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호교차성 01

어제 지하철에서 쓴 글은 아니고 지난 3월에 쓴 쪽글입니다.
작년까진 글을 읽고 자신의 고민을 써야 했다면 올해는 저자의 주장을 정리하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제 개인 기록용으로는 의미가 있지만 다른 분에겐 어떨는지… 흠…
2013.03.20.수. 14:00-
-루인
여성억압, 인종억압, 계급억압과 같은 식의 언설, 그리하여 노동계층 흑인 여성은 삼중억압을 겪고 한국에서 레즈비언은 이중억압을 겪는다는 식의 언설은 매우 빈번게 쓰인다. 이런 언설은 한 개인이 겪는 복합 억압을 표현하기에 적합하다며 널리 쓰이기도 한다. 니라 유발-데이비스(Nira Yuval-Davis)는 글 서두에 벨 훅스(bell hooks)를 인용하며 삼중억압과 같은 언설을 비판한다. 벨 훅스는 여성억압, 흑인억압과 같은 식의 언설이 ‘모든 여성은 백인이고 모든 흑인은 남성’이라고 가정함을 비판한다. 이 지적은 교차성 개념을 이해하는데 핵심이며 유발-데이비스가 이 글을 통해 계속해서 지적하는 부분이다. 유발-데이비스 역시 1980년대 초부터 삼중억압과 같은 식의 설명을 비판했는데, 단적으로 얘기해서 이중 삼중 억압, 그리하여 ‘흑인으로’ ‘여성으로’ ‘노동계층으로’ ‘레즈비언으로’ 겪는 억압에 따른 고통 같은 것은 없다(195). 미국에 거주하는 흑인레즈비언이라면 흑인으로 억압을 받고, 레즈비언으로 따로 억압을 받고, 여성으로 또 따로 억압을 받는 식이 아니다. 물론 특정 맥락에서 어느 한 가지 범주/사회적 구분으로 더 억압받을 수는 있다(203).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개별적으로 작동함은 아니다. 각 범주는 서로 얽힌 상태로 작동한다.
삼중 억압과 같은 언설, 각 범주/사회적 구분을 별개로 이해하는 인식[더하기 모델로도 불리는데]은 그 의도가 무엇이건, 범주를 자연화한다(199). 뿐만 아니라 해당 범주의 더욱 주변적 구성원의 경험을 비가시화하고 해당 범주의 적절한/적법한 구성원이 되기 위한 ‘올바른 방법’을 규범화한다(195). 그래서 더하기 모델은 여성이 겪는 다양한 억압을 설명하기 위한 시도임에도 여성의 삶을 설명하는데 실패한다.
유발-데이비스가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듯 교차성 개념은, 그 용어가 널리 쓰이는 만큼 다양한 방식으로 쓰인다. 특히 교차성으로 여성이 겪는 삶의 복잡성을 설명하고자 하는 UN 등의 기관 보고서는 교차성 개념을 빈번하게 사용함에도 그 원래 의미와는 다른 식으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이를 테면 크렌쇼(Kimberle Crenshaw)는 교차성을 수월하게 설명하기 위해 교차로 모델을 예로 든다. 이런 설명이 호주 인권과고용평등위원회에선 개인적 이슈로 설명되고 여성글로벌리더쉽센터에선 개별 정체성으로 환원된다. 교차성을 정체성의 더하기 모델로 이해하는 정책에선 개인의 복잡하게 얽혀 있는 삶이 단순 경험 수준으로 남겨지고 복잡한 수위는 구분이 안 되는 상태로 남겨진다(197).
교차성을 하위 범주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 역시 곤란하다. 어떤 한 범주는 다른 범주의 하위 범주가 아니다(200). 흑인이거나 여성인 것이 노동계급의 또 다른 방식이거나 하위 분류가 아니란 뜻이다. 일단 여성이 있고 여성을 수식하는 계급, 인종, 성적지향, 장애/비장애 등이 있는 게 아니다. 범주를 다양하게 나열하는 방식은 물론 인간 경험을 복잡하게 사유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기도 한다. 누락되어서 인식 가능성 외부에 있을 경우 인식을 위한 투쟁도 필요하다. 그렇다고 그것을 개별의 취합으로 이해해선 안 된다. 교차성은 복잡한 경험을 복잡하게 이해하는 실천, 그리하여 유발-데이비스의 지적처럼 인간의 삶에 가장 근접한 설명 방법이다. 한 가지 아래 여러 정체성을 찾은 것이 아니라 여러 범주/사회적 구분이 서로 어떻게 얽혀 있고 영향을 주고 받는지를 탐문하는 작업이다(205). 특정 위치성, 그것에 반드시 상응하는 것은 아닌 정체성, 그리고 정치적 가치가 어떻게 구성되고 특정 지역과 맥락에서 서로 어떻게 연관되고 영향을 주고 받는지를 분석함이 교차성 분석이며 이 작업이 중요하다(200).

