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글페이지 트랜스젠더 포스트 모음 2012.02.20.-2012.02.24.

이번 주 시사인에 실린 미야베 미유키 기사를 읽다가..
“이후 지금까지 소설 324편을 남기며” … 헉… 난 지금까지 1/10은 읽었나? ;;; 정말 앉아서 글만 쓰는 거야? 데뷔 27년 정도 되었는데 일 년에 10편 이상을 썼단 말이야? 덜덜덜.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를 내놓았다. 이전에도 번역돼 나온 적이 있지만 이번엔 축약 부분을 되살려 원고지 500장 분량이 추가됐다.” -_-; 옮긴이의 말에 축약했다는 구절이 있었는지 기억이 안 나는데, 그래도 원고지 500장 분량이라니… -_-;; 다시 사서 읽어야 하나.. 아놔…
Feb 20, 2012  –  Public
::기사::
For transgender Pakistanis, newfound rights 2012.02.11.
파키스탄에서 성적소수자로 살기는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유넉(거세된 남자) 혹은 “히즈라”로 알려진 트랜스젠더는 상당한 사법적 보호와 새로 설립된 시민권을 획득하고 있다.
지난 달, 트랜스젠더는 제3의 섹스, 트랜스젠더로 자신을 동일시하며 선거에 등록할 수 있게 되면서 승리를 자축했다. 과거 국가 이슈의 정체성 카드(ID 카드)는 개인을 여성 아니면 남성으로만 표시했다.
또 다른 날, 파키스탄 대법원의 위엄 있는 홀에, 히즈라(여성으로 정체화하는 남성 집단) 집단은 “유넉에 대한 모욕”과 관련하여 2008년에 있었던 헌법권 사례의 집행에 대한 최근 심리를 위해 모였다.
수도 근처 대도시 라왈핀디의 트랜스젠더 공동체 대표 알마스 보비는 “경찰은 우리를 구타하고 돈을 갈취했다.”고 말했다.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이제 우리는 경찰서에 가고, 그들은 우리를 존중하며 우리를 두려워한다. 그들은 우리의 첫 번째 사례다. 이제 그들은 우리에게도 권리가 있음을 느낀다.” 40살의 보비는 새로 만든 ID카드를 최초로 받았다.
유넉은 몽골제국 시절까지 거슬러가며 하렘 보초로 일한 거세된 남성이다. 그들은 왕궁에서 엔터테이너로 일하며 자존감이 상당했다. 그러나 오늘날 파키스탄에서 유넉은 트랜스섹슈얼, 트랜스베스타잇, 동성애자, 양성구유hermaphrodite, 그리고 크로스드레서를 포함하는 용어로 널리 쓰인다.
전통적으로 유넉은 두 섹스의 특징을 모두 전시하며 축복받은 것으로 보였다. 때론 신혼부부에게 행운을 전해주기 위해 결혼식장에 초대받기도 했다. 그러나 종교 근본주의의 출현과 함께 자존감은 불명예와 괴롭힘으로 바뀌었다.
정부에 대한 재판정의 일반 명령은, 트랜스젠더는 다른 시민처럼 다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적극적 행동에 따라 시민 서비스 직업에 선호될 것이다. 한 변호사에 따르면, 10단계(10학년?) 교육을 받은 트랜스젠더 지원자는 정부의 업무에서 학사 학위를 소지한 비트랜스젠더와 동일한 평가를 받을 것으로 보인다.
법정은 기간 청취를 통해 과정을 모니터링하고 있다.
보비의 부모는 죽었고 남은 가족 구성원은 찬성하지 않는다. 그런 조롱은 특별하지 않다.
히즈라는 자신의 가족에게서 부인당하기에, “그림자 가족”을 만든다. “비록 가짜라고 해도 그들은 그것을 선호한다”고 퀘타의 사회복지부 장관 살림 아완이 말했다. “그들은 자신과 같은 사람들과 함께 살길 선호한다.”
원가족에게 버림받은 일부 파키스탄 트랜스젠더는 ID 카드를 받길 꺼린다. 카드를 받을 권리가 있다곤 해도, 아버지 이름으로 등록되길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선택한 가족의 우두머리인 구루의 이름으로 등록되길 바란다.
대법원장 이프티카 모함메드 쵸드리는 수오 모투 공지라고 불리는 사법 전략을 사용하며 다양한 이유를 이해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것은 정부가 크고 작은 문제를 해결하는데 실패할 때 법정이 관여할 것을 허락한다.
