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여름 퀴어 아카데미

여름 퀴어 아카데미를 합니다. 뼈의 젠더, 트랜스남성의 초기 자서전, 여대와 트랜스젠더퀴어, 무성애의 친밀성 논의까지! 아마도 현재 논의되는 퀴어 이론의 최전선이지 않을까 합니다. 꼭 많이 들으시기를!!

<2024 여름 퀴어 아카데미>
교육플랫폼 이탈에서는 올 여름에도 퀴어와 관련된 주제들을 가지고 아카데미를 준비했습니다. 뼈와 몸, 트랜스의 자기서사, 트랜스젠더퀴어의 역동, 여대의 역동 그리고 무성애적 친밀성까지 다양한 주제를 강사님들과 함께 준비했습니다.
덥고 꿉꿉한 여름의 한가운데에서, 퀴어한 공부로 퀴캉스를 즐겨보세요!!

일시 : 8월 19일 ~ 8월 28일(매주 월, 수) 저녁 7시 30분 ~ 9시 30분
장소 : 온라인(ZOOM)
수강료 : 50,000원(단강 15,000원)
입금 계좌 : 우리은행 1006-301-221561(예금주 :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후원회원 50% 할인)
신청링크 : https://bit.ly/24SSQA

<강좌 세부 안내>

1강 뼈와 몸, 젠더 이야기
8월 19일(월) 저녁 7시 30분 / 강사: 김태인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박사수료)

죽은 인간의 몸에서 성별은 어떻게 추정되며 이는 어떤 의미를 지닐까요? 본 강의는 사람뼈를 연구하는 법의인류학과 고고학에서 성별을 어떻게 다루는지에 주목합니다. 뼈는 꼭 남자나 여자로만 구분되는지, ‘논바이너리’의 뼈란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지를 논하며 폭넓게 인간의 몸과 젠더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2강 “형이라 불리는 여자”에서 “색다른 남자”로: 트랜스*의 자기서사와 자기지식
8월 21일(수) 저녁 7시 30분 / 강사: 백종륜(서울대 국문과 박사수료)

이 강의에서는 작가 이동숙/이문기의 자기서사가 반복과 변주를 거쳐 젠더화된 경험을 재조직하는 장면을 포착하고, 이를 토대로 이원 섹스/젠더 규범의 무능함을 폭로하는 트랜스* 자기서사의 문화적 역량을 살펴봅니다. 나아가 하리수라는 ‘사건’이 한국 사회에 도래하기 이전,자신의 삶을 해석할 언어를 가지지 못한 채 살았던 인물의 삶을 추적하면서, 트랜스젠더라는 ‘새로운’ 언어를 “성초월자”로 재번역하는 작가의 퀴어 자기지식의 의미를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3강 트랜스젠더퀴어의 역동, ‘여대’의 역동
8월 26일(월) 저녁 7시 30분 / 강사: 김유진(언니네트워크/ 한국성폭력위기센터의 뀨뀨)

어떤 공간에서의 경험, 그 공간의 의미는 모두에게 같지 않고, 그 차이는 권력이 교차적으로 작동하는 장면이 됩니다. 트랜스젠더퀴어와 여대를 붙여 읽을 때 그것이 낯설기도 하지만 둘은 각각, 함께 역동해왔습니다. 이를 2020년 여대를 다니던 트랜스젠더퀴어의 학교생활을 중심으로 살피고, 여자대학, 나아가 여성공간의 정치성을 모색하고자 합니다.

4강 무성애적 친밀성 살펴보기
8월 28일(수) 저녁 7시 30분 / 강사: 조윤희 (연세대 커뮤니케이션 대학원 미디어문화연구 박사과정)

성적인 것을 비자연화하는 무성애 논의는 새로운 친밀성과 관계들, 혹은 우리가 간과했던 친밀성과 관계들을 들여다볼 수 있는 렌즈를 제공합니다. 성적 친밀성에 우위를 부여하는 유성애규범성에 대항하여 우리는 어떤 친밀 관계를 이야기해볼 수 있을지 함께 논의해봅니다.

