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자

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SNS가 세계를 재구성하고, 책임감, 시간성, 맥락 등의 개념이 전면적으로 바뀌고 있는 시대에 공부란 뭘까? SNS에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으면서 연구를 할 수 있을까? 그런 연구는 가능할까? 지금 현재에 적극 개입하고 현실을 계속해서 사유하는 동시에 SNS로 재편되고 있는 세계에 대항하는 방식으로 공부하는 것은 가능할까?

무책임함이 독려되고(공적 발언이 문제가 되면 그냥 삭제하는 것으로 해결하고), 24시간이 영겁과 같은 시간으로 인식되고(24시간 이내 대답이 없으면 무시한 것이 되고 몇 시간 전 사건도 오래 전에 흘러간 사건이 되고), 맥락이 전적으로 무시되어도 괜찮은(캡쳐한 장면 하나가 모든 것을 판단할 근거가 되고) 방식으로 인식이 바뀌고 있을 때, 책임감, 시간성/역사성, 맥락을 고집스럽게 붙들고 연구를 하거나 공부를 한다는 것은 어떤 태도일까?
나는 아직도 무인도나 극소수의 사람과만 연락이 되는 곳에서 몇 년 간 공부를 하고픈 욕심, 혹은 로망을 못 버리고 있다.
물론 내가 고립된 곳에 간다면 몇 년 간 뒹굴거리며 놀기만 하겠지만…

잡담

무책임함을 독려하는 SNS시대에 책임감이란 뭘까란 고민을 하고 있다.
자신이 퀴어페미니스트라고 말하며, 퀴어하지 않은 페미니즘은 페미니즘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그리고 그 논리가 성립할 수 있다면, 그렇게 말하는 당신의 논의는 조금도 퀴어하지 않다는 평가도 성립할 수 있다.
어쩐지 퀴어페미니즘과 퀴어페미니스트가 정치학이 아니라 정체성으로 소비되는 인상이라 당혹스럽다.

남성성 관련 책 작업, 글쓰기

성문화연구모임 도란스의 두 번째 기획으로 남성성 관련 책을 준비하고 있다. 몇몇은 아예 새로 글을 썼고, 몇몇은 [남성성과 젠더]에 실린 글을 대대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개고하는 수준으로 쓰고 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흥미로운 점, 글을 쓰는 사람에게만 흥미로운 점이 발생했다. 예전에 낼 때는 문제가 안 되거나, 그냥 넘어간 많은 문장이 지금은 문제가 되고 있다. 정치적 올바름 같은 방식의 문제가 아니라, 설명이 충분하지 않고 문장이 모호하다는 방식의 문제다. 그때는 충분히 설명했다고 인지되어서인지 출판된 글인데, 지금은 설명이 충분하지 않다거나 모호하다는 식으로 수정을 요청받고 있다. 필자들이 서로 이렇게 논평을 하기도 하고, 출판사 편집자느님께서(!) 요청하기도 한다.

어떻게 하면 좋은 글을 쓸 수 있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아무도 안 묻겠지만), 좋은 편집자를 만나야한다고 답하고 싶다. 정말이다. 편집자가 어떤 의지로 어느 수준까지 개입하느냐에 따라 글의 질이 달라짐을 깨닫고 있다. 물론 편집자의 모든 논평을 받아들이지는 않겠지만, 95% 이상은 받아들이는 것이 옳다고 믿는다. 나머지 5%는 내가 미묘하게 표현을 잘못해서 발생한 것이고. 그러니까 모든 잘못은 저자의 잘못이다.
그나저나 토요일에 [양성평등에 반대한다] 북토크 행사가 있는데, 어째 사고를 칠 것 같다. 호호호. ;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