넋두리: 트랜스젠더 연구는 가능할까?

01
스마트폰을 사지 않으려고 했지요. 여러 이유가 있는데 이곳에 차마 못 쓴 이유도 있습니다. 저 자신이 충분히 스마트한데 굳이 스마트폰까지 갖출 필요가 있을까? … 하지만 얼추 석 달 정도 사용하니 좋아요. 매우 유용하게 쓰고 있습니다.
… 이런 만행에 가까운 농담이라니.. 으하하. 요즘 좀 속상한 일이 있어 막 던지는 자학성 개그입니다.
02
한국의 학제에서 트랜스젠더 이슈를 공부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별다른 어려움 없이 트랜스젠더 이슈에 집중해서 공부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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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출은 했지만 읽은 사람은 거의 없는 제 석사학위 논문에서 던지고 싶었던 질문, 문제의식은 참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중구난방으로 글을 썼고 망했지요. 으하하. ㅠㅠ
핵심은 있습니다. 젠더가 도대체 무엇이냐? 트랜스젠더와 퀴어를 배제한 젠더 논의가 아니라 인간의 복잡하고 다양한 경험에 바탕을 둔 젠더 논의를 어떻게 구성할 수 있을까? 뭐, 이런 질문을 던졌고 어떻게든 방향을 모색하려고 했습니다. 졸업하고 얼추 1년 가량은 실패했다고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뭔가 단초는 잡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럼 그 단초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
젠더가 무엇이냐고 질문을 던진 이유 중 하나는, 한국 사회에서 소비하는 페미니즘은 도대체 어떤 과정을 거쳤기에 이토록 이성애주의로 점철된 것일까란 갑갑함 때문입니다. 정말이지 어떻게 하면 이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이성애주의가 견고합니다. 전 누군가가 이 맥락을 추적하는 논문을 써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미국의 퀴어 이론가, 레즈비언 페미니스트의 (퀴어)논의조차 이성애주의 페미니즘으로 가공하고 유통하고 소비하는 맥락이 정말 궁금하거든요.
04
의료적 조치를 취하지 않는 mtf/트랜스젠더로 평생 살아가는 건 정말 가능할까요?
05
첨엔 다른 글을 썼는데 그 글은 일단 키핑하기로 했습니다. 두고 보죠.

크리스틴 조겐슨Christine Jorgensen: 이성애 가족 구조

요즘 How Sex Changed란 책을 읽고 있습니다. 진작 읽어야 했는데 이제야 읽는 게으름이라니!

지하철에서 이 책을 읽고 있으면 ‘으잉?’이란 표정으로 절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책 제목만 보고 당황한 것 같은데, 도대체 무얼 상상한 것일까요? 😛
이 책은 미국 트랜스섹슈얼의 역사를 다루면서 ‘섹스’의 개념이 어떻게 변했는가를 논하고 있습니다. 그 중심에 크리스틴 조겐슨이 있습니다. 1950년대 미국에 등장한 조겐슨을 가장 쉽게 이해하는 방법은 한국의 하리수 씨를 떠올리면 됩니다. 당시 미국에 정말 센세이션하게 등장했거든요. 존겐슨이 신문에 자서전을 연재하자 평소보다 몇 배 더 많이 판매되었죠. 엽서에 “To Christine Jorgensen”이라고만 적어도 배달이 될 정도였고요.
조겐슨이 등장한 직후, 조겐슨에 엄청난 관심과 함께 조롱과 비난도 쏟아 집니다. (물론 대세는 조겐슨을 수용합니다, 한국 사회가 하리수 씨를 수용하는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그 비난 혹은 조롱 중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Christine’s sister will have a baby,” one joke opened. “Does that make [her] an aunt, an uncle or an ankle?”(77)
크리스틴의 자매가 아이를 가진다면, 크리스틴은 숙모가 될까, 삼촌이 될까, 발목이 될까?
처음 ankle을 읽었을 때 전 aunt의 a와 uncle의 nk(c)le의 합성어인 줄 착각했습니다. 이 구절을 소개하기 전엔가, 크리스틴을 여성과 남성이 공존하는 그런 존재로 얘기하는 구절이 나오거든요. 그런 맥락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단어 뜻이 발목, 복사뼈니까요. 무슨 의미인지를 잠시 고민했습니다. 저자도 이 구절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거든요. 그냥 넘어갑니다. 근데 순간 퍼뜩 떠올랐습니다. 아, 발목…
‘부은 발목’을 알고 계시죠? 네, 오이디푸스가 ‘부은 발목’입니다. 그 순간 깨달았습니다. ankle은 조겐슨을 오이디푸스와 같은 존재로 미국 사회에 등장했다는 것을. ankle이란 조롱은 조겐슨이 가족 질서를 흔든다는 불안을 반영합니다. 조겐슨은 누가 여성이고 누가 남성인가를 질문하는 동시에 가족 관계 자체도 흔들었습니다(아들에서 딸로).
지난 9월 2일 대법원이 미성년 자식이 있는 트랜스젠더는 법적 성별을 정정할 수 없다고 판결했습니다( http://goo.gl/5QWWE ). 한국 대법원의 판결은 1950년대 조겐슨을 ankle로 조롱한 것과 비슷한 맥락입니다. 이성애 가족의 취약한 구조가 폭로되었기에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다는 불안, 이성애 가족을 보호해야 한다는 불안, 이성애 가족 구조가 결코 자연스러운 형식이 아니라는 사실을 견딜 수 없는 거죠. 이 불안과 사실을 회피하기 위해 법은 금지를 선언하고, 언론은 어떻게든 조롱하려고 합니다.
규범이란 어떻게 유지되는 걸까요? 살얼음보다 취약한 구조인 지배 규범은 어떻게 유지되는 걸까요?