다정이는 무엇을 다시 시작하고 싶었을까

다정이는 규범적 의미에서 무질서하고 엉망진창이며 폴리아모리이며 폭력의 규범성에 종속되지 않는다. 그런 다정이는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다정이는 여러 번 다시 시작하겠다고 말한다. 그 중 한 번인가는 다시 시작한다. 다른 경우에는 다시 시작하는데 실패한다. 그리고 다정은 불안할 때마다, 곤란할 때마다 하나 둘 셋을 센다. 관객과의 대화에서 그것은 시작할 때 쓰는 구호이기도 하다고 했다. 하지만 다정이는 하나둘셋 구호를 백번은 외쳤다. 다정은 다시 시작했을까? 다시 시작하고픈 다짐이었을까?

이제 너무도 진부한 회귀물의 경우, 다시 시작하는 이들은 아는 자, 질서를 완벽하게 재조정하는 자이다. 미래를 알고 성공의 지름길을 알며 타인의 행동 패턴을 알고 있다. 그리하여 아는 미래를 대비한다. 자신이 알고 있는 미래를 활용해서, 자신이 알고 있는 미래를 바꾼다. 타인의 변수는 계산 속에 있거나 통제 가능하다. 다정이는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다시 시작한 인생은 이전보다 괜찮을까? 오히려 고통과 최악을 두 번, 세 번 반복하는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다시 시작할게요라는 대사 혹은 간절함은 오히려 불안하며, 리셋의 안정감이나 문제 해소를 위한 외침이기보다 슬픔과 미안함의 중첩으로 읽힌다. 이전의 실패나 엉망진창인 상황을 그대로 혹은 더 나쁜 방향으로 다시 시작한다면, 그건 무엇일까?

여기서 이 연극의 절망적인 희망편이 등장한다. 암울하지 않기 위한 억지의 희망이 아니라 암울함-희망이다. 엉망진창을 되풀이하는 것이 다정의 욕망이라면? 모든 것이 다 망했다는 그 상황이 다정을 추동하는 힘이라면? 그럴 때 다정은 오히려 질서를 새롭게 재편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다정은, 우울증은, 감정적 고통은, 그 끔찍함을 다시 시작할 수/견딜 수 있을까.

그러고보면 다시 시작하는 지점은 또 어디, 어떤 사건이 발생하기 전일까?

너무 많은 기대, 낭독극

서울프린지페스티벌의 일환으로 진행한 연극 [너무 많은 기대](김연경 작가, 이수림 연출, 이청 & 이효진 배우)를 봤다.

공연은 낭독극이었다. 몇 년 전에도 [에로 그로-경성]이라는 낭독극을 본 경험이 있는데, 잘 하는 낭독극은 종종 경이로울 때가 있다. 주로 의자에 앉아 목소리 톤과 표정으로 연극을 전개하는데 그 표정이 공간을 완전히 다른 장소로 바꿀 때가 있어서다. [에로 그로-경성]도 그랬지만, 이번 공연 [너무 많은 기대]도 그랬다. 배우들의 표정, 목소리 떨림, 톤의 변화를 통해 감정을 전달하고 무대 배경이 변했음을 인지할 수 있게 했다. 그것이 늘 경이로운데 어떻게 표정과 목소리로 공간의 변화를 구현할 수 있을까 싶다. (이청 배우님은 ‘눈물을 흘린다’는 부분에서 진짜 눈물을 흘리셔서 너무 놀랬다.)

물론 내가 가장 앞자리에 앉았기에 더 생생하게 느낀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에로 그로-경성] 때도 배우들의 표정과 목소리 톤을 통해 공간을 바꿨는데, 그나마 그때는 공연장이 그런 변화를 실감할 수 있는 독특한 구조가 있었다. 그런데 이번 공간은 카페/술집 같은 곳이라(카페인 줄 알았는데 냉장고에 술이 너무 많아서…) 이번 공연의 달달한 내용과 결이 다른 곳이었다. 그럼에도 공간의 분위기를 표정과 목소리로 구현하고 바꿔낼 수 있다니…

이 공연을 준비해준 모든 분들께 감사했다.

어쩐지 최근 본 공연은 다 좋다. 남은 연극도 좋을 거란 기대 아니 확신이 있네. 다음은 색자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