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트랜스젠더 자서전, 목록

얼추 한 달 전에 한국 트랜스젠더 자서전과 관련한 글을 썼습니다. 그때 조만간에 공개하겠다고 했는데, 이런 저런 이유로 이제야 공개합니다. 아래는 퀴어락의 “주목! 이 자료”에 실린 글 전문입니다.절판된 책이 많으니 내용이 궁금하면 퀴어락에서 읽어주세요. 🙂
아울러 사진이 흐릿하거나 흔들린 듯 하다면, 다 의도입니다. 모든 것이 의도입니다. 일부러 자세하게 안 보여주려고 흔들린 듯 흐릿한 듯 찍은 겁니다. 그런 겁니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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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하리수 씨가 방송에 데뷔한 이후 트랜스젠더와 관련한 글은 얼마나 출판되었을까요? 막연하게 생각하면 얼마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럼 그 중 트랜스젠더 자서전은 몇 권이나 될까요? 많아야 두세 권 정도? 얼핏 생각하면 몇 권 안 될 듯합니다. 하지만 트랜스젠더 자서전으로 모아서 정리하면 그렇게 적지는 않습니다. 인터뷰집을 포함하면 총 9종이니까요. 느끼기에 따라선 무려 9종일 수도 있습니다.

현재까지 발굴한 기록물 중에서, 첫 번째 트랜스젠더 자서전은 누가 썼을까요? 지명도를 따지면 2001년에 나온 하리수 씨의 책일 듯합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첫 트랜스젠더 자서전은 1997년에 나온 ftm/트랜스남성 이동숙 씨가 쓴 <형이라 불리는 여자>(총 2권)입니다. 이동숙 씨는 이후 2000년에 이도미니카란 이름으로 <감옥여행>을, 2004년엔 이문기란 이름으로 <색다른 남자>를 썼습니다.
이문기/이동숙 씨 다음으로 나온 자서전은 진싱 씨의 자서전 <신의 실수도 나의 꿈을 막지 못했다>입니다. 2001년 5월에 나왔죠. 이 책이 흥미로운 건, 한국어 판본이 먼저 나왔고 이후 2004년 중국어 판본이 나왔다는 점입니다.
그 다음으로 하리수 씨의 자서전 <이브가 된 아담>이 2001년 8월, 김비 씨의 자서전 <못생긴 트랜스젠더 김비 이야기>가 2001년 9월에 나왔습니다.
2005년엔 문옥정 씨의 자서전 <이제는 말하고 싶다>가 나왔습니다. 자서전은 아니지만 자서전과 함께 이야기하면 좋을 법한 책 <다큐멘터리 북 3xFTM: 세 성전환 남성의 이야기>가 2008년에 나왔고요. 그러고 나서 김비 씨가 기존 자서전을 개정해서 2011년에 <네 머리에 꽃을 달아라>를 냈습니다.
이렇게 해서 mtf/트랜스여성의 자서전이 총 5권, ftm/트랜스남성의 자서전이 총 3권, ftm/트랜스남성의 인터뷰집이 총 1권 있습니다.
정리하고 보면 의외로 예상보다는 많다는 느낌도 듭니다. 하지만 여전히 부족합니다. 더 많은 트랜스젠더가 자신의 자서전을 출판해서, 트랜스젠더의 다양한 삶을 다양한 방식으로 이야기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퀴어락 운영위원, 루인.

