 트랜스젠더는 젠더 구성을 가장 잘 입증하는 증거가 되거나 기존 젠더 규범을 옹호하는 수호자가 될 뿐이다. 이런 배경에서 퀴어 이론과 페미니즘에서 트랜스젠더가 빠져 있다는 지적은 무척 중요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과하게 말해서, 누락되었다는 지적은 딱 그 찰나에만 의미있다. 누락되었으니 어떻게 할 것인가? 그저 포함하면 될 것인가? 기존 논의를 아예 재구성할 것인가? 재구성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저 포함되기 위해 누락과 배제를 얘기하지 않는다. 포함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존 인식론의 한계 자체를 드러내기 위해 누락과 배제를 얘기한다. 그렇다면 어떤 찰나에서 재구성할 수 있을까? 이것이 어려운 이유는 재구성할 지점이 없어서가 아니다. 문제를 제기하는 입장에선, 트랜스젠더-‘퀴어’ 이론-‘페미니즘’은 이미 붙어있다. 그래서 같이 얘기하는 건 지극히 당연하다. 나는 mtf 트랜스젠더고 퀴어고 페미니스트다. 이런 나의 경험에서 트랜스젠더를 얘기하는 작업은 곧 퀴어 이론을 얘기하는 작업인 동시에 페미니즘을 얘기하는 작업이다. 그럼에도 이를 누군가에게 하나하나 설명하기란 무척 어렵다. 어쩌면 이것이 가장 어렵다. 나에겐 당연한 지점을 다른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차근차근 설명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 물론 이 작업은 기존 논의를 재구성하는 작업일 뿐만 아니라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작업이란 점에서 중요하다. 그럼에도 매우 피곤하고 어려운 일이다. 기존 논의를 재구성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동시에 재구성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쾌락이 발생한다!)
이것이 또 어려운 이유는 아무리 설명해도 상대방이 못 알아듣거나, 알아들을 의지가 없다는 데 있다. 이것은 자신의 토대를 근본적으로 흔드는 작업이란 점에서 한 순간의 지적 쾌락으론 받아들일 순 있어도 지속적 토대로 받아들이는 건 또 다른 문제다. 나라고 다르냐면, 나 역시 내 토대를 흔드는 작업에 매력을 느끼면서도 그것을 내 사유의 토대로 받아들이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이 지난함은 많은 경우 새로운 논의를 제안하는 사람을 지치도록 하고, 또 논의를 발전시키는데 방해 요인이 된다. 논의에 단계가 있다면, 나는 5나 7을 얘기하고 싶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1도 간신히 이해할 때 깊이 있는 논의를 전개하는 데 무리가 있다. (그래서 공동체가 중요하다.)
암튼… 그래서… 아… 뭐라고 마무리 하지? ㅠㅠ

잃어버린 펜을 둘러싼 기억

몇 번인가 적었지만 필기구를 좋아한다. 그래서 늘 몸에 필기구를 지니는 편이다. 하루 종일 필기구를 사용할 일이 없다고 해도 일단은 챙긴달까. 외출할 때 가장 먼저 챙기는 물건이 필기구와 교통카드 지갑이다. 단지 필기구 하나만 꼭 챙기는 게 아니다. 주로 사용하는 필기구가 리필용 펜인데 가방엔 리필통 여분과 6개월 이상을 사용해도 충분할 리필심이 들어 있다. 두 가지 이유에서 이렇게 챙겨 다니는데, 펜을 사용하다가 갑자기 약이 다 나갔을 때, 그리고 갑자기 펜을 잃어버렸을 때를 대비해서다. 펜을 사용해야 하는데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을 피하겠다는 게 핵심이라면 핵심.
며칠 전 수업이 있는 날이었는데 주머니에 넣어둔 펜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필통에 넣어둔 여분의 다른 펜으로 수업은 어떻게 넘겼다. 그리고 그날 저녁 집으로 가서 리필통에 리필심을 새로 채우며 늘 가지고 다니는 펜을 만들었다. 다음날 알바하는 곳 근처에 있는 문구점으로 가선, 리필통을 추가로 몇 개 구매했다. 필기구를 구매하고 밖으로 나와 알바하는 곳으로 다시 돌아가려는 길에서.. ‘아이고, 가방에 리필심과 리필통이 늘 여분으로 준비되어 있는데 왜 학교에서 만들지 않았지?’라며 나의 어리석음을 깨달았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낄낄 비웃으면서. 가방엔 늘 여분이 있기에 언제 어디서건, 리필통에 리필심을 채우면 그만이다. 그런데 필통에 둔 여분의 펜을 사용하다니..
며칠 전 수업이 있는 날이었는데 주머니에 넣어둔 펜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필통에 넣어둔 여분의 다른 펜으로 수업은 어떻게 넘겼다. 여분의 펜을 사용한 건, 잃어버린 찰나를 가늠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당연히 집에 있겠거니 했다. 깜빡하고 안 챙겼나… 펜이 없다는 사실을 아침 일찍, 지하철을 탈 때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사이에 잃어버릴 일이 없었다. 물론 깜빡하고 안 챙겼을 리가 없지만 잃어버린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니 당연히 집에 있겠거니 했다. 이런 상황에선 여분의 펜에 리필심을 새로 채우며, 펜을 새로 조립할 이유가 없었다. 필통에 든 다른 펜을 사용하면 되었다. 수업이 끝나고 집에 돌아와선 펜을 찾았지만 없었다. 어디서 잃어버린 걸까…
ㄱ의 두 번째 문단과 세 번째 문단은… 같은 사건을 다른 식으로 기억하는 찰나다. 시간 순으로는 세 번째 문단이 먼저다. 펜을 잃어버린 당일 나는 세 번째 문단과 같이 생각했다. 그래서 늘 사용하는 펜을 조립하지 않고 여분의 다른 펜을 사용했다. 하지만 그 다음날 리필통을 구매하러 갔을 때, 두 번째 문단으로 기억했다. 가방에 여분의 리필통과 리필심이 있다는 사실을 깜빡하고 다른 펜을 사용했다고 기억했다. 이 일을 블로깅하려고 글을 쓰면서 세 번째 문단을 두 번째 문단으로 혼동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런데 과연 세 번째 문단으로 기억하는 것도 그 찰나를 제대로 기억하는 걸까? 어디서 어떻게 기억은 변형될까?
이 모든 상황을 당황스럽게 만드는 일이 추후 발생했다. 문구점에서 추가로 더 구매한 날 저녁 청소를 하다가.. 구석 어딘가에 들어가 있던 펜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