누구의 아이러니, 범주의 복잡함 등

‘아이러니’란 표현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몇 년 전부터 아이러니란 표현을 사용할 때면 괄호해선 ‘엄밀하겐 아이러니가 아니지만’이라고 부연했죠. 그것도 몇 번이고 근래 들어선 아예 안 쓰고 있습니다. 어떤 현상을 두고 아이러니하다고 표현한다면, 이것은 적어도 저의 경험에 따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현상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언어의 전제 자체가 저와 다른 입장에서 접근하고 있음을 고민하는 거죠. 이를테면 비트랜스젠더 입장에선 모순이고 아이러니한 현상이 트랜스젠더 입장에선 그렇지 않을 수 있는 거죠. 그러니 어떤 현상을 두고 아이러니하다는 표현은 하지 않으려고 더욱 노력하는 나날입니다. 뭐, 일전에 쓴 어느 글에서 “이것이 모순이라면 내가 어떻게 살 수 있겠는가”라고 쓴 입장에선.. 흐. ;;
나는 어떤 논의가 정말 중요하다고 고민하여 여러 곳에서 비슷한 얘기를 하지만 그 얘기가 사람들에게 항상 감흥을 일으키는 건 아니다. 많은 경우 그 논의는 그냥 스쳐지나가는 여러 말 중 하나로 취급될 뿐이다. 이건 내가 촉이 없어서 생긴 문제겠지. 다른 사람이 중요하게 인식하는 이슈와 내가 중요하게 인식하는 이슈가 다르기에 여러 번 떠들어도 의미있게 다가가지 않는 거겠지.
그래.. 그럼 이제 나 혼자 알고 지내겠어.. 후후.
(하지만 아쉬워 할 사람이 없다는 건 함정. 크.)
범주의 복잡함을 받아들이는 건 단순히 타인을 용납하는 행위가 아니라 내가 알고 있는 역사와 사건을 완전히 새롭게 해석할 용기를 지니는 것이다. 이를테면 내가 공들여 트랜스젠더의 역사로 혹은 트랜스젠더 기록물로 해석한 어떤 것을 다른 범주의 역사나 기록물로 해석할 수도 있음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어쩌면 바로 이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다. 내가 열심히 트랜스젠더의 역사와 기록물로 해석한 것은 나의 범주를 구성하고 형성하는데 주요 토대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하리수 씨를 트랜스젠더로 해석할 수 없는 찰나가 온다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범주로 해석해야 하는 찰나가 온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러니 범주의 복잡함을 받아들이는 건 내 삶의 토대를 근본적으로 흔드는데 적극 참여하는 용기를 지님과 같다.
어려운 일이다. 참으로 어려운 일이고 나도 아직 잘 못 하고 있는 일이다.
+
어젠 알바를 하는데 어떤 연유로 짜증이 잔뜩 났습니다. 스트레스 지수가 상당히 높아졌고 누가 건드리면 애꿎은 이가 피해를 입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가는 50여 분 시간 동안 1쪽 분량의 수업 쪽글을 미친 듯이 썼습니다. 그렇게 초안을 완성하자 기분이 누그러들고 짜증도 사라졌습니다. 넥서스7을 잘 샀다고 다시 한 번 중얼거렸습니다.
기승전넥…

언급하지 않는 전략의 글쓰기

고의적으로 언급하지 않는 전략 혹은 그런 글쓰기를 훈련하려고 합니다. 이를테면 작년과 올해 초에 쓴 여성범주논쟁 관련 글에서, 제가 페미니즘의 역사로 설명한 이론가들 대다수가 퀴어이기도 합니다. 다만 글 전개에서 굳이 밝힐 필요가 없어 언급하지 않았고 글의 효과를 위해 일부러 언급하지 않기도 했습니다. 이를테면 버틀러는 그 자신을 페미니스트로 설명하지만 많은 이들이 퀴어이론가로 부르는 것처럼, 퀴어이자 페미니스트라고 하면 때때로 ‘퀴어’에 더 큰 비중을 두는 경우가 있더라고요. 이 경우 페미니즘 맥락에서 매우 중요한 논의임에도 ‘페미니즘 vs 퀴어이론’이란 말도 안 되는 이항대립에 따라 퀴어이론은 읽을 필요가 없다는 것처럼 반응하고요. 혹은 ‘그건 그가 페미니스트가 아니라 퀴어이론가라서 그렇다’는 식으로 반응하거나요. 전 그 이론가가 페미니즘 이론 맥락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설명하고 싶은데 ‘퀴어’란 수식어를 사용하는 순간 제 설명이 실패할 수밖에 없겠다 싶어 일부러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요즘 쓰고 있는 글에서도 비슷한 고민을 하며 시작했습니다. 단적으로 얘기해서 버틀러는 언급하지도 않고 인용하지도 않으려고 했습니다. 버틀러라는 이름이 가지는 묘한 효과가 있거든요. 섹스-젠더 개념 논쟁에서 버틀러의 매우 중요한 위치와 논의를 다루려고 하지만, 버틀러를 논하는 순간 비퀴어/비트랜스페미니즘과는 무관한 논의로 취급하는 어떤 분위기가 있으니까요. 특히나 퀴어 이슈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가 다수인 듯한 저널의 특성을 감안할 때 버틀러를 언급하는 순간, 제 논의는 실패할 수밖에 없겠다는 염려를 했습니다. 물론 버틀러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지요. 어떻게 버틀러를 언급하지 않고 섹스-젠더 논의, 주체 구성 논의를 전개할 수 있겠어요. 아울러 제 논의는 이미 트랜스젠더 이론을 밑절미 삼고 있다는 점에서 이미 아웃! 크.
예전엔 이런 식의 누락이 문제라고 이해했습니다. 이를테면 한국의 페미니즘과 여성학에서 논하는 많은 이론가가 퀴어이기도 한데 이 사실은 누락된다는 점에서, 한국여성학의 이성애(중심)주의를 비판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고의로 누락하는 전략을 고민하면서, 누락이 반드시 배제는 아닐 수도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야 할 얘기를 누락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저 특정 범주 명명만 언급하지 않을 뿐인 거죠. 그럼에도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닙니다. 진정 이런 전략 뿐인가,라는 어떤 유쾌하지 않은 상태가 몸 한 곳에 머물러 있으니까요. 어떤 방식이 가장 좋은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