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금지법 막강 FAQ 토론회

차별금지법 이슈는 여전히 중요하고 앞으로도 계속 중요합니다. 그러니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 싶은데 마침 좋은 자리가 있네요. 많은 분이 함께 하면 좋을 듯합니다. 🙂
===
일시 : 6월 14일(금) 오후 7시 30분
장소 : 인권중심 사람 다목적홀(서울시 마포구 서교동 247-38)
주관 : 성소수자 차별반대 무지개행동(http://lgbtact.org)
어떤 이들의 혐오 발언에 분노하고 계신가요?
이야기 하다가 말이 막혀 스트레스 받으셨나요?
막연히 지지하지만, 어떤식으로 설명해야 할지 난감하셨나요?
성적소수자라면 꼭! 알아야 할 차별금지법에 대한 모든것!
법안에 대해 궁금했던 점들, 실제 사례에서 대입해 보고 싶었던
것들을 이야기해보고, 당당하게 반박할 언어들을 알아봅니다.
무지개행동 홈페이지(http://lgbtact.org)로 질문을 남겨주세요!
토론회에서 시원하게 답해드립니다 🙂
호호

은근하게, 평범하게

영화 <2의 증명> 관련 발제문을 쓰면서 짧게 언급하고 넘어갔지만 강조하고 싶은 구절 중 하나는 다음이었다.
홍유정 씨는 혹은 나를 비롯한 트랜스젠더는 애써 저항하려는 것도 아니고 위반하려는 것도 아니다. 딱히 규범에 더 열심히 순응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냥 살려고 애쓸 뿐이다. 그런데 그냥 사는 것이 어렵다(홍유정 씨가 특별히 운이 나쁜 게 아니다). 그냥 사는 것이 반드시 규범적으로 사는 건 아니다. 반드시 규범에 부합하지 않으며 살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홍유정 씨는(혹은 일부 트랜스젠더는) 평범하게/규범적으로 살고 싶어도 규범적으로 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가만히 있어도 규범을 위반한다. 홍유정 씨는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기 위해 신분증을 회복했지만 이것은 삶을 더 어렵게 했다. 여성으로 살고자 했지만 사회는 이것을 불가능하게 한다. 주변 사람들은 홍유정 씨의 어려운 상황을 알고 악용한다. 그냥 산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욕망일 뿐만 아니라 규범적으로 살고자 하는 노력 자체가 삶을 참으로 고단하게 만든다. <2의 증명>은 바로 이 찰나를 그려낸다.
퀴어 실천에 있어 내가 가장 주목하는 지점은 누구나 알 수 있는 그런 분명한 저항이나 전복 행위가 아니다. 이를 테면 수염에 치마를 입고 거리를 걷는 것과 같은 일, 어디서 공공연하게 나는 변태라고 말하는 일은 분명 흥미로운 일이다. 하지만 난 어떤 행동이 기존 질서에 순응하는지 위반하는지 모호한 상태, 혹은 순응하고 있는데 그 순응이 기존 질서를 자꾸만 불안하게 만드는 그런 행동에 더 매력을 느낀다. 그래서 위반으로 분석해도, 순응으로 분석해도 논쟁적일 주제를 얘기하는 게 더 좋다. 그것이 기존 규범을 더 날것으로 탐문할 수 있도록 하고, 규범의 다른 얼굴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혹은 어쩌면 내 삶이 그렇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애매함이 내 삶과 닮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많은 곳에서 내가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통하고 이것은 내게 많은 긴장을 야기한다. 나의 긴장과 무관하게 나란 존재는 기존 질서에 쉽게 편입되고 또 빗겨난다. 바로 이 찰나가 내 촉이 가장 민감한 지점이다. 물론 이렇게 사는 건 참 피곤한 일이지만 피곤하지 않은 삶이 어딨으랴… 그냥 다들 이렇게 사는 걸..

