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기본 강의 1: 표절

작년 여름방학 때, 학과 동료 몇 명과 글쓰기 세미나를 진행했습니다. 그때 사용한 강의 자료를 서너 번에 걸쳐 이곳에 공개할 계획입니다. 이미 아는 내용일 수도 있고 의외로 낯선 내용일 수도 있고요. 아래도 적었지만 오탈자 및 비문이 있지만 수정하지 않았습니다… 귀찮았.. 아, 아니, 그게 바빴.. 아니… 그냥 넘어가주세요.. ㅠ
글쓰기 방법 관련 세미나 
-글쓰기 기본: 표절, 인용, 참고문헌 등 by 루인
2012.07. 초안 작성 // 2013.02.14. 수정.
*오탈자 및 비문이 (있을 수)있습니다. “글쓰기 관련 글에 오탈자 및 비문이라니!”라고 지적하실 수 있는데요. 넘어가주세요. ㅠㅠ
02 표절[Plagiarism]
“북미지역의 학교에서 제대로 인용하지 않은 문장은 표절로 간주되고 표절하면 교칙에 따라 벌 받거든요;; 대학교에서 표절하면…무려 퇴학.” – 지인이 블로그에 남긴 댓글
지난 총선 때 문**(익명 처리하는 이유는 언급하는 것도 아까워서) 씨는 문도리코란 별명을 얻으며 논문 표절 논란에 휩싸였습니다. 타인의 논문을 오탈자까지 그대로 배꼈다는 논란. 하지만 조금만 고민하면, 학부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공부하며 표절 개념을 제대로 배운 적 있나요? 어디까지가 표절이고, 어디까지가 표절이 아닌 것일까요?
*표절 이슈를 비롯한 이후의 내용은 The Modern Language Association of America. MLA: Handbook for Writers of Research Papers. 7th ed. New York: MLA, 2009. Print.(이하 MLA)를 밑절미 삼았습니다. 별다른 표시 없이 나오는 쪽번호는 모두 이 책을 지칭합니다.
표절은 유괴범(kidnapper)에서 파생한 단어로 도둑질하거나, 기존의 자원을 훔쳐 마치 새로운 것 혹은 자신만의 독창적 아이디어로 포장하는 것을 지칭한다(52). 표절은 다음 두 가지를 뜻한다: 다른 사람의 동의(=인용) 없이 그의 아이디어, 정보, 혹은 표현을 사용하는 것;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 정보 혹은 표현을 더 좋은 평가를 얻기 위해 마치 자신의 것인양 사용하는 것(52). 간단하게 예를 들어, 책을 비롯한 기록물에서 읽은 것 뿐만 아니라 수업시간에 강사가 했던 발언이나 논평, 친구와의 대화 등 모든 것을 출처 없이 사용하는 것은 표절이다. 혼자 방구석에 틀어박혀 떠올린 아이디어(이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며)가 아니라 누군가와 얘기를 나누며 들은 것, 어디서 읽은 것 등은 모두 그 출처를 밝혀야 한다(즉, 인용해야 한다). 아이디어가 같은 경우, 상대방의 것이 먼저 출판되었다면 무조건 인용해야 한다. 그 아이디어가 아무리 해당 출판물을 읽기 전 떠올린 것이라고 해도 그것이 먼저 출판된 이상 그 아이디어는 인용해야 하는 아이디어다. 아울러 정확한 출처를 밝히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최소한 누가 했던 말인지 정도는 밝혀야 한다. 이것이 기본이다. 표절은 기본적으로 법적 문제기도 하지만 더 중요하게 윤리적 문제다(52). 즉 저자의 양심, 윤리 문제다.
외국 논문이나 단행본을 보면 논문의 각주1번이나 별도의 Acknowledgement로 감사인사를 작성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다양한 의미가 있다. 첫째, 글을 작성하며 도움을 준 사람을 밝히는 것은 자신의 글이 자기 혼자만의 글이 아니라 이른바 공동작업임을 밝히는 작업이다. 둘째, 이것은 글 곳곳에 다른 사람의 논평이 개입되어 있을 때, 그리고 이것을 일일이 인용하기 애맴하거나 밝히기 어려울 때, 이 상황을 알리는 작업이기도 하다. 즉, 글 전체에 논평을 받았거나 곳곳에서 다양한 아이디어를 받았지만 그것 자체를 직접 인용하긴 어려운 상황일 때 감사인사를 통해 이를 밝히는 것이다. 감사인사를 작성하는 것은 저자가 특별히 더 착한 사람이고 인간관계가 좋은 사람이란 뜻이 아니라 그냥 글쓰기의 기본(=윤리)이다.
