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어페미니즘, 트랜스페미니즘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학은 스스로 재판관이 되지 않는 것이다. 어떤 사건에도 연루되지 않은 투명한 주체, 마치 공정하고 당파성이라고는 없는 재판관처럼 굴지 않는 것을 중시한다.
재판관처럼 굴지 않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인데 이것은 욕먹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며, 내가 결국 어떤 당파성에 위치해 있음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가해자가 될 수 있으며 내가 피해자라고만 나를 주장할 수 없음 역시 인정하고 인식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피해자일 때조차 내가 가해자가 될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판관처럼 굴지 않는 태도는 정말 어렵다. 내가 절대적으로 옳고 내가 하는 말은 다 정당하며 나는 순결하다는 인식에서 벗어나야 하기 때문에 더더욱 어렵다. 퀴어와 페미니즘이 교차하는 공간에선 더욱 그렇다.
나는 내가 재판관처럼 굴지 않는다고 장담하지 못한다. 하지만 너무 많은 상황에서 너무 많은 사람이 재판관처럼 자신은 중립이라도 되는 것처럼 행동하고 아무말이나 떠들다가 자신이 불리해지면 그 말을 슬쩍 지운 다음 아무일 없었다는 듯 행동하는 것을 볼 때마다 당황한다. 때로 아예 대심판관처럼 바뀌는 모습을 볼 때면 곤혹스럽다.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자신을 퀴어/페미니스트라고 주장할 때 더 큰 난감함을 느낀다.
정치학이란 무엇일까? 퀴어페미니즘 정치학이란 무엇일까? 물론 모든 정치적 언어는 알려지는 순간부터 최초 의도 따위 상관없이 아무렇게 쓰인다. 그것을 탓할 수는 없다. 탓할 문제가 아니라 새롭게 쓰이는 방식으로 재개념화 해야 하고, 동시에 바로 그 개념을 강력하게 비판해야 한다. 하지만 질문은 계속해서 남는다. 정치학이란 무엇일까. 퀴어페미니즘 정치학이 폭력의 도구로 쓰일 때, 현장에 삶을 투신해서 만든 언어와 고민을 두고 탁상공론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을 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도 고민이 된다. 때론 뭐가 뭔지 모르겠다 싶을 때도 있다.
맥락 없이 정치적 용어를 마구 사용할 때 발생하는 폭력을 목격하고 있다. 신뢰란 무엇인지 고민한다. 사유란 무엇인지, 변해가는 시대에 맥락과 책임 그리고 윤리란 무엇인지도 고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