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의 아이러니, 범주의 복잡함 등

‘아이러니’란 표현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몇 년 전부터 아이러니란 표현을 사용할 때면 괄호해선 ‘엄밀하겐 아이러니가 아니지만’이라고 부연했죠. 그것도 몇 번이고 근래 들어선 아예 안 쓰고 있습니다. 어떤 현상을 두고 아이러니하다고 표현한다면, 이것은 적어도 저의 경험에 따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현상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언어의 전제 자체가 저와 다른 입장에서 접근하고 있음을 고민하는 거죠. 이를테면 비트랜스젠더 입장에선 모순이고 아이러니한 현상이 트랜스젠더 입장에선 그렇지 않을 수 있는 거죠. 그러니 어떤 현상을 두고 아이러니하다는 표현은 하지 않으려고 더욱 노력하는 나날입니다. 뭐, 일전에 쓴 어느 글에서 “이것이 모순이라면 내가 어떻게 살 수 있겠는가”라고 쓴 입장에선.. 흐. ;;
나는 어떤 논의가 정말 중요하다고 고민하여 여러 곳에서 비슷한 얘기를 하지만 그 얘기가 사람들에게 항상 감흥을 일으키는 건 아니다. 많은 경우 그 논의는 그냥 스쳐지나가는 여러 말 중 하나로 취급될 뿐이다. 이건 내가 촉이 없어서 생긴 문제겠지. 다른 사람이 중요하게 인식하는 이슈와 내가 중요하게 인식하는 이슈가 다르기에 여러 번 떠들어도 의미있게 다가가지 않는 거겠지.
그래.. 그럼 이제 나 혼자 알고 지내겠어.. 후후.
(하지만 아쉬워 할 사람이 없다는 건 함정. 크.)
범주의 복잡함을 받아들이는 건 단순히 타인을 용납하는 행위가 아니라 내가 알고 있는 역사와 사건을 완전히 새롭게 해석할 용기를 지니는 것이다. 이를테면 내가 공들여 트랜스젠더의 역사로 혹은 트랜스젠더 기록물로 해석한 어떤 것을 다른 범주의 역사나 기록물로 해석할 수도 있음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어쩌면 바로 이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다. 내가 열심히 트랜스젠더의 역사와 기록물로 해석한 것은 나의 범주를 구성하고 형성하는데 주요 토대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하리수 씨를 트랜스젠더로 해석할 수 없는 찰나가 온다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범주로 해석해야 하는 찰나가 온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러니 범주의 복잡함을 받아들이는 건 내 삶의 토대를 근본적으로 흔드는데 적극 참여하는 용기를 지님과 같다.
어려운 일이다. 참으로 어려운 일이고 나도 아직 잘 못 하고 있는 일이다.
+
어젠 알바를 하는데 어떤 연유로 짜증이 잔뜩 났습니다. 스트레스 지수가 상당히 높아졌고 누가 건드리면 애꿎은 이가 피해를 입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가는 50여 분 시간 동안 1쪽 분량의 수업 쪽글을 미친 듯이 썼습니다. 그렇게 초안을 완성하자 기분이 누그러들고 짜증도 사라졌습니다. 넥서스7을 잘 샀다고 다시 한 번 중얼거렸습니다.
기승전넥…

언급하지 않는 전략의 글쓰기

고의적으로 언급하지 않는 전략 혹은 그런 글쓰기를 훈련하려고 합니다. 이를테면 작년과 올해 초에 쓴 여성범주논쟁 관련 글에서, 제가 페미니즘의 역사로 설명한 이론가들 대다수가 퀴어이기도 합니다. 다만 글 전개에서 굳이 밝힐 필요가 없어 언급하지 않았고 글의 효과를 위해 일부러 언급하지 않기도 했습니다. 이를테면 버틀러는 그 자신을 페미니스트로 설명하지만 많은 이들이 퀴어이론가로 부르는 것처럼, 퀴어이자 페미니스트라고 하면 때때로 ‘퀴어’에 더 큰 비중을 두는 경우가 있더라고요. 이 경우 페미니즘 맥락에서 매우 중요한 논의임에도 ‘페미니즘 vs 퀴어이론’이란 말도 안 되는 이항대립에 따라 퀴어이론은 읽을 필요가 없다는 것처럼 반응하고요. 혹은 ‘그건 그가 페미니스트가 아니라 퀴어이론가라서 그렇다’는 식으로 반응하거나요. 전 그 이론가가 페미니즘 이론 맥락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설명하고 싶은데 ‘퀴어’란 수식어를 사용하는 순간 제 설명이 실패할 수밖에 없겠다 싶어 일부러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요즘 쓰고 있는 글에서도 비슷한 고민을 하며 시작했습니다. 단적으로 얘기해서 버틀러는 언급하지도 않고 인용하지도 않으려고 했습니다. 버틀러라는 이름이 가지는 묘한 효과가 있거든요. 섹스-젠더 개념 논쟁에서 버틀러의 매우 중요한 위치와 논의를 다루려고 하지만, 버틀러를 논하는 순간 비퀴어/비트랜스페미니즘과는 무관한 논의로 취급하는 어떤 분위기가 있으니까요. 특히나 퀴어 이슈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가 다수인 듯한 저널의 특성을 감안할 때 버틀러를 언급하는 순간, 제 논의는 실패할 수밖에 없겠다는 염려를 했습니다. 물론 버틀러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지요. 어떻게 버틀러를 언급하지 않고 섹스-젠더 논의, 주체 구성 논의를 전개할 수 있겠어요. 아울러 제 논의는 이미 트랜스젠더 이론을 밑절미 삼고 있다는 점에서 이미 아웃! 크.
예전엔 이런 식의 누락이 문제라고 이해했습니다. 이를테면 한국의 페미니즘과 여성학에서 논하는 많은 이론가가 퀴어이기도 한데 이 사실은 누락된다는 점에서, 한국여성학의 이성애(중심)주의를 비판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고의로 누락하는 전략을 고민하면서, 누락이 반드시 배제는 아닐 수도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야 할 얘기를 누락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저 특정 범주 명명만 언급하지 않을 뿐인 거죠. 그럼에도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닙니다. 진정 이런 전략 뿐인가,라는 어떤 유쾌하지 않은 상태가 몸 한 곳에 머물러 있으니까요. 어떤 방식이 가장 좋은 걸까요…