그리하여 표절은 글쓰기에서 윤리 이슈다. 단순히 다른 사람 아이디어를 훔쳤다 아니다가 아니라 글쓰기에서 어떤 윤리로, 어떤 태도로 접근할 것이냐란 이슈다.
그럼 MLA에 나와 있는 예를 통해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다른 사람의 글을 뻔뻔하게 자기가 쓴 것처럼 내는 것이야 표절이라고 말할 필요도 없다. 이것보다 좀 애매한 경우를 살펴보자. 이를 테면 다른 사람이 쓴 단어를 사용하거나, 다른 사람이 쓴 유려한/폼나는 구절을 사용하거나 다른 사람의 논의, 다른 사람의 사유 선상에 있는 것을 활용할 때다(56).
ㄱ. 단어를 인용할 때(재인용한 영어문장은 모두 56쪽에 실린 것이다)
원문(Martin, 625)
Some of Dickinson’s most powerful poems express her firmly held conviction that life cannot be fully comprehended without an understanding of death.
이 문장을 다음과 같이 사용했다고 치자.
Emily Dickinson firmly believed that we cannot fully comprehend life unless we also understand death.
만약 이렇게 작성했다면 이것은 표절이다. 사실 누가 봐도 표절 -_-;; 하지만 사실 이렇게 정리하고 인용표시 안 하는 경우가 매우 빈번한 것도 현실. 이를 제대로 표현하려면
As Wendy Martin has suggested, Emily Dickinson firmly believed that we cannot fully comprehend life unless we also understand death(625).
웬디 마틴의 책 625쪽에서 한 말이란 점을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 물론 이것은 MLA 스타일이라 자신이 어떤 스타일에 따르느냐에 따라 인용 표기는 다르긴 하다. 간접 인용일 경우 MLA는 인용할 때 저자 이름, 괄호 속에 쪽번호를 가급적 문장 끝에 쓸 것을 권한다(더 자세한 것은 ‘인용’ 장에서).
ㄴ. 유려한/폼나는 구절 인용하기(영문은 57쪽의 것이다)
원문
Everyone uses the word language and everybody these days talks about culture… “Languaculture” is a reminder, I hope, of the necessary connection between its two parts. (Michael Agar, Language Shock: Understanding the Culture of Conversation [New York: Morrow, 1994; print; 60])
만약 글을 쓰다 다음처럼 적었다고 치자.
At the intersection of language and culture lies a concept that we might call “languaculture.”
이것은 표절이다. Agar가 만든 언어를 마치 보편적 용어처럼 사용했기 때문이다. 제대로 표현하자면
At the intersection of language and culture lies a concept that Michael Agar has called “languaculture”(60).
ㄷ. 사유의 흐름을 인용하거나 논의할 때
(영문이 길어 다 옮기기 귀찮으니 생략.. 크크 ;; )
어떤 사람의 두어 문단을 읽고 그것을 이른바 요약하는 문장을 쓸 때 반드시 인용을 표시해야 한다. 해당 요약을 시작하기 전 원저자의 이름을 밝혀야 하며, 해당 요약이 끝났을 때 출처를 밝혀야 한다는 뜻이다.
예) 리카에 따르면, 야옹이는 야옹야용야옹하고 울었다고 한다. 이것은 아용야옹아용하고 우는 것과 야용야옹야용하고 우는 것은 다르다는 뜻이다(10).
위와 같은 표기는 리카에 따르면이라고 시작하는 부분부터 인용 쪽번호가 나오는 구절까지 모두 리카의 의견임을 뜻한다.
다른 어떤 글쓰기보다 학술적 글쓰기에서 인용은 매우 중요하지만 인용 없이 쓸 수 있는 경우도 있다. 그것은 독자와 학제 구성원이 폭넓게 받아들이고 있는 논의를 얘기할 때 그러하다. 이를 테면, “젠더는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된다.”와 같은 구절을 여성학과나 문화학과 구성원을 대상으로 쓴다면 인용이 필요없다. 이것은 인용 표기를 하지 않아도 표절에 해당하지 않는다. 하지만 독자에게 관련 참고문헌을 알려주고자 할 경우, 해당 논의에 충분히 의미 있는 반론이 있을 경우, 혹은 독자와 특정 분과 학제에 낯선 내용일 경우 인용을 표기해야한다. 아울러 글을 쓰는 과정에서 애매하다 싶을 경우엔 그냥 인용 표기를 하는 것이 좋다. 그것이 표절을 피하는 길이다. 자유롭게 타인의 논의를 사용하되 내것처럼 쓰지는 말아야 한다.