“대법원장은 우리가 신의 창조물이라고 말했다.”고 보비는 말했다. “이제 사람들은 깨달았다. 처음에 그들은 우리를 조롱하고 괴롭혔다. 이제 그들은 우리가 사람이란 점을깨달았다.”
“쵸드리는 영웅이다.”
Feb 22, 2012  –  Public
::기사::
Nepal actor welcomes home transgender daughter 2012.02.12.
네팔 최고의 코미디 배우는 지난 일요일 그의 아들이 네팔 최초의 성전환수술을 한 트랜스섹슈얼이 되는 것을 도왔으며 $26,000 비용으로 “완벽한 숙녀”가 되었다고 얘기했다.
산토쉬 판트가 말하길, 18살의 카이틀린(프라틱으로 태어났다)은 지난 달 태국에서 받은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난 후 카트만두에 있는 집에서 안정을 취하고 있다.
“어릴 때부터 내 아들은 몸과 영혼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He는 몸은 남자지만 자신의 영혼은 여자라고 말했다.”고 판트는 AFP에 말했다.
“그는 우리에게 젠더재지정을 요구했고, 우리는 그의 논리를 받아들였다. 그는 우리에게, 어릴 때 수술을 받는다면 완벽한 숙녀로 바뀔 수 있다고 말했다.”
매우 보수적이고 힌두문화지만 아시아에서 섹슈얼리티 이슈에선 가장 진보적 정책을 가진 네팔에서 수술을 한 트랜스섹슈얼은 매우 적다.
“그는 이제 18살이고, 그가 하는 말에 따르면 수술이 지연되면 못생겨질 수 있다. 우리는 그가 우울증에 빠지길 원하지 않았기에 지난 달 태국으로 데려갔다.”고 판트는 말했다.
1990년대 중반부터 10년 이상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는 시트콤에 출연하고 있는 배우는 카이틀린이 약학을 공부하기 위해 미국에 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수술 전 1년 동안 호르몬을 투여한 카이틀린은 인터뷰를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her의 어머니 프라트브하는 네팔어로 발간하는 일간지 칸티푸르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고로 딸이 죽은 이후, 우리는 언제나 가족 중에 딸이 있길 기대했다. 그녀가 내 자궁에 있을 때, 나는 딸이길 기도했다. 내 꿈은 18년이 지나서야 이루어졌고 난 매우 행복하다.”
블루 다이아몬드 사회란 압력단체를 운영하는, 네팔 최초의 공개 게이 의원 수닐 판트는 젠더 재지정이 네팔에서 “새로운 개념”이라고 설명했다.
“우리 구성원 중 두 명은 재지정을 겪었고 몇 명이 더 있다고 들었다. 판트 가족이 증명한 용기와 지지에 나는 매우 기쁘다. 개인적 바람을 실현하는데 성공한 새로운 소녀에게 축하 인사를 보낸다.”
판트는 딸의 수술 비용을 다 지급하고 성전환을 응원하면서 왜 인터뷰 내내 he라고 지칭하는 것인지…
Feb 24, 2012  –  Public
::기사::
Baltimore County approves transgender discrimination ban; 4th Md. govt. to adopt protections
볼티모어군은 트랜스젠더의 차별을 금지하는 조례를 통과시킨 네 번째 지역 정부가 되었다.
군 의회는 목요일(2012.02.23.)에 그 조례를 승인했다. 조례는 거주, 고용, 공공 편의시설과 금융에서 젠더 정체성과 젠더 표현, 그리고 성적 지향에 바탕을 둔 차별을 금지한다.
의원들은 특히나 화장실을 면제하는 수정안을 추가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조례를 수정했고 그리하여 보호는 “명백히 사적이거나 개인적” 시설엔 적용하지 않는다.
의회의 승인은, 로즈데일에 위치한 맥도날드에서 트랜스젠더 여성이 화장실을 사용하려고 했을 때 악랄하게 구타했던 사건 이후로 거의 1년이 걸렸다.
볼티모어시와 몽고메리군, 하워드군 또한 트랜스젠더 보호법을 가지고 있다.
화장실 문제는 정말 아쉬운 부분이네요..

