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교배, 관계, 범주명명

답글을 달다가 답글로만 남기기엔 아까워, 살을 조금 보탭니다.
트랜스젠더를 설명하는 주류 서사, 혹은 미디어를 통해 주로 등장하는 어떤 서사에 따르면 트랜스젠더 범주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경험은 ‘동성’(정확하겐 ‘이성’이지만 대개 ‘동성’을 좋아했다고 설명되죠)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mtf/트랜스여성이라면 남자를 좋아했고, ftm/트랜스남성이라면 여자를 좋아했다는 얘기. 이때부터 혼란을 느꼈고 자신의 젠더 범주를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고 자신이 여성 혹은 남성이란 점을 알았다고 얘기합니다. 이른바 이성애자 되기 서사기도 한 이런 식의 설명은, 동성애자 범주 형성과 변별점이 없음에도 트랜스젠더 범주 형성 서사로 널리 통용되죠. 이런 언설에 사람들이 납득하는 것도 좀 재밌는 일이고요.
(홍석천은 그래서 게이와 mtf/트랜스여성의 차이가 음경을 유지하고 싶어하느냐 자르고 싶어하느냐라고 우스개를 했지만 논쟁적 발언입니다. 혹은 무식한 발언입니다. 방송용 발언이란 점을 감안해도요.)
전 이렇게 좋아하는 대상을 근거로 트랜스젠더의 젠더 정체성 구성을 정당화하는 방식에 상당한 불편과 불만을 가진 편이었습니다. 이것이 트랜스젠더의 역사를 설명할 유일한 언어가 아님에도 마치 이렇게 설명해야 하는 것 같은 분위기를 형성하거든요. 그리하여 이성애자나 성애자가 아닌 트랜스젠더를 곤란한 상황에 빠뜨리고 존재할 수 없도록 만듭니다. 아울러 이런 식의 설명은, 자신이 기억하는 한 어릴 때부터 자신의 젠더를 알았다고 주장하는 또 다른 설명과 충돌합니다. 이를테면 ftm/트랜스남성이 자신은 3살 때부터 더 자라면 음경이 생길 줄 알았다고 말하며 자신의 남성 젠더 범주를 정당화하는 발언과 십대 시절 여성을 좋아하면서 젠더 범주에 혼란을 겪었다는 말은, 그렇게 호응하고 조화로운 설명은 아니니까요.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주류 서사로 자리잡고 있다는 점은 꽤나 흥미로운 현상이기도 하죠.
아무려나 이런 설명에 어떤 불편과 불만을 갖고 있음과는 별도로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이 자신의 범주를 다시 설명하는데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부정이라냐, 이건 꽤나 중요한 경험이기도 합니다. 상대와 나의 관계를 설명할 때면 나의 범주만이 아니라 상대방의 범주 역시 함께 고려해야 하니까요. 그리고 이렇게 하면 범주는, 그렇잖아도 복잡한 범주는 더 복잡하게 변합니다.
예를 들어 저의 파트너가 바이라고 가정하죠. 그리고 저는 공공연히 레즈비언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럴 때 둘의 연애 관계를 단순히 레즈비언 관계 혹은 여성 동성 간 관계라고만 말할 수는 없습니다. 레즈비언이나 여성 동성(애)관계란 명명은 저의 어떤 경험은 드러낼 수 있어도 상대방의 경험과 범주는 삭제하는 언설이고 그리하여 둘의 관계를 적절히 설명하기보다는 부적절하게 은폐하는 발화에 가까우니까요. 그래서 바이-레즈 관계라고 설명한다면 그나마 좀 괜찮을까요? 이런 설명은 성적지향은 어느 정도 표기한다고 해도 젠더 범주는 적절히 표현 못 합니다. 저는 제가 트랜스젠더란 점을 분명하게 부각하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상대방이 비트랜스여성이라면, 다시 바이 비트랜스-레즈비언 트랜스라고 표현한다면 조금은 더 적절한 설명일까요? 썩 만족스럽지는 않습니다. 동질성을 밑절미 삼아 이루어진 범주 명명은 그 토대에 적절히 부합하지 않는 관계를 계속 놓칠 뿐입니다.
기존 범주 설명, LGBT로 대표되는 범주 용어는 모든 관계를 지나치게 단순하게 가정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LGB와 T가 한덩어리로 묶여도 괜찮을지도 논쟁이고요. 관계를 감안하면 개인의 범주를 설명할 언어는 더욱 복잡하게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어떤 언어 전략을 고민해야 할까요?
*이 글은 E님 쓴 ‘이종교배’ 관련 글에서 촉발합니다. 아흥, 고마워요. 🙂