MLA는 표절을 피하는 방법을 제안하고 있다. 우선 나의 아이디어, 나의 요약,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 및 사실을 구분해서 표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정리 노트 등을 작성할 때 이것을 반드시 구분하고 분명하게 표시해두는 것이 필요하다. 아울러 내가 무엇을 읽었는지 평소 꼼꼼하게 기록하는 것이 중요하다(55).
표절을 둘러싼 몇 가지 관련 이슈를 더 살피면
ㄱ. MLA는 자신의 이전 연구를 재활용하며 아이디어를 더 개진하고 싶을 경우엔 연구책임자 혹은 지도교수, 이전 연구를 출판한 저널과 상의할 것을 권하고 있다(59). 여기에 몇 가지 덧붙이면, 과거 연구를 재활용할 경우, 각주에 반드시 이를 표시해야 한다.
ㄴ. 공동연구일 경우, 그 연구를 바탕으로 논문을 출판할 땐 반드시 연구책임자 및 다른 공동연구자에게 동의를 구해야 한다. 자신이 연구책임자일 때도 마찬가지지만 연구책임자가 아닐 경우엔 더욱더 동의를 구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이것은 상당히 문제가 있는 행동이다. 해당 연구를 계기로 또 다른 후속 연구를 진행하고 발표할 경우에도 이전 공동연구자의 동의를 구하는 것이 좋다. 이것은 공동연구자에 대한 기본 예의(=윤리) 문제다.
표절문제에서 타인의 아이디어를 훔치는 것 외에 또 다른 중요한 문제는 자기표절이다. 아직은 논쟁적 이슈로서 학위 논문의 PDF 공개를 둘러싼 표절 논쟁도 있다. 웹 출판이 빈번하고, 웹페이지(게시판, 블로그, SNS 등)에 작성한 글 모두가 출판물의 일종이다. MLA는 이 모든 것을 인용하는 방법을 제공하고 있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학위논문을 온라인에 PDF로 공개하는 것은 그 자체로 출판이다. 실제 한국에서 나온 학위논문 대다수를 인쇄판으로 열람하기보다 PDF라는 온라인 출판물을 컴퓨터로 혹은 인쇄해서 열람하고 있다. 그래서 PDF로 공개한 기록물을 다른 형태로 재활용하는 것이 표절인가 여부로 논쟁이 일고 있다. 즉, PDF로 공개한 학위논문을 단행본으로 재출간할 때 이것이 이중출판인지, 자기표절인지, 그렇지 않은지가 논쟁거리다(단행본 출간 예정인 학위논문의 경우 PDF 열람이 금지되는데 이것은 단순히 출판사의 사정 – 도서 판매의 문제 – 때문이 아니라 이중출판, 즉 자기표절 문제로 접근할 수도 있다). 학제마다 차이가 있지만 한국에 있는 영문학과의 경우, 석사학위논문을 일부 요약해서 학술지 저널로 출판하는 것은 최대 한 편, 박사학위논문을 일부 요약해서 학술지 저널로 출판하는 것은 최대 세 편(두 편인가;;)으로 제약하기도 한다.
그럼 다음의 예를 먼저 확인하자(별첨자료 –> https://www.runtoruin.com/1329).
