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바람의 동생 입양 연기…

바람의 동생을 들일까 했습니다.

아는 분이 임신한 길고양이를 임보하였고, 아기 고양이 넷이 태어났습니다. 그 중 한 아이를 들일까 했습니다. 하지만 크게 두 가지 이유로 망설였습니다.
우선, 바람이 새로운 아이와 잘 어울릴까? 다른 고양이에게 경계를 많이 하는 편이지만 아기 고양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막연하게 기대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막연한 기대일 뿐이라, 입양을 한다면 일주일 정도 임보하는 형식일 수밖에없다고 양해를 구했습니다.
더 큰 고민은 고양이의 색깔이었습니다. 진리의 삼색고양이였습니다. 한때 제 로망이기도 한 무늬지요. 하지만 요즘 좀 말도 안 되는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저랑 살고 있는 바람은 검은색에 흰색이 섞여 있는 무늬. 융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룩이1과 2도 그러하고요. 허냥이는 회색과 흰색이 어울려 있습니다. 지금은 모습을 볼 수 없는 루스는 검은색에 몸의 극히 일부만 흰색이었죠. 노랑둥이가 집 근처에 나타나곤 했지만 한두 번이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고등어무늬 리카는 서둘러 떠났습니다. 이런 상황이라 전 아무런 근거도 없이, 제 인연인 고양이는 모두 검은색과 흰색이 어울리는 무늬가 아닐까, 라는 고민을 하였습니다. 제 로망과는 상관없이 검은색과 흰색이 어울린 무늬의 고양이만이 제게 인연이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고민. 그 외의 무늬를 지닌 고양이는 저와 인연이 아니라 저와 살면 무슨 일이라도 생기는 것이 아닐까라는 고민… 다른 사람이 이런 고민을 한다면, 그럴 리 없다고 말하겠지만, 이것이 말도 안 되는 고민이란 것 알고 있지만 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불안하며 쉽게 들이겠다는 말을 못 했습니다. 시간을 벌었습니다.
두 가지 이유로 망설이며 목요일 즈음 들일까 했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다른 집에서 데려갔다고 합니다.
바람으로선 다행일까요, 아쉬운 일일까요? 시간이 흐를 수록 제가 외부에서 머무는 시간이 늘고, 집에서 바람과 함께 하는 시간이 줄고 있습니다. 무척 미안한 일이죠. 그래서 아기 고양이가 들어온다면, 동생이 생긴다면 좀 괜찮지 않을까 했습니다. 제 막연한 기대죠. 바람은 혼자 있더라고 저와 둘이서만 살기를 바라는지도 모릅니다. …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려나 바람의 동생을 들이려던 계획은 연기되었습니다.

보스턴 결혼

아는 사람 사이에선 유명한 <보스턴 결혼>이 번역되어 나왔습니다. 동성 결혼 합법화에 관한 얘기는 아니고 레즈비언 간의 관계를 다룬 책으로 알고 있습니다.
… 이렇게 설명하는 것은 제가 아직 안 읽은 책이라는 것. 하지만 책은 얻었습니다!
어제 학과 사무실에 앉아 있는데 우연히 이 책을 번역하신 분과 만났고, 그 분에 제게 이 책을 선물해주셨습니다! 초면은 아니지만 인사를 나눈 사이도 아닌데 선물을 주셔서 무척 고마웠고요. 제가 고마움을 표현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이렇게 블로깅하고 또 나중에 독후감을 쓰는 거겠지요.
서점에서 판매하고 있습니다. 저의 마일리지는 교보에 쌓여 있으니 일단 교보의 링크만 남깁니다;;;
교보문고: http://goo.gl/TXAk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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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역자 소개글이 무척 재밌어요. 으하하.

리뷰. Alexander Doty

방학하면 블로깅을 만날 할 것 같았지만 현실은 방학 전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oTL…

