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후유증은 아닙니다.

ㄱ.
시간이 나면 잠만 잤다. 일이 끝나고 다른 사람이 쉬고 있을 때면 잤다. 하필 비염도 터졌다. 그동안 미뤄뒀던 잠을 몰아서 잤다. 자고 또 잤다. 그랬더니 조금 피로가 풀리는 느낌이다. 깨어 있을 땐 늘 하던 그런 일을 했고 책을 잠깐 읽었다. 책을 많이 읽을 계획이었지만 주로 잤다.
ㄴ.
어느날 내가 갑자기 죽는다면, 그때 ‘혈연’가족에게 나는 어떤 모습으로 기억될까? 죽은 직후엔 그냥 그저그런 젠더로 파악되겠지. 하지만 내 짐을 정리하기 시작한다면? 옷장에 있는 여러 벌의 치마를 비롯한 ‘여성용’ 옷가지는 누구의 것으로 해석할까? 트랜스젠더 이슈와 관련한 많은 자료와 책은 또 어떤 의미를 지닐까? 영어 자료야 그냥 전공서적으로 넘어간다고 해도, 한국어로 트랜스젠더 혹은 성전환, 레즈비언, 동성애와 같은 글귀가 적힌 자료는 어떤 의미를 지닐까? 의미를 지니긴 할까?
난 만약을 대비해 내가 지닌 문서류의 사후관리자를 지정하고 싶어한다. 그에게 부탁하고 싶은 유일한 일은, 내가 가진 기록물을 헌책방이나 고물상에 넘어가지 않도록 할 뿐만 아니라 퀴어락을 비롯한 몇 곳에 넘기는 것이다. 하지만 사후관리자는 그 일을 무사히 치를 수 있을까? ‘혈연’가족에게 그 말을 꺼내는 순간, 나의 젠더는 ‘혈연’가족이 상상했던 것이 아닌 방식으로 확증될 수밖에 없으니까. ‘혈연’가족은 집요하게 부정하며 사후관리자를 내쫓지 않을까? 돌연사로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질 때 나는 어떤 젠더로 남을까?
결국 내 삶에서 ‘혈연’가족은 족쇄처럼 얽혀 있지만, 때때로 웃는 낯으로 서로를 대하고 있지만 서로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아니, 어쩌면 ‘혈연’가족이란 이름으로 묶여 있는 어떤 집단은 죽을 때까지 서로를 모르는 상태로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ㄷ.
그런데 고인의 젠더를 해석하는 것과 관련한 논쟁이 한국에서도 가능하다면, 나의 죽음이 그 논쟁의 시발점으로 쓰였으면 하는 바람은 있다. 살아서 한 일이 별로 없으니 죽어서라도 어떤 이슈로 쓰이면 좋겠다는 바람이랄까. 살아선 운동을 거의 못 했으니 죽어서 하겠다는 묘한 심보기도 하다. 흐. 🙂
하지만 내가 언제 죽을지 모르고, 내가 살아 있는 동안 관련 논쟁이 일지 않는다면 그건 더 우울한 일일 듯하다.

명절, 시간, 부재

ㄱ. 뭔가 말을 쓰면 좋겠는데 딱히 할 얘기가 없다.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닌데 말로 풀 상태가 아니다.

ㄴ. 참 묘하지. 추석 잘 보내라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뭔가 껄끄럽다. 그럼에도 추석 잘 보내라는 말을 했다. 특정 누군가에게 해선 안 되는 말이란 느낌이기보다, 그냥 이 말 자체가 묘하게 불편하다.
ㄷ. 고인은 당연히 부재한다. …그런가? 고인은 정말 부재하나? 부재한다면 어떤 모습으로 부재할까? 만약 부재에 형태가 있다면 그것은 존재 증명 아닌가? 그렇다면 확인할 수 있는 부재는 존재함이지 부재라고 부를 수 없지 않을까? 부재를 확인할 수 있다면 그것은 부재가 아니라 존재고, 부재를 확인할 수 없다면 그것은 인식 외부로 추방/배제되었다는 점에서 부재가 아니다. 그렇다면 부재란 것은 불가능한 것 아닐까?
ㄹ. 가을이 오고 있다. 시간이 흐르고 계절도 바뀌고 세월도 흐르고 있다. 지난 봄엔 봄이 오는 줄 몰랐다. 봄꽃이 피기 전 부산에 갔는데, 서울에 돌아오니 봄꽃이 지고 있었다. 가지 않을 것 같은 시간이 훌쩍 흘러갔다.
ㅁ. 어떤 두려움이 있다. 내년 봄엔 아무 일도 없길 바랄 뿐이다.
ㅂ. 동무가 있어, 벗이 있어 삶을 잘 지탱하고 있다. 다행이다. 참 다행이다. 그리고 고맙다. 정말 고맙다.