메모: 김지혜, 페미니즘, 레즈비언/퀴어 이론, 트랜스젠더리즘사이의 긴장과 중첩

이미 몇 번 읽었고, 제가 쓴 글에서 여러 번 인용했지만, 며칠 전 수업 자료라 다시 읽었습니다. 내용이 압축적이지만 그래도 중요한 쟁점을 아우를 뿐만 아니라 매력적인 성찰과 아이디어로 가득한 글이고요. 읽으며 이번에 유난히 좋은 구절을 따로 메모했습니다. 이번에 유난히 좋았다는 건, 다른 날 읽으면 또 다른 구절이 더 좋기도 하단 뜻입니다. 🙂
===
<영미문학페미니즘> 제19권 2호(2011)
페미니즘, 레즈비언/퀴어 이론, 트랜스젠더리즘사이의 긴장과 중첩
김지혜
배타적 영역 설정은 성별 이론들 사이의 논쟁에 등장하는 공간적 사유에서도 분명하게 확인될 수 있다. 보니 짐머만(Bonnie Zimmerman)은 “‘영토’나 ‘경계’와 같은 공간적 비유들이 페미니즘과 레즈비어니즘이라 불리는 단일한 공간“이 있는 것처럼 가정한다고 지적한다(166). 각각의 성별 정치학들을 고정된 공간의 점유로 이해할 때, 유동적 관계성은 조망될 수 없다. 젠더 이론들의 영역을 배타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각각의 영역을 단일하고 동질적인 범주로 전체화함으로써 내부적인 이질성과 다양성을 삭제하게 된다.(55)
가령, 재니스 레이몬드(Janice Raymond)와 쉴리아 제프리스(Sheila Jeffreys)는 트랜스젠더리즘을 페미니즘의 존립과 정치적 목적을 훼손하는 반(反)페미니즘으로 단언한다. 그러나 에미 코야마(Emi Koyama)가 분명히 말하듯이, 트랜스젠더의 실존이 위협하는 것은 페미니즘이 아니라 “젠더를 본질화하고 양극화하며 이분화하는 세계”이다(“Whose Feminism”  704). 트랜스젠더 주체성은 “여성 억압과 경험의 보편성”을 가정하며 “권력과 특권의 위치에 있는” 일부 페미니스트들에게 위협적인 것이다(ibid).(56)
헤스포드의 발상은 공리처럼 굳어진 역사적 해석이 어떤 특정 집단의 편집된 기억일 수 있으며 그들의 서사 속에서 다른 집단/시각의 역사가 은폐되고 침묵될 수 있음을 함의한다.(60)
할버스탬의 퀴어적 세대론은 비평적 젠더 이론들 사이의 오래된 적대적, 배제적 관계를 지양할 수 있는 인식론적 전환을 제공한다. 젠더 변이(gender variance)나 출생 시 부과된 젠더와의 불화(gender dysphoria)는 언제나 존재해 왔으며 최근의 현상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이든 페미니스트들은 젠더퀴어 주체나 트랜스젠더들을 이해할 수 없는 새로운 현상으로 간주함으로써 내면화된 트랜스 혐오를 세대 격차로 은폐하곤 한다. 그러나 재생산적 시간성을 해체한다면 새로운 세대로부터의 배움과 성찰도 가능하며, “과거에 대한 대안적인 독해로부터 대안적인 미래”가 그려질 수 있다(104).(64)
주디스 로버(Judith Lorber)는 탈젠더(degendering) 운동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젠더의 이원적 범주가 바로 여성의 불평등을 양산하는 구조라고 말한다(82).(66)
젠더 정치학의 연대는 권력 관계에서 자신의 위치에 대한 민감한 의식과 면밀한 검토를 필요로 한다.(70)
동일성에 기반한 정체성의 정치학으로부터 탈피해서 동일시의 정치학으로 연대한다면, 비평적 젠더 이론들은 더 많은 지점에서 교차하면서 자신들의 프레임과 세계를 탄력적으로 풍요롭게 재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