하지만 자기표절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없는 것도 또한 문제…

글쓰기와 분류와 윤리에 관한 잡담

01
사실상 초안이 있는 원고를 수정해서 투고하는 일이라고 해도 처음 쓰는 것처럼 부담스러운 건 어쩔 수 없다. 초벌원고가 있다고 글쓰기가 쉬운 건 아니다. 기획이 달라지면 글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고 그래서 마치 첫 문장부터 새로 쓰는 기분이다. 정해진 기간 내에 완성할 수 있을까? 부득이한 상황으로 사전 협의하여 마감 일정을 연기한 적은 있어도 대책 없이 마감을 못 지킨 적은 거의 없으니 이번에도 마감은 지키겠지만 글 수준이 걱정이다. 더군다가 실제 글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얼마 안 되는데.. 끄응…
02
영화 <내가 사는 피부>를 분석하여 작년 문화연구학회에 발표한 원고를 일부 수정해서 2월 초에 투고했는데 20여일이 지나도록 연락이 없다. 하긴 지금 결과 통보가 오면 더 곤란하니 다행인 걸까… 그러고보면 벌써 결과 통보가 올 리도 없구나…
영화는 정말 재밌지만, 분석 글은 얼추 1년 동안 붙잡고 있었더니 좀 지겹다. <내가 사는 피부> 분석을 3부작으로 기획했는데 최소한 올 해 안엔 쓰지 않을 듯하다. (이렇게 말하고 2부를 올 해 쓸 수도 있지만;;; )
03
어떤 경로를 통해 모 학술대회 원고 발표자로 내정되었다고 곧 연락이 올거란 말을 들었다. 두근두근. 내정했지만 역시나 수준 미달 발표자란 사실을 간파하고 취소했을 수도 있고… 후후. 근데 주제가 뭐지? ㅠㅠ
04
투고한 원고에 자기 소개 문구를 쓸 때면, 연구활동가라고 표기한다. 이것이 내가 지향하는 삶의 방식이란 뜻이다. 그리고 이 둘은 결코 충돌할 일이 없을 거라고 믿었는데…
연구자 정체성과 활동가 정체성 사이에서 갈등할 일이 생겼다. 연구자로서 참고문헌, 1차 자료는 상당히 중요한 정보라서 쉽게 공개하기 어렵다. 글을 쓰는데 중요한 아이디어이자 원천이라 내가 욕심을 내는 어떤 글을 완성하기까지는 꿍쳐둘 필요도 있기 때문이다. 활동가로서 내가 가진 기록물 중 귀하거나 찾기 쉽지 않은 건, 공유할 수록 좋다. 내 활동의 주요 영역이 아키비스트란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연구자로서도 공유는 좋은 일이지만 활동가로서 정보 공유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적어도, 나는 이렇게 구분하고 판단한다.
그런데 여기서 충돌한다. 어떤 결정이 최선일까? 물론 언젠간 공개할 거다. 그것이 언제냐가 관건이라면 관건.
05
트랜스젠더 삶의 조각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트랜스젠더 관련 도서를 정리하기로 했는데… 래드클리프 홀의 <고독의 우물>을 트랜스젠더 관련 도서로 분류하자.. 한 부치께서 정서적 저항감을 표현하셨다. 이렇게만 쓰면 혐오처럼 읽히겠지만 그런 건 아니고, 소설의 주인공이 워낙 부치와 감정적 정서적 공명이 깊은 인물이라 이에 따른 복잡한 감정의 표현이라면 어느 정도 설명이 될까? 내가 트랜스젠더 텍스트로 철썩 같이 믿고 열렬히 애호하는 있는 작품을, 누군가 전혀 다른 범주 텍스트로 분류할 때 느낄 어떤 감정일 테고. 충분히 가능한 감정이자 표현이고 그래서 더 재밌고 많은 논의가 발생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아는 분은 아시겠지만 <고독의 우물>은 부치 레즈비언 텍스트로 분류할 수도 있고 ftm 트랜스젠더 텍스트로 분류할 수도 있다. 범주 분쟁의 한 가운데 있는 책이랄까. 최종 판단은 어떻게 될까?
근데 난 <방한림전>도 트랜스젠더 관련 도서로 분류하고 싶다는… 후후후.
06
존재해선 안 되는 기록물이, 전량 파기하기로 약속했고 그래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기록물이 5-6년 뒤 갑자기 발견되었다고 하자. 그땐 파기하기로 결정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최선이었다. 시간이 5-6년 지난 뒤 지금은 그 결정이 옳은 것은 아니라고, 그때 왜 그랬을까 되물을 수밖에 없다고 하자. 그런 상황에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긴 기록물이 일부 발견될 때 그 기록물은 지금이라도 파기해야 할까 아님 비공개로 조용히 보관해야 할까?
07
여성 범주는 하리수 씨가 아니라 하리수 씨를 배제하려는 그 언설을 통해 더 골치 아프고 또 곤란한 상태에 처한다. 범주 논쟁이란 이런 거다.
08
크롤러의 문제.