잡담 이것저것: 비염, 아키비스트, 계급

ㄱ.
비염이 한 번 터지고 나면 온 몸이 쑤시다. 죽염으로 코세척을 시작한 이후 콧물이 흐른다거나 코막힘 같은 것은 전에 비해 약하지만 온 몸이 힘든 것은 여전하다. 전엔 코에만 모든 것이 몰렸다면 지금은 비염을 견디기 위해 온 몸이 초긴장 상태다 보니 더 쉽게 지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한 이틀은 그냥 드러누워 쉬어야 할 듯한데 그러지도 못 하니 아쉬울 뿐이다.
지난 일요일 비염이 터졌고 아직도 온 몸이 뻐근하다.
ㄴ.
문헌정보학과 출신도 아니고 관련 자격증 같은 것도 없지만 아키비스트로 나 자신을 설명하거나 정체화하는 걸 깨달을 때면, 재밌다. 이게 다 퀴어락 활동의 여파다. 아울러 내가 정말 재밌게 활동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것이기도 하다. 운동과 활동에 참여하는 많은 방법 중, 아키비스트가 확실히 좋다. 사실, 퀴어락 활동을 하기 전엔 그냥 나 자신의 판단으로 다양한 자료를 수집했던 일이, 지금은 아키비스트 활동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도 재밌는 일이다. 난 늘, 어딜 가나 퀴어 관련 자료를 수집했고 그것이 지금은 퀴어락 활동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엮이고 있다.
농담처럼 진지하게 말하길, 박사학위 취득하면 퀴어락에 취직할 거다. 지금은 운영위원이고 그때는… 음… 그럼 월급은? 몰라, 어떻게 되겠지, 뭐. 흐.
ㄷ.
박사학위 논문을 쓴 후 취직이 안 될 거라고 미리 단언하는 것은 전공 때문일까, 계급 경험 때문일까? 내가 무슨 논문을 쓰건 그것은 결국 트랜스젠더 이슈를 다룰 것이다. 피상적으로 전혀 다른 이슈를 논한다고 해도 그것은 트랜스젠더 이슈를 말하는 다양한 방식 중 하나다. 그리고 한국에서 트랜스젠더 이슈로 논문을 쓴다는 것은 취직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기억해보면 어릴 때부터 내가 들은 최고의 직장은 공무원이었다. 이유는 단 하나였는데, 안정적 직장이란 점에서였다. 많은 돈은 못 벌어도 안정적이라는 것. 부모님의 빈곤 경험은 안정성을 지향했고, 그 안정성에 걸맞는 행동양식을 지향했다.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직종은 공무원이었지 교수나 어떤 연구직은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공무원이 싫었다. 직종으로서 공무원이 내 몸에 적합하다고 믿은 적, 단 한 번도 없다. 그리고 나니 내 상상력에 남는 일은…
특별히 많은 돈을 벌 욕심은 없다. 그냥 읽고 싶은 책 살 수 있고, 굶지 않으면서 지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래서 난 박사학위를 취득한 이후에도 알바로 생계를 연명할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물론 여기엔 다른 이유도 있다. 생계를 이유로 내가 주장하고 싶은 언어를 망설이게 될까봐 두려워서다. 한줌도 안 되는 어떤 안정감을 지키려고 내가 말해야 할 언어를 말하지 못 하게 될까봐 두려워서다. 애당초 기존 학제에 편입될 가능성도 없지만, 이런 두려움이 있다면 그냥 외부에서 움직이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나의 이런 고민은 분명 내가 살아온 가족의 계급 경험인데, 나는 왜 늘 이것이 단지 전공 문제일 뿐이라고 상상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