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담: 십대 트랜스젠더, 버르장머리 없는 글

ㄱ.
SNS에선 이미 유포가 되고 있겠지만(어떤 글이 나오면 바로바로 유포되니까요), 그래도 좋은 글은 많이 유통될 수록 좋으니까요.
혼자 읽기 아까운 글이 있어 공유합니다. 십대 트랜스젠더 활동가가 쓴 글입니다. 자신을 설명하는 방법도 매력적일 뿐만 아니라 아래 인용한 구절처럼 십대 트랜스젠더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성찰도 좋아요. 링크도 있으니 꼭 다 읽어보시길 추천하고요.
앞으로 어떤 활동을 하실지 모르겠지만(지금하고 있는 활동이 전부는 아닐테니까요) 앞으로 진행할 멋진 활동을 기대하고 있어요. 아는 분은 아니니 직접 전할 방법은 없지만 이렇게라도 전하고 싶달까요. 🙂
“한국 사회에서는 성인 트랜스젠더로 살아가기도 힘들지만, 청소년 트랜스젠더는 호적정정을 할 수도, 성별정정 수술을 할 수도 없다. 성인이 될 때까지는 남성인 척, 여성인 척하고 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청소년 트랜스젠더에게 필요한 권리는 성인이 된 후의 나중의 권리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살아갈 권리다.”
-르헨, “[미성숙 폭동] 성인이 될 때까지 여성인 척하고 살아야 하나: 트랜스젠더 청소년, 한국에서 살아남기
ㄴ.
지금 마무리하고 있는 원고를 퇴고하면서.. ‘아우, 내가 읽어도 참 건방지게 쓰고 있다’고 중얼거렸다. 크크크. ;;; 오만이 방자하고 무식이 닿을 곳 없다. 그래서 손발이 오그라든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그런데도 그냥 그렇게 가기로 했다. 원래 목적이 그랬으니까. 나의 건방진 태도가 깔보는 자세가 아니라 이른바 말대꾸라고 믿기 때문이다. 벨 훅스는 기존 질서의 정의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 그래서 권력자의 말에 말대꾸하는 것이 저항의 주요 형태라고 주장했다. 나의 글 역시 그런 말대꾸라고 믿는다. 물론 다른 사람도 이렇게 읽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말대꾼데 상대방은 버르장머리 없는 걸로 이해하면 어떡하지? ㅠㅠ 뭐, 말대꾸와 버르장머리 없는 건 별차이가 없긴 하지만.. ㅠㅠㅠ 아니, 버르장머리가 없는 게 아니라 그냥 무식한 헛소리면, 인식론이 달라서가 아니라 정말 무식한 헛소리면 어떡하지? ㅠㅠㅠ

정의와 정의 사이

이곳에 방문하는 분은 ‘정의’란 단어를 들을 때 어떤 뜻을 가장 먼저 떠올리나요?
ㄱ. 정의. 正義. Justice. 진리에 맞는 올바른 도리.
ㄴ. 정의. 定義. Definition. 어떤 말이나 사물의 뜻을 명백히 밝혀 규정함. 또는 그 뜻.
#출처: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온라인 판본.
언젠가 웹서핑을 하다가 ‘정의’란 단어를 읽고 ㄱ의 justice를 떠올리면 문과고 ㄴ의 definition을 떠올리면 이과라고 구분한 게시글을 읽은 적 있다. 이런 구분은 많다. “40-32÷2=?”란 시험문제에 초등학생이 “4!”라고 적었는데 이 답이 틀렸다고 답하면 문과, 맞다고 답하면 이과라고 구분하는 식의, 뭐, 그런 글이었다.
난 definition을 떠올린다. 당연하지. 학부 4년 동안 한 학기도 빼지 않고 배운 게 Definition(def.)인데. 수학과 수업은 definition으로 시작해서 definition이나 Q.E.D.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정의定義를 중시한다. 해당 수업에서 사용하는 용어의 정의를 먼저 설명해야 이후 논의를 전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금 딴 소린데, 이런 수업 방식은 내가 공부하고 글을 쓰는데 알게 모르게 도움을 주고 있다.)
이런 영향에서인지 몰라도, 지금까지 내가 쓴 글에 ‘정의’란 단어를 썼다면 그 중 팔 할은 定義를 지칭한다. 아니, 내가 쓴 글에서 正義를 얘기한 적이 있나 싶다. 나는 거의 자동으로 정의를 定義로 사용하지만, 정의가 正義로 해석될 가능성이 더 크다는 걸 알기에 일부러 ‘정의’란 단어 옆에 한자 定義를 함께 표기하곤 한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正義와 定義는 분명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둘 다 누가 어떤 맥락에서 주장하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누구를 위한 정의인가?”란 문장은 正義로 쓸 수도 있고 定義로 쓸 수도 있다. 正義 자체가 권력 관계의 산물이며, 권력 관계에 따라 다른 의미를 지닌다. ‘빵을 훔치면 벌금 100만 원’이라는 법적 正義는 모든 인간의 계급과 경제적 상황을 동등하게 둔다는 점에서 正義라고 단언하기 힘들다. 특정 계급의 이해를 반영하는 문장이다. 따라서 正義는 定義될 수밖에 없다. 맥락과 가치를 밑절미 삼는 定義에 따라 正義가 성립된다는 점에서 “누구를 위한 正義인가?”란 문장은 “누구를 위한 定義인가?”와 별로 다르지 않다.
학부에서 수학을 전공하면서 얻은 가장 큰 배움이 이 지점이다. 정의는 맥락적이다. 그래서 정확하게 정의해야 한다. 🙂