어느 잡지에 트랜스젠더와 페미니즘 관련 특집호가 실렸고 며칠 전 그 자료를 모두 긁었는데… 확인하니 2년 전에 이미 긁었더라… 같은 기록물을 두 번 모았다… 아우, 바보. 이것이 크롤러의 문제. ;ㅅ;

인터넷 시대의 다른 자아

*며칠 전 강의에서 했던 말과 덧붙이는 말*
인터넷을 일상으로 경험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의 자아 개념과 그렇지 않았던 시대부터 살았던 사람의 자아 개념은 근본적으로 달라야 한다고 믿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렇진 않지만, 어쩌면 자아까지 인터넷에 연결되어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 상황에선 자아 개념 자체가 이전과는 다른 거죠.
이를테면 며칠 전 이곳에도 올린 구글글래스 영상을 보며 전 열광했습니다. 그러며 안경을 통해 스마트폰에서 사용하던 기능을 사용할 수 있다면 이것은 인간의 몸 경험을 완전히 다르게 구성하겠죠. 스마트폰이 삶의 경험을 완전히 다르게 바꿨듯. 이렇게 고민한 계기는 스마트TV가 나왔을 때 발생한 논쟁 때문입니다. 적잖은 사람들이 스마트TV에 회의적이었습니다. TV란 가장 게으른 기기고 그래서 리모콘에 무수하게 많은 자판이 들어가면 사람들이 사용하지 않을 거란 주장이었죠. 실제 구글TV가 나왔을 때 관건 혹은 쟁점 중 하나는 리모콘이었습니다. 소수는 스마트TV의 미래를 밝게 봤습니다. 한 엔지니어는 자신의 경험을 공유했습니다. 자신의 어린 아이가 TV를 보다가 갑자기 TV 주변에서 무언가를 찾더라고 합니다. 무엇을 찾느냐고 아이에게 물으니, 키보드와 마우스가 어딨냐고 물었다네요. 이것은 컴퓨터 사용에 익숙한 세대는 이전 세대와는 전혀 다른 몸을 구성한다는 걸 알려주죠.
(이와 관련해서 <인 더 플렉스In the Plex>란 책에서도 재밌는 얘기를 합니다. 저자는 구글과 여타 기존 대기업의 충돌을, 인터넷을 당연하게 사용한 세대가 중심인 구글 구성원과 그렇지 않은 구성원이 중심인 다른 기업의 충돌로 이야기하기도 했죠. 일견 그럴 듯했습니다.)
비슷하게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은 가장 개인화된 기기지만 가장 공적 기기기도 합니다.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은 철저하게 개인의 사용 경험에 맞춰 설정되어 있기에 나의 사용 경험에 최적화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스마트폰으로, 태블릿으로 무엇을 하는지는 주변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보려고 하지 않아도 그냥 보이거든요. 그리하여 나의 사적 경험은 공적 전시기도 합니다. 이럴 때 공사 구분은 (원래도 의미가 없었지만)정말로 의미가 없습니다. 프라이버시 자체도 달리 고민해야 하고요.
이 정도는 약과죠. 요즘 태어나는 아이들은 임신 상태일 때부터 자신을 전시합니다. 자신의 선택과 무관하게 자신의 삶은 부모의 기쁨, 자랑 속에 전시되죠. 초음파로 찍은 모습부터 출산 직후, 기어다니는 모습, 처음 웃는 모습, 걸어다니는 모습.. 인터넷 시대에 태어난 사람은 자신의 일상이 웹에 저장되고 유통됩니다. 이 아이가 성인이 되었을 때, 누군가가 그 사람에게 호감을 느껴 작정하고 과거를 추적한다면, 엄마 혹은 아빠의 몸 속에 있던 모습부터 다 확인할 수도 있겠죠. 그런 시대가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매우 끔찍하게 느끼겠죠. 하지만 태어나기 전부터의 모습이 웹에 전시되는 일을 당연하게 여기는 분위기에서 태어난 이들이게, 이것은 어떤 경험일까요? 자신의 일생을 검색할 수 있는 것으로 경험하는 세대의 자아는 그렇지 않은 세대와는 매우 다를 듯합니다. 이럴 때 프라이버시와 자아는 지금 상상하는 것과는 매우 달라야 하고요.
시간이 지날 수록 이와 관련한 많은 얘기가 나오겠죠? 어떤 이야기가 어떻게 나오는지 살피는 것도 흥미로울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