웹자보를 제작하고 홍보하는 분들께

웹자보를 제작하거나 기획하고, 또 홍보하는 분들께 몇 가지 요청 사항이 있어 씁니다. 물론 방문자 적은 이곳에 쓰는 것이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 싶지만… 그래도 검색에 얻어걸리는 경우가 있으니까요. 🙂
ㄱ. 웹자보는 가급적 크게 제작해주세요: 글자크기의 문제
웹자보의 기본 크기가 작으면 그 안에 들어갈 내용이 제한되거나 모든 내용을 넣기 위해 글자 크기가 작아집니다. 웹자보를 제작하는 분은 ‘이 정도 글자크기라면 다른 사람도 읽는데 무리가 없겠지’라고 판단하시겠지만,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웹자보 제작자 및 기획자와 동일한 시력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글자크기는 클 수록 좋아요.
웹자보에 들어가는 내용은 많은데 웹자보의 크기가 일정해지거나 작아지는 이유 중 하나는 트위터를 주요 홍보 수단으로 여기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순전히 추정). 그런데 모든 사람이 트위터를 사용하는 것은 아니며 트위터를 사용하는 모든 사람이 트위터에 최적화된 웹자보를 편하게 받아들이는 건 아닙니다. 그러니 웹자보 크기 및 글자크기에 신경을 써주시기 바랍니다.
ㄴ. 색깔 선택 및 배치의 문제
웹자보를 예쁘게 만들기 위해 혹은 어떤 통일감을 갖추기 위해 비슷한 색깔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요.. 모든 색깔을 분명하게 구분하는 사람 입장에선 그런 방식이 예쁘고 보기도 좋을 듯합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색깔을 분명하게 구분하는 건 아닙니다. 더 정확하게는 모든 사람이 색깔을 동일한 방식으로 인식하는 건 아닙니다. 흔히 ‘색약’으로 불리는 저의 경우, 특정 색깔을 섞어 사용하면 내용 구분도 못 하고 글자도 못 읽습니다. 웹자보가 행사 내용을 예쁘게 홍보하려는 목적도 있지만, 정보를 정확하게 전달하려는 목적이 더 크단 점에서 색깔 사용에도 신경을 써주시면 좋겠습니다. 이를테면 저는 이런 웹자보( http://goo.gl/Omnjo )를 선호합니다. 배경 색깔과 상관없이 글자를 정확하게 읽을 수 있거든요. 물론 이런 색깔 배치로 인해 읽기 어려운 분도 계실 테지만요.
ㄷ. 홍보는 이미지와 텍스트를 함께
위에 쓴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웹자보에 들어가는 내용을 모두 텍스트로 같이 배포하는 겁니다. 제 블로그에서 어떤 행사를 홍보할 때 사용하는 방법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으실 텐데요.. 저의 경우 홍보 내용을 텍스트로 먼저 제시하고 그 다음에 이미지를 제시하는 편입니다. 순서는 각자의 취향이겠지요. 중요한 건 홍보할 땐 이미지와 텍스트를 언제나 함께 사용하는 데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트위터가 정보를 빨리 전파할 순 있어도 좋은 홍보 매체는 아니라고 판단합니다. 글자수의 제약은 웹자보에 들어갈 내용 중 일부만 트위터에 쓰도록 하니까요. 이미지 파일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접근할 수 있는 정보와 이미지 파일을 읽을 수 없는 사람이 접근할 수 있는 정보가 동일해야 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러합니다.
웹자보를 제작함에 있어 유의사항은 더 많이 있겠지요. 제 입장에선 최소한 이 정도는 기본적으로 고려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