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잡담

다음 단행본 작업을 위해 이전 원고를 수정하고 있다. 그러며 연신 감탄한다. ‘오, 내가 정말 이런 공부를 했단 말이야? 과거의 나는 쵸큼 똑똑했잖아, 나 공부 좀 열심히 냈네’라고 감탄한다. 내가 언제 이런 논문을 읽었고, 언제 저런 내용을 공부했는지 기억도 안 나는데 글에는 적혀 있다. 그리하여 매우 당황하고 놀라고 내가 배우면서 원고를 수정하고 있다.

부끄러운 일이다. 물론 기억력이 현저히 떨어지고 있으니 어쩔 수 없겠거니 하지만, 그래도… 과거의 내가 쓴 글을 현재의 내가 밑줄 그으며 읽고 공부를 해야 한다는 점은, 현재의 내가 한없이 멍청하고 부끄럽고 어리석다는 뜻이겠지. 이런 부끄러움으로 원고를 수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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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평등에 반대한다 북토크(http://kscrc.org/xe/board_hWwy34/16045)에서 할말을 이것저것 고민하고 있다. 그 중 하나는 아마도, 양성평등에 반대한다가 성평등이란 용어를 쓰자는 내용은 아니란 점을 말할 듯하다.

블로그, 잡담

블로그를 닫아두나 열어두나 차이가 없다. 닫았더니 이유를 묻는 사람, 걱정하는 사람이 두엇 있었는데 그것 빼고는 차이가 없다.

누워 있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책상 앞 의자에 앉는 것이 세상 가장 어려운 일이다. 이불에서 나오는 일이 태산을 옮기는 일이다.
식물을 몇 기르기 시작했다. 말려 죽일까 두려워 하고 있다. 윤리는 어디서 출발하고 어디서 그 숨을 잠시 멈출까? 잘 모르겠다. 어떤 죽음은 다른 죽음보다 가볍고 간편하고, 어떤 삶은 훨씬 더 쉽고 간편하게 거래된다. 여전히 윤리를 중시하는 고리타분하고 구닥다리인 나는, 하지만 그저 두려움만 안고 있을 뿐 삶과 죽음 앞에 무력하다. 무기력하다.
ㅎ 시인의 이번 시집은 두고두고 떠오른다. 썩은 사과… 사과가 썩는 시간…
답장을 못 한 메일이 여러 통인데 그저 괴로움만 몸에 켜켜히 쌓여갈 뿐이다.
커밍아웃을 한적 없는 나는 아웃팅을 당할 일도 없다. 나는 내가 00이라고 알려지는데 두려움이나 걱정이 없다. 더 정확하게는 그와 관련한 어떤 감각이 없다. 그것이 무슨 일인지 인지를 못하고 이해를 못한다. 무엇보다 내가 알려지는 방식은 내가 나라고 인지하는 방식과 다르기에 나랑 상관없는 일이다. 그것은 내가 아니니 나와는 무관하다. 하지만 나를 아는 사람, 얼굴을 아는 사람이 느는데 큰 부담이 있다. 어느 자리를 가나 익명의 ㄱ이고 싶다는 욕망이 매우 강하다. 나를 아는 사람이 없기를, 이미 친한 사람, 소중한 사람들이 아니면 아는 사람이 없기를 바란다. 조용히 참가했다가 조용히 사라지는 삶. 생존을 위협하는 강렬한 욕망이라 어렵다. 언젠가 나는 향기가 없는 사람이고 싶다고 적었는데, 이 강렬한 바람은 이제 화두가 되었고 생존 문제가 되었다. 어렵다.

퀴어연구의 연구주제

많은 퀴어 연구가 당연하단 듯 섹슈얼리티(와 극히 때때로 젠더)를 논의 중심에 두고 있다. 물론 더 정확하게는 성적선호나 실천에 더욱 제한된 연구를 하고 있고 섹슈얼리티의 여타 다른 이슈는 상대적으로 적은 관심을 두고 논하고 있다. 만약 퀴어 연구가 당연히 섹슈얼리티를 다루는 학문이 아니라면, 즉 페미니즘은 젠더를 연구하고 레즈비언 게이(혹은 퀴어) 연구가 섹슈얼리티를 연구하는 식의 분석틀 배분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면 퀴어 연구가 주로 한다는 연구 대상은 무엇일까? 무엇을 퀴어 연구라고 묶을 수 있는 것일까? 퀴어라고 표방하는 행사, LGBT/퀴어에 해당한다고 가정하는 개인/집단/사건, 성적 선호나 실천과 관련한 무언가를 다루는 것이 퀴어 연구의 당연한 의제가 아니라면 퀴어 연구는 무엇을 하는 학문일까?

2016년 퀴어영화제엔 ‘이것이 왜 퀴어영화지?’라는 질문을 제기하는 영화를 묶어 상영했다. 이른바 LGBT/퀴어에 해당한다고 분명하게 인식할 수 없는 어떤 상징과 실천 등을 다룬 영화였고 그래서 관객과의 대화 자리에서도 관련 질문이 나왔다. 이것이 왜 퀴어 영화인가? 그런데 다시 그 질문을 전유하면 퀴어 연구나 퀴어 정치학이 탐문하는 주제는 어떻게 규정되고 있는가? 만약 이것이 규정되어 있다면 이미 퀴어 연구 자체의 한계를 분명히 하는 것은 아닌가. 그리하여 퀴어 상상력의 한계를 분명하게 설정하는 것은 아닌가? 그런데 퀴어 연구는 훨씬 포괄적이라고 말하는 것 역시 퀴어를 지나치게 낭만화하고 신성시 여기는 것은 또 아닌가?
그리하여 퀴어 연구는 무엇을 하는 연구일까? 왜 어떤 주제는 퀴어 연구라고 당연하단 듯 말하고 어떤 연구는 그와 무관하단 듯 다루는가? 이성애자 이민자나 성적 선호 의제가 표출되지 않는 이민 연구는 퀴어 연구가 아니고 레즈비언의 이민 경험 연구는 왜 당연하단 듯 퀴어 연구의 한 분야처럼 인식되고, 트랜스의 이민 경험 연구는 어쨌든 퀴어 연구일 수 있다고 인식될까? 퀴어 연구는 무엇을 하는 학문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