요즘은 방학 때 할 일을 정리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욕심을 내고 싶은 일과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일 사이에서 조율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 거죠. 처음엔 욕심을 좀 냈지만 지금은 욕심을 줄이고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수준에서 일정을 정하고 있습니다. 제 욕심만 내기엔 다른 해야 할 일도 많으니까요. 아울러 다음 학기 기말 페이퍼 주제를 고민하고 있는 날이기도 합니다. 물론 수업 선생님과 일정 부분 조율해야 하지만 그래도 대충의 주제를 미리 정하면 여러 모로 편하니까요.
학기 중에 쓴 수업 쪽글 하나 공유합니다. 잘 쓴 글은 아닙니다. 보통 쪽글은 사흘 전 즈음 초안을 쓰고 계속 다듬는데 이 글은 당일 새벽에 급하게 썼습니다. 그래서 부끄러워요. 그럼에도 수업 쪽글 중 공유할 수 있는 성질의 글이 이것 뿐이네요. 나머지 둘은 공유하기엔 좀 애매한 내용이랄까요.. 그냥 심심하면 한 번 읽어보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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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01.금.
Alexander Doty. “Introduction” & “There’s Something Queer Here.” Making Things Perfectly Queer
-루인
이 글은 학제 이론으로서 퀴어이론이 등장한 초기에 쓰여졌고 그리하여 그 시기에 했을 법한 고민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첫째, 퀴어와 퀴어함[queerness]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둘째, 문화연구로서 퀴어이론 혹은 퀴어이론으로 재구성하는 문화연구는 어떤 방식인가? 이것은 쉽지 않은 문제고 조심스러운 이슈일 수밖에 없다. 토대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기존 논의의 한계를 확인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퀴어이론의 주요 참조점은 레즈비언과 게이 연구다. 레즈비언과 게이 이론은 정체성을 밑절미 삼았고, 이에 따라 레즈비언과 게이의 문화나 역사 등을 탐구하고 이론을 전개했다. 그렇다면 퀴어이론은 무엇을 할 것인가? 정체성에 바탕을 두지 않으면서, 명확하게 규정할 수 없는 포괄적 범주를 포함하면서 어떻게 퀴어의 혹은 퀴어한 이론을 구성할 수 있을까? 도티는 이 지점에서 퀴어를 비이성애적 실천을 포괄하는 것으로, 퀴어문화이론을 이성애 문화에 산재하지만 암시[connotation]의 형태로 존재하는 퀴어함을 독해하는 것으로 방향을 잡는다(직접 언급하진 않지만 뉘앙스를 통해 권력의 배치 이슈도 제기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기존의 성적 지향 범주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도티가 반복해서 얘기하듯, 퀴어함과 퀴어이론은 레즈비언, 게이, 바이와는 다른 무엇이지만 그들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xvii).
‘다른 무엇이지만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식의 서술은 퀴어의 개념을 정의하는 데 있어 겪는 어려움을 여실히 드러낸다. 이것은 도티가 퀴어와 퀴어함, 퀴어문화연구를 설명하는데 있어 반복해서 부정문 형식을 취하는 것과도 관련 있다. 이를테면 도티는 퀴어함과 퀴어문화연구를 비이성애[non-, anti-, contra-straight] 문화, 실천, 쾌락 등을 탐구하는 것이라고 얘기한다(xv). 이것은 퀴어를 명징하게 정의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배제하지 않으려는 역사적, 정치적 맥락이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불가피한/필연적 방법이기도 하다. 포괄적 용어로서 퀴어를 사용하는데 있어 거의 유일한 대척점은 이성애며, 도티는 규범적 이성애가 아닌 것을 퀴어로 포착하려 한다.
도티의 이러한 노력은 상당히 중요하다. 이것은 이후의 퀴어이론이 트랜스젠더와 바이 등을 배제하고 레즈비언과 게이만을 혹은 동성애만을 퀴어로 재현하는 일군의 경향성에 비추어 특히 그렇다. 그래서 도티의 고민과 전략은 현재도 유의미하다.
하지만 퀴어를 설명함에 있어 이성애를 반대항으로 설정하는 지점은 의문이거나 아쉬움이다. 따지고 보면 이성애야 말로 퀴어한 혹은 기이하고 기묘한 관계 아닌가? 이것은 단순히 이성애에 내재하는 다양한 비규범적 실천을 지칭하는 것만이 아니다(이것은 이미 도티가 포괄하는 지점이다). 이성애규범성의 맥락에선 비이성애 실천, 이성애 내에서의 ‘퀴어한’ 실천이 퀴어의 범주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어떤 가상의)‘퀴어’ 맥락에선 이성애 실천이야 말로 낯설고 신기한 실천이다. 다른 말로 이성애를 하나의 규범적 축으로 삼기보다 이성애 역시 퀴어한 실천으로 탈구성하는 작업 역시 필요하지 않을까? 퀴어이론이 이성애규범성 자체를 탈구성하고 탈자연화하는 작업이라면 이성애 실천의 속성 자체를 심문하는 작업 역시 중요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