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진레즈비언들(Radicalesbians), 여성 범주를 확장하려는 노력

역시나 수업 쪽글로 쓴 글입니다. 쪽글로 블로깅을 하니 날로 먹는 느낌이지만 뭐, 그래도 잡담으로 때우는 것보단 충실한 것 같은 착각을 주기도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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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진레즈비언들(Radicalesbians), 여성 범주를 확장하려는 노력
-루인
누가 여성인가. 혹은 여성은 누구인가. ‘여성’으로 태어나지 않은 나는 여성이 아닌가. 물론 나는 이원 젠더 체계의 범주인 ‘여성’으로 나를 설명하지 않는다. 나는 태어날 때 남성으로 지정받았고 지금은 mtf 트랜스젠더고 레즈비언이다. 남성으로 동일시하지 않으며 또한 남성도 아니다. 여성과[with] 동일시하지만 ‘여성’으로[as] 정체화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여성인가. 여성 범주는 어떻게 구성되는가.
1960년대 등장한 제2물결 페미니즘에서 이성애자 페미니스트는 레즈비언을 부정했다. 그들에게 레즈비언은 연애를 위해 껄떡거리는 존재거나 사회적 낙인으로 인해 여성운동에 유해한 존재였다. 스톤월 항쟁 이후 본격 부상한 동성애 운동에서 레즈비언은 주변부였다. 레즈비언은 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운동의 주요 의제는 백인 게이 남성의 관심이었다. 레즈비언들은 자신의 경험을 설명할 또 다른 언어와 운동이 필요했다. 이런 정황에서 급진레즈비언들(Radicalesbians)은 페미니즘 운동에 전념하며 이성애 여성과 동성애 여성의 연결고리를 만들고자 했다. 급진레즈비언들은 모든 여성이 남성 지배 규범으로 규정된다고 지적했다: 이성애 여성은 남성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적법한 존재일 수 있고 ‘이득’을 얻을 수 있다; 동성애 여성은 남성과 관계를 맺지 않는 존재란 이유로 비난의 대상이자 위험한 존재며 ‘여성’이 아니라고 규정되었다. 남성 중심의 이성애규범성을 지적하며 급진레즈비언들은 남성과의 관계가 아니라 여성과의 관계에서 여성을 다시 규정하려고 했다. 이것은 남성을 매개하지 않고 남성 중심의 인식체계를 경유하지 않으며 여성 주체를 구성하려는 노력이었다. 여성 범주를 확장하고 재구성하려는 노력이기도 했다.
패트리샤 힐 콜린스(Patricia Hill Collins)나 수잔 스트라이커(Susan Stryker)와 같은 이들이 지적하듯 여성운동엔 처음부터 다양한 범주의 여성이 개입했다. 운동 초기부터 비백인여성, 부치와 펨, 트랜스여성(과 트랜스남성)이 페미니즘 운동에 헌신했고 공헌했다. 그러나 “여성으로 동일시하는 여성” 범주는 규범적 여성성을 비판하며 등장했음에도 이후 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여성 범주를 협소하게 재구성했다. 중산층 여성 규범에 따라 부치-펨 관계와 노동자 계급 여성을 배제했다. “남성을 정서적 절름발이[cripple]로 만든다”고 말하며 장애인을 “자매”로 이해하지 않았다. 아울러 그간 여성운동에 적극 개입한 트랜스여성을 ‘여성’이 아니라고 혐오하며 여성운동에서 추방했다. 여성 범주를 확장하고 재사유하기 위해 등장한 개념 “여성으로 동일시하는 여성”이 여성 범주를 협소하게 만든 것은 ‘아이러니’하다. “여성으로 동일시하는 여성”이 ‘생물학’을 밑절미 삼을 이유는 없고 특정 조건의 여성만 지시할  이유도 없다. “여성으로 동일시”한다면 그가 여성으로 태어났건 여성으로 태어나지 않았건 중요하지 않다. 이 문서 자체가 ‘생물학’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남성이 정의한 여성성을 비판하는 데서 나아가 여성 범주 자체를 확장할 가능성을 좀 더 밀고 나가는 것은 불가능한 기획/상상력이었을까? 상당한 확장성을 내재하고 있음에도 섹슈얼리티 이슈를 젠더 이슈로 수렴하고, 여성 젠더 범주의 복잡성을 상실시킨 이후의 전개는 안타까운 일이다.

퀴어락 보물찾기 제3탄-한국영화 다시 보기 상영회: 사방지

퀴어락 정기 영화 상영회를 합니다.
다음주 금요일이고요. 인터섹스, 양성구유, 어지자지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는 존재인 동시에 조선시대 역사를 다룬 교양서에서 거의 빠지지 않고 언급하는 존재인 사방지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입니다.
많은 참여 바랍니다. 🙂
퀴어락 보물찾기 제3탄-한국영화 다시 보기 상영회
사방지 1988
퀴어락의 세 번째 상영회는 조선 세조시대의 양성구유자 사방지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 <사방지>를 함께 보려고 합니다. 2002년 제4회 여성영화제 한국영화 회고전 상영작품으로 주목을 받았던 작품이기도 한데요, 사방지가 “자신의 존재성에 의문을 품고 끝없이 질문을 던지며 욕망과 감정, 생존을 위해 협상과 고투를 거듭”(정희진)하는 이야기를 함께 보고 서로의 감상을 함께 나누게 되길 기대합니다.
상영일자: 2012년 10월 26일 금요일 늦은 7시 30분부터
상영장소: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커뮤니티룸
신청: kscrcqueer@naver.com 혹은 @queerarchive
참가비용: 2,000원(다과와 음료 제공)