잡담 이것저것

01

D 블로그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새삼 깨달았는데 전 여러 분과 다른 인터넷을 하는 듯합니다. 웹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논란을 뒤늦게(때때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을 때) 접하거든요. 어떤 땐 라디오 뉴스에 나오면 그제야 알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나름 인터넷을 자주 하고, 잠 잘 때를 제외하면 거의 항상 웹에 접속한 상태인데도 그래요. 전 웹에 접속하면서 다른 세계로 워프하는가봐요. 크크.
02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길, 박사는 자기 돈으로 다니는 것이 아니다고 하셨습니다. 뒤늦게 깨달은 바가 있어 장학금을 찾았습니다. ;;; (당연히 빚내서 다녀야 하는 것으로 알았던 1인 + 제가 자격이 되는 장학금은 없을 거라고 믿은 1인 ;;; ) 신입생에게 주는 장학금 공모는 이미 다 끝났더라고요. ;ㅅ;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재학생에서 지급하는 장학금도 있긴 한데요… 그 중 하나가 5월 즈음 모집하더라고요. 그래서 조건을 알아보니 부모님의 직전년도 재산세가 **원 이하였습니다. 아빠 님이 퇴직한 후 백수 생활을 하고 있어 가능할 것도 같았습니다. 엄마 님께 문자로 연락했더니 잘 모르겠지만 거의 없을 거라면서 확인하고 연락을 준다고 했습니다. 얼마 후 문자가 왔습니다.
“**냥은 넘는 것 같더라 ㅋ ㅋ “
… -_-;; 어머니… “ㅋㅋ”의 용법을 누구에게 배운 건가요… ;;; … 혹시 제대로 배우고 의도적으로 사용한 건가…!
03
3월이 오면 개강과 알바를 동시에 시작합니다. 그래서 2월 중으로 주문해야 하는 것들을 서둘러 주문했습니다. 아미캣 구매대행이라거나 이것저것이요. 일상적 주문은 다음날 바로 오지만 가끔은 택배가 언제 올지 가늠할 수 없는 것이 있으니까요. 그래서 일정 조절이 자유로운 2월 중으로 주문을 서둘렀습니다.
아미캣은 10kg을 매우 비싼 금액으로 획득했습니다. 판매처에서 전화가 와선, 당분간은 이번 주문이 마지막일 거라고 하네요. 전 세계적으로 매장에서 당분간은 찾기 힘들 거라면서요. 이탈리아 공장에서 생산에 들어가지만 시간이 걸릴 것 같은 뉘앙스네요. (암튼 오늘 중으로 택배가 올 듯하고요.)
다른 택배가 당혹스러웠습니다. 판매처에서, 요즘 주문이 밀려 주문 후 2-3일 정도 지나서야 발송할 수 있을 듯하다,고 공지했습니다. 그래서 화요일에 주문했습니다. 금요일이나 토요일에 받으려고요. 근데 화요일 저녁 발송했다는 문자가 왔습니다. 으..응? ;;; 택배기사라도 빨리 와주면 좋으련만… 하나는 3시 즈음, 다른 하나는 5시 즈음 왔습니다. 3시 즈음 퀴어락에 가야 했는데 그 일정을 취소해야 했습니다. oTL..
택배가 빨리 오면 좋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날도 있네요.. 하하. ;;;
04
암튼 하이텍 콜레트 리필심 붉은색(0.3mm)을 획득했습니다. 작년 여름부터인가 교보핫트랙스를 비롯하여 여러 문구점에서 콜레트 리필심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상품이 동나면 추가로 들어와야 하는데 안 들어오더라고요. 한두 달 기다리면 들어오겠거니 했습니다. 근데 안 들어와… 그래서 문구점이 보이면 들어가 리필심을 찾았고, 제가 쓰는 색깔이 있으면 일단 구매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지요. 리필심이 거의 줄어들 즈음… 온라인쇼핑몰에서 리필심을 전문으로 파는 곳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웹에 상주하고 검색에 최적화되어 있지만 온라인쇼핑몰에서 찾을 생각은 안 한 1人 … 전 도대체 인터넷 어디서 살고 있는 걸까요..;;;
암튼 1년치를 쟁여두니 든든합니다. 역시 필기구가 푸짐하면 몸이 든든하고 좋아요. 흐흐.
05
검색에 최적화되어 있다는 구절에 떠오른 것.
전 누군가와 가벼운 대화를 나눌 때면 웹에 접속한 상태이길 선호합니다. 제가 모르는 것, 못 알아 듣는 것이 많아 원활한 대화를 위해선 검색을 해야 하거든요… 하하. ;;;
이를테면, 아는 분은 아시겠지만 제가 아는 연예인은 무한도전 멤버와 무한도전에 나온 게스트 정도입니다. 게스트도 다 기억하는 것은 아니지만요… 하하.