그냥 편안하게, 밀당 없이

누군가는 말했다, 밀당은 관계에 긴장감을 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그래서 밀당은 꼭 필요하다고. 그냥 그 사람은 그렇구나 하고 말았다. 나의 경우는 아니다. 밀당만큼 피곤한 일도 없으니까. 좋은 얘기만 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한데 밀당을 왜 할까 싶다.
어떤 관계에서건 밀당을 시도하면, 난 밀당에 참여하지 않으려는 편이다. 그냥 그 관계에서 벗어날 궁리를 한다. 밀당을 하는데 드는 피곤함이 싫기 때문이다. 그 피곤함은 좋은 감정을 손상시키고 그래서 관계를 단축시키는 이유가 될 때도 있다. 그러니 상대방에겐 긴장감일지 몰라도 내겐 그냥 피곤함이다.
고양이와 살며 배운 소중한 경험이기도 하다. 비단 고양이 뿐이랴. 동반종과 함께 살면 배울 수 있는 귀한 경험이다(문조는 제외? 크). 내가 사랑을 주면 그냥 그만큼 받아들인다. 여기에 이해득실을 따지는 반응 같은 것 없다. 좋으면 좋은 거고 싫으면 싫은 거다. 그래서 그냥 믿는 것, 이것이 좋다.
언젠가 안철수의 화법이라고 설명한 글을 읽은 적 있다. 서울시장 출마 여부로 한창 시끄럽던 시기에 인터넷 게시판에서 우연히 읽었다. 정치공학의 맥락에서 ㄱ이란 말은 ㄴ 혹은 ㄷ을 뜻하겠지만 안철수에겐 말 그대로 ㄱ이라고 했던가. 안철수는 ‘출마를 고민 중이다’고 했고 기자는 ‘출마 예정’이라고 해석했다. 안철수의 지인은, ‘말 그대로 출마를 고민하고 있다는 얘기다’라고 번역했다. 그냥 이런 게 편하지 않나? 내가 인간관계를 너무 단순하게 해석하기 때문에 이런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을 ‘투명함’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냥 이런 투명함으로 관계를 맺는 게 편하지 않나? 편해야 오래 갈 수 있는 거고.
혹은.. 어느 영화였더라.. 더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라는 대사가 나온 영화가… 그래. 사랑의 감정이건 다른 어떤 감정이건 더 사랑하거나 더 헌신하는 사람이 관계에서 취약해지는 면이 없다고 할 순 없겠지. 그렇다고 그런 감정을 이용한다면 이건 정말 끔찍한 일이다. 때때로 밀당은 이런 감정의 불균형을 밑절미 삼아 일어나는 위험한/윤리적이지 않은 행동이지 않을까…
그래서 나부터 사람 감정으로 장난치지 않기 위해 애쓰지만.. 내가 얼마나 잘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나저나 고양이 나이 세 살인 바람의 칭얼거림이 늘었다. 무슨 이유일까? 아, 이건 밀당보다 더 어렵다. 끄응… 그저 칭얼거림이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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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기 전에 대답을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