섹스와 젠더 구분 공식을 다시 생각하며

수업 시간에 쓴 쪽글입니다. 글을 제출한 날은 2012.10.10.인데 그날 저녁 벗들과 논평을 나눴고 그 중 일부를 반영하며 조금 수정한 판본입니다.
내용은 수업 자료를 충실하게 정리한 것 뿐입니다.
루인. “섹스와 젠더 구분 공식을 다시 생각하며” Run To 루인. 2012.10.13. 웹. 2012.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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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와 젠더 구분 공식을 다시 생각하며
-루인
섹스와 젠더 구분 공식이 페미니즘과 퀴어이론, 사회학과 인문학 등 현대 이론의 발달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섹스와 젠더 구분 공식은 여성과 남성이 원래 다르고 그것은 생물학적 본질이기에 여성 억압은 당연하다는 지배 규범에 도전하고 상대화하기 위한 작업이다. 여자[female]와 남자[male]로 타고난다고 해서 여성성과 남성성 역시 타고날 이유는 없다는 것이 요점이다. 이것은 여성 억압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핵심 근거다. 그런데 섹스와 젠더를 구분한다는 것은 정확하게 무슨 뜻인가? 섹스와 젠더를 명확하게 구분할 수는 있는가? 섹스는 생물학적 본질, 젠더는 사회문화적 구성이란 구분 공식은 적절한 것일까?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된다는 것은 정확하게 어떤 뜻인가? 섹스-젠더 구분 공식은 이와 같은 질문을 제기한다.
이러한 질문은 크리스틴 델피(Christine Delphy)와 리키 윌킨스(Riki Wilchins)의 문제의식과 공명한다. 먼저 델피 식으로 묻는다면, 섹스와 젠더를 얘기할 때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인가? 델피는 섹스와 젠더를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과 함께 섹스 혹은 젠더가 반드시 둘로 구분되고 존재해야 할 타당한 이유가 있는지를 되묻는다. 인간이 두 종류로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정당화되지도 증명되지도 않았지만 섹스-젠더 구분 공식은 이를 그냥 단언한다(Delphy, 61). 아울러 인간의 몸엔 다양한 차이가 존재하는데 유독 섹스(젠더)가 최우선 차이로 이해되어야 할 타당한 이유 역시 없다(Delphy, 61). 샌드라 하딩이 “강한 객관성”이란 개념으로 지적한 것처럼, 섹스는 정말 생물학적으로 타고나는 것인지, 사람이 두 종류로만 태어나는지를 묻지 않는다면 섹스-젠더 구분 공식은 지배 규범적 통념을 반복하고 재생산할 뿐이다. 이제 윌킨스 식으로 묻는다면, 반대의 성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윌킨스는 반대 섹스가 존재하는가를 되물으며 섹스 혹은 인간 해부학이 시대에 따라 달리 해석되었음을 설명한다. 이 설명을 통해 윌킨스는 반대 섹스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섹스를 이원론으로 이해하는 사유체계가 있음을 밝힌다. 현대사회에선 매우 자주 여성과 남성의 차이를 설명하는 심리학, 뇌과학 논문이 발표되고 이것이 ‘과학적 사실’로 포장된다. 하지만 이런 ‘발견’, 실험결과는 차이를 규명하기 위한 것인지 차이를 발명하고자 하는 것인지 불분명하다. 생물학자 앤 포스터-스털링(Anne Fausto-Sterling)은 여성과 남성의 차이를 발견하지 못 한 연구는 실패한 연구로 가정되고 그 결과는 버려진다고 지적한다(Wilchins, 86). 즉 여성과 남성의 차이가 있는지 없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사회가 차이를 원하기에 차이를 획득하는 것이다(Wilchins, 86). 이 과정에서 무수하게 많은 유사성은 누락된다. 이를 테면, 폐가 두 개라거나 심장이 하나라는 또 다른 ‘과학적 평균치’(‘과학적 사실’은 아니다)는 여성과 남성의 몸을 설명하는데 누락된다. 오직 섹스, 생식기관, 재생산 능력/방식만이 강조될 뿐이다. 델피와 윌킨스 모두가 지적하듯, 섹스 자체가 젠더로 구성될 뿐만 아니라 섹스로 수렴해서 여성과 남성을 구분하는 방식은 결국 환원주의에 빠진다.
섹스-젠더 구분 공식은 인간이 겪는 억압을 본질로 구성/형성하는 규범을 비판하며 등장했다. 그러면서 사회문화적 구성을 주장했다. 하지만 여성[woman]과 남성[man], 여자와 남자라는 이분법, 여자-여성, 남자-남성의 연결 고리를 자연적 필연으로 가정하면서 또 다른 본질주의를 재생산하였다. 본질주의를 비판하며 등장한 이론이 바로 그 본질주의를 (재)생산한 것이다.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질문하지 않는 순간 또 다른 폭력, 억압이 발생하고 지배 규범은 끊임없이 재생산된다. 델피는 “무지에 직면할 용기를 갖는 것은 상상력을 위한 전제조건”(57)이라고 지적했다. 섹스-젠더 이론이 또 다른 억압을 재생산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억압과 차이의 생산 기제를 탐문하는 이론이라면 “이미 대답을 알고 있다는 개념을 단념”(Delphy, 62)하고 전제 자체를 심문해야 한다. 이것이 내가 살고 있는 삶과 세상을, 나 자신을 좀 더 ‘과학적’으로 이해하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