역사쓰기에서… : 스톤월 항쟁Stonewall Riot 관련 메모

ㄱ. 증언에 따르면 한 부치가 호송차량에 강제로 끌려가던 중, 강력하게 경찰에 저항했고 이것이 항쟁을 촉발했다.

ㄴ. 주변에 있던 아프리칸-아메리칸과 라틴계 퀴어들(드랙, 퀸 등)은 경찰이 자신의 ‘자매’인 동성애자나 트랜스젠더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을 보고 참을 수 없었다. 그들은 현장에 개입하여 저항했고 이것이 항쟁을 촉발했다.
ㄱ과 ㄴ은 미국 퀴어의 역사를 회고하며 증언한 내용이다. ㄱ은 스톤월 항쟁이 촉발한 배경을 증언한 내용이다. ㄴ은? 역시 스톤월 항쟁이 촉발한 배경을 증언한 내용이다. 둘 중 하나만 진실이란 뜻은 아니다. 둘 다 (부분적)진실일 것이다. 어떤 부분적 진실을 선택하느냐가 논쟁이다. 또 다른 증언에 따르면, 이렇게 저항이 촉발하는 와중에 트랜스젠더인 실비아 리베라가 경찰에게 맥주병을 던졌고 경찰이 리베라를 경찰봉으로 찌르면서 항쟁이 본격화되었다고 한다.
어차피 모두 증언이고 해석이다. 중요한 것은 스톤월 항쟁이 백인 중심인 동성애자 운동의 기원으로 소환되었다는 점이다. 스톤월 항쟁은 동성애자만의 항쟁도 아니었고, 백인만의 항쟁도 아니었다. 그 항쟁에 많은 비백인이 있었고, 트랜스젠더 혹은 트랜스섹슈얼로 해석할 수 있는 이들이 존재했다. 그럼에도 항쟁이 끝난 후 스톤월 항쟁은 (백인)동성애자 운동의 기원 서사가 되었다.
이런 서사는 이전에 발생한 여러 사건을 은폐했다. 1950년대 일어났던 쿠퍼스 도넛 가게 항쟁, 듀이스 항쟁, 1966년에 일어났던 컴튼 카페테리아 항쟁 역시 저항 운동에서 중요한 사건이다. 특히 컴튼 카페테리아 항쟁은 트랜스젠더와 비백인의 연대, 십대와 비십대의 연대를 이뤘다. 컴튼 항쟁 이후 샌프란시스코 사회는 트랜스젠더를 시민으로 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성과지만 묻혔다.
스톤월 항쟁 이후 동성애자해방전선이 만들어졌다. 이 단체는 스톤월 항쟁의 정신을 이어받지만 백인 동성애자 남성 중심이었다. 비/백인-트랜스젠더 등은 이 단체에서 배제를 경험했고 결국 별도의 단체를 설립했다. 그리고 스톤월 항쟁은 백인 동성애자(특히 게이 남성) 운동의 기원으로 소환되었다. 이후 역사는 마치 동성애자가 시민권운동에, 해방운동에 앞장 섰다는 식으로 회자되고 트랜스젠더 운동은 1990년대에나 등장하는 식으로 기술된다. 물론 트랜스젠더 운동 역시, 백인의 경험에서 기술하느냐 비백인의 경험에서 기술하느냐에 따라 상당히 다르다.
이태원 트랜스젠더 역사를 찾으면서, 늦어도 1960년대 중반부터 트랜스젠더가 마을 유지로 살았다는 사실은 많은 것을 고민하도록 한다.(그 시절의 개인에게 트랜스젠더란 범주를 명명할 수 있는가,라는 논쟁은 별개로 하자.) 한국에서 퀴어의 역사는 어떻게 구성할 수 있을까? 과거의 흔적을 찾다보면, 한국 트랜스젠더 운동 혹은 이슈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인 하리수 씨의 방송 등장은 어쩌면 너무 늦은 사건이란 고민을 한다. 좀 더 일찍 나왔다면 어땠을까? 한국 퀴어의 역사는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오래 되었는지도 모른다.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관건이란 얘기다. 뭐, 뻔한 얘기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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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하리수 아카이브를 만들어야 했는데… 으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