잡담: 십대 트랜스젠더, 버르장머리 없는 글

ㄱ.
SNS에선 이미 유포가 되고 있겠지만(어떤 글이 나오면 바로바로 유포되니까요), 그래도 좋은 글은 많이 유통될 수록 좋으니까요.
혼자 읽기 아까운 글이 있어 공유합니다. 십대 트랜스젠더 활동가가 쓴 글입니다. 자신을 설명하는 방법도 매력적일 뿐만 아니라 아래 인용한 구절처럼 십대 트랜스젠더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성찰도 좋아요. 링크도 있으니 꼭 다 읽어보시길 추천하고요.
앞으로 어떤 활동을 하실지 모르겠지만(지금하고 있는 활동이 전부는 아닐테니까요) 앞으로 진행할 멋진 활동을 기대하고 있어요. 아는 분은 아니니 직접 전할 방법은 없지만 이렇게라도 전하고 싶달까요. 🙂
“한국 사회에서는 성인 트랜스젠더로 살아가기도 힘들지만, 청소년 트랜스젠더는 호적정정을 할 수도, 성별정정 수술을 할 수도 없다. 성인이 될 때까지는 남성인 척, 여성인 척하고 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청소년 트랜스젠더에게 필요한 권리는 성인이 된 후의 나중의 권리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살아갈 권리다.”
-르헨, “[미성숙 폭동] 성인이 될 때까지 여성인 척하고 살아야 하나: 트랜스젠더 청소년, 한국에서 살아남기
ㄴ.
지금 마무리하고 있는 원고를 퇴고하면서.. ‘아우, 내가 읽어도 참 건방지게 쓰고 있다’고 중얼거렸다. 크크크. ;;; 오만이 방자하고 무식이 닿을 곳 없다. 그래서 손발이 오그라든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그런데도 그냥 그렇게 가기로 했다. 원래 목적이 그랬으니까. 나의 건방진 태도가 깔보는 자세가 아니라 이른바 말대꾸라고 믿기 때문이다. 벨 훅스는 기존 질서의 정의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 그래서 권력자의 말에 말대꾸하는 것이 저항의 주요 형태라고 주장했다. 나의 글 역시 그런 말대꾸라고 믿는다. 물론 다른 사람도 이렇게 읽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말대꾼데 상대방은 버르장머리 없는 걸로 이해하면 어떡하지? ㅠㅠ 뭐, 말대꾸와 버르장머리 없는 건 별차이가 없긴 하지만.. ㅠㅠㅠ 아니, 버르장머리가 없는 게 아니라 그냥 무식한 헛소리면, 인식론이 달라서가 아니라 정말 무식한 헛소리면 어떡하지? ㅠㅠㅠ

정의와 정의 사이

이곳에 방문하는 분은 ‘정의’란 단어를 들을 때 어떤 뜻을 가장 먼저 떠올리나요?
ㄱ. 정의. 正義. Justice. 진리에 맞는 올바른 도리.
ㄴ. 정의. 定義. Definition. 어떤 말이나 사물의 뜻을 명백히 밝혀 규정함. 또는 그 뜻.
#출처: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온라인 판본.
언젠가 웹서핑을 하다가 ‘정의’란 단어를 읽고 ㄱ의 justice를 떠올리면 문과고 ㄴ의 definition을 떠올리면 이과라고 구분한 게시글을 읽은 적 있다. 이런 구분은 많다. “40-32÷2=?”란 시험문제에 초등학생이 “4!”라고 적었는데 이 답이 틀렸다고 답하면 문과, 맞다고 답하면 이과라고 구분하는 식의, 뭐, 그런 글이었다.
난 definition을 떠올린다. 당연하지. 학부 4년 동안 한 학기도 빼지 않고 배운 게 Definition(def.)인데. 수학과 수업은 definition으로 시작해서 definition이나 Q.E.D.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정의定義를 중시한다. 해당 수업에서 사용하는 용어의 정의를 먼저 설명해야 이후 논의를 전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금 딴 소린데, 이런 수업 방식은 내가 공부하고 글을 쓰는데 알게 모르게 도움을 주고 있다.)
이런 영향에서인지 몰라도, 지금까지 내가 쓴 글에 ‘정의’란 단어를 썼다면 그 중 팔 할은 定義를 지칭한다. 아니, 내가 쓴 글에서 正義를 얘기한 적이 있나 싶다. 나는 거의 자동으로 정의를 定義로 사용하지만, 정의가 正義로 해석될 가능성이 더 크다는 걸 알기에 일부러 ‘정의’란 단어 옆에 한자 定義를 함께 표기하곤 한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正義와 定義는 분명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둘 다 누가 어떤 맥락에서 주장하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누구를 위한 정의인가?”란 문장은 正義로 쓸 수도 있고 定義로 쓸 수도 있다. 正義 자체가 권력 관계의 산물이며, 권력 관계에 따라 다른 의미를 지닌다. ‘빵을 훔치면 벌금 100만 원’이라는 법적 正義는 모든 인간의 계급과 경제적 상황을 동등하게 둔다는 점에서 正義라고 단언하기 힘들다. 특정 계급의 이해를 반영하는 문장이다. 따라서 正義는 定義될 수밖에 없다. 맥락과 가치를 밑절미 삼는 定義에 따라 正義가 성립된다는 점에서 “누구를 위한 正義인가?”란 문장은 “누구를 위한 定義인가?”와 별로 다르지 않다.
학부에서 수학을 전공하면서 얻은 가장 큰 배움이 이 지점이다. 정의는 맥락적이다. 그래서 정확하게 정의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