부재하는 아버지

가족에게 아버지-남성은 존재하는가? 한국 맥락에서 이 질문에 대답은 부정적이다. 아버지-남성은 언제나 향수의 대상, 말없는 권위의 화신, 묵묵하게 혹은 무뚝뚝하게 사랑을 표현하는 존재다. 다정한 아버지-남성은 특별한 사례로 등장하거나 본받을 사례로 등장할 뿐이다. 다른 말로 가족에게 아버지-남성은 거의 언제나 부재한다. 대화를 나눠봤다기보다는 묵묵부답이었고 친밀함을 형성했다기보다는 집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느낌만 있다. 이런 향수는 어머니-아버지의 젠더 역할은 여전히 견고하게 유지토록 하는 한 방법이다. 아버지의 권위와 권력은 부재하는 찰나에 발생한다. 물론 아버지 본인은 소외감을 느낀다고 하지만 이 소외감과 존재하는 듯 부재하는 상태가 아버지의 권력 실천 방식이기도 하다.
아버지가 부재한다면, 그러니까 한국 사회에서 아버지는 늘 부재한다면 다음 질문을 할 수 있다. 가족등록부에 아버지가 살아있지만 사실상 부재하는 집과 가족등록부에도 아버지가 부재하는 집을 굳이 구분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차피 둘 다 부재하는데 그럼에도 굳이 아버지의 존재감을 환기시키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존재감 환기가 아버지의 권위/권력을 유지하는 주요 방법이란 점도 있지만, 존재감을 환기한다고 해서 정서적 부재감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그렇다면 왜?
*나중이 쓸 원고의 메모입니다.*

트랜스젠더를 이해하는 방식4/4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매력적인 이론가로 남기는 힘들다. 과거엔 열광했는데 이후 발언에 실망하며 비판적 각을 세울 때가 있다. 물론 여전히 좋아하는 감정은 남아 있지만 더이상 열광하지는 않는다. 여전히 감탄하고 열광하는 이론가 중 한 명이 수잔 스트라이커다. 스트라이커가 처음으로 학술지에 쓴 글에서, 자신이 겪은 사라짐을 얘기한 적 있다. 의료적 조치를 하기 전엔 비트랜스 이성애자 남성으로, 의료적 조치를 한 이후론 비트랜스 레즈비언 여성으로, 어떤 자리에선 부치로, 어떤 자리에선 그냥 여성으로… 그렇게 트랜스젠더 범주가 사라짐을 얘기하며 자신의 삶과 범주를 고민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 중 하나고 여전히 몸을 치는 구절이다.
나 역시 스트라이커가 얘기한 경험과 유사할 것이다. 의료적 조치를 하기 전엔 그럭저럭 안전한 관계일 가능성이 크다. 나의 의도 혹은 나의 해석체계와 무관하게 나를 해석하는 사회적 의미체계를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연애는 위험을 내재한다. 중간에 내가 의료적 조치를 시작한다면 우리의 관계는 안전하다고 여기는 관계에서 위함한 관계로 변한다. 이 찰나, 관계가 위함해지는 찰나에 나의 트랜스젠더 범주는 가장 분명한 가시성을 획득한다. 트랜스젠더가 가시적일 때 위험해진다는 뜻이 아니라(기본적으로 이 말 자체는 옳은 편이지만) 위험한 상황으로 변하면서 레즈비언 mtf 트랜스젠더라는 나의 범주가 분명하게 드러난다는 뜻이다. 위험 상황은 나의 가시성이다. 스트라이커는 이 지점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이 지점을 놓친다.
사람들이 트랜스젠더 이슈에 있어 이 정도를 고민하고 파악하고 있기를 기대할 순 없다. 그저 내 블로그에 오는 분들이라면 트랜스젠더 이슈에 혹은 나에 관해 조금은 다른 감수성이기를 기대할 뿐이다. 몇 분이 ‘자신이 실망시켰구나’라고 말씀하셨지만 아니다. 그 분들 모두 내가 좋아하는 분이니까.
지난 글에 이어 계속하자. 어쩌면 아래 트윗이 블로깅을 하도록 했다. 그전까지는 그냥 웹의_흔한_트윗.twit으로 취급할 수 있다. 정말 다양한 얘기가 많잖은가. 혐오와 호의 사이 어딘가에 위치하는 무수한 말들. 듣는 사람은 불쾌한데 말하는 사람은 호의거나 그냥 자기 주장이거나. 암튼 두 개의 이어지는 트윗이다.
기본소득 지지하는 허클
‏@luddite420
@ysimock 약간 다르지만 여성은 아니고 남성의 사례는 있습니다. 남성인데 자신의 성정체성을 여성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수술은 안하지만 트랜스젠더라고 생각하고 있죠. 또한 여성을 좋아하니 레즈비언이고. 관련단체에서 활동도 하시고 책도 내시고 등등