진학을 준비하면서: 자학과 자뻑 사이에서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면서 이것저것 확인하고 있다. 제출해야 할 서류를 확인한다거나 학과 홈페이지에 들어가 과목 등을 대충 훑어보는 식이다. 그러다 문득 두려웠다. 난 박사 과정에 진학할 준비를 충분히 한 상태일까? 그 정도의 공부를 하고 있을까? 솔직하게 말해, 자신이 없다.
공부란 내가 얼마나 무지하고 무식한지를 확인하는 과정이며, 자신의 무지와 무식을 조금이라도 숨겨보려고 발버둥치는 과정이다. 공부를 할 수록 나의 무지가 여실하게 드러나고, 그래서 더 공부하려는 순환 과정. 나의 두려움은 이것이 아니다. 확인할 무지와 무식 조차 없는 그런 상태면 어떡하지? 겸손인지 자기고백인지 모를 “제가 아는 게 없어서요”라는 말 조차 못 할 그런 바닥 상태면 어떡하지? 이 사실을 지금 내가 깨닫지 못 한 상태에서 박사과정에 진학하겠다고 거들먹거리는 것이라면 어떡하지?
준비하고 있는 학과에 진학하기 위해 운영위원 중 한 분에게 이메일을 보냈다(이것은 내가 어떤 과에 진학하려는지를 밝히지 않기 위해 두루뭉실하게 작성한 문장이다). 내가 어떤 분야에 관심이 있고, 어떤 글을 썼으며, 어떤 주제로 공부하고 싶은지를 적었다. 주제를 기술하면서 관심 있는 분야, 공부하고 싶은 주제가 있다는 점을 확인했다. 공부하고 싶은 분야는 많다. 박사학위 논문 수준으로 파고 싶은 주제도 몇 개 있다. 한국 성전환수술의 역사, 젠더와 피부, 의학과 괴물의 발명 등. 내게 공부하고 싶은 주제가 있음을 확인하며 즐거웠다. 현재로선 매우 두루뭉실한 상태지만 어쨌거나 하고 싶은 주제가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하지만 이것이 박사과정에 진학해도 괜찮을까와 같은 질문에 정당함을 제공하진 않는다. 나는 박사과정에 진학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는가?
(고백이랄 것도 없는 내용인데… 석사과정에 진학하기 위해 어떤 준비를 했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간단하게 대답할 수 있다. 없다고. 따로 준비한 것이 없었다. 제출해야 하는 서류만 준비했다.)
박사과정으로 진학할 학과를 ㅂ선생님에게 말한 적 있다. ㅂ선생님은 “## 선생님[주임교수]에게 전화라도 해줄까?”라고 말했다. ㅂ선생님은 그 학과 운영위원 모두와 잘 아는 사이며 주임교수와는 특히 친한 사이다. 전화 한통이면 여러 가지로 편하리라. 참 고마운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난 단박에 사양했다. 내가 작성한 문서로만 평가받고 싶기 때문이다. 근데 난 박사에 갈 충분한 실력이 있긴 할까?
3년만에 학교에 가려고 준비하고 있다. 초등학교 입학 후 중간에 끊기는 일 없이 석사과정까지 마쳤다. 학교 그만두겠다고 휴학을 한 적 있지만 그럴 때도 계속 학생이었다. 3년을 쉬고 학교에 가려니 모든 게 낯설고 어색하다.
아, 귀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