기본소득 지지하는 허클
‏@luddite420
@ysimock 한겨레기사 대담에도 몇번 나오셨고 무엇보다 홈페이지에 관련 자료에 대해 자세하게 글을 올리시죠. 글도 잘 쓰시고. 홈페이지는 https://runtoruin.com  루인이란 이름으로 활동하십니다.
정확하게 나를 지칭하는 트윗이다. 나를 언급하는 트윗에 내가 직접 반응하는 것이 적절한 걸까 싶어 망설이기도 했다. 우연히 접하고도 며칠을 고민하다가 이렇게 글을 쓰기 시작했으니까.
남성의 사례라니.. 문제를 삼으려면 문장 하나하나 다 문제 삼을 수 있다. 다 걸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냥 넘어가려면 또 다 넘어갈 수도 있다.
처음엔 그냥 재밌었다. 무엇보다 내가 어떤 식으로 소비되고 유통되는지 알 수 있어서 혼자 깔깔 웃었다. 재밌어서 블로깅을 하기로 했다. 하지만 마냥 재밌지는 않다. 이유는 앞에서 계속 적었다. 저자의 기획과 독자의 독해는 별개의 문제란 점에서 내가 왈가왈부할 문제는 아니다. 그저 꼭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방법 뿐이었을까, 내가 얼마나 부족하게 적었나라는 고민을 놓을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이런 식의 표현은 내게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란 점에서 그냥 지나칠 문제가 아니기도 했다. 그나마 트랜스젠더라고 떠드는 내게도 여전히 남성이라고 표현하는데 그렇지 않은 이들에겐 어떻게 표헌할까?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ysimock의 트윗에 이어진 일련의 트윗이 트랜스젠더에 우호적이거나 호의적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그 반대다. 상당히 부정적이다. 혹은 어설프게 아는 척하거나. 이 지점에서 좀 더 화가 나는 건, 왜 트랜스젠더를 비롯한 비규범적 존재는 아무렇게 말할 수 있다고 믿는 걸까? 이를테면 양자역학이나 위상수학, 칸트 철학에 있어선 아무렇게 말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상당히 조심스럽게 얘기하거나 일단 배우는 자세를 갖는다. 하지만 여성학/페미니즘이나 퀴어/트랜스젠더 이슈에선 누구나 아무렇게 떠들 수 있다고 믿는다. ‘아무나’가 관건이 아니라 ‘아무렇게’가 관건이다. 그 어떤 이슈에도 아무나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아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다.
일련의 트윗을 읽으며 일단은 두 가지만 말하기로 했다. 첫째, 트랜스젠더 이슈를 말하기에 앞서 트랜스젠더를 문제 삼기보다 트랜스젠더를 신기한 대상으로 삼는 인식 자체를 문제 삼아야 한다. 둘째, 트랜스/젠더/퀴어 이슈를 누구나 말할 수 있는 건 좋지만 아무렇게 말하지는 말아야 한다. 이 두 가지만 유념하면 좋겠다. 사실 이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각자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정치학에서 요구하는 윤리를 트랜스젠더 이슈에도 대입하면 되는, 매우 간단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