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도 젠더 구분?

어제 G+에 다음과 같은 메모를 남겼다.

지하철에서 발생하는 성폭력을 줄이거나 예방하기 위해 여성칸을 만들겠다는 방안은, 예방의지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관련 이슈를 진지하게 고민하기 싫으며, 대충 구색맞추겠다는 안일함을 표현한 것 뿐이다. 이런 방안을 내면서 안 부끄러웠을까?( http://goo.gl/YD4za )
글의 발단은 서울시에서 지하철에 여성전용칸/여성안전칸을 만든다는 기사다(http://goo.gl/f61R0). 지하철 내 성폭력 사건을 줄이겠다는 시장의 의지에 따라 추진에 적극적이라고 한다. 비판 거리는 차고 넘친다. 이렇게 고민 없고, 철학 없는 정책이라니…
글로 남긴 나의 첫 번째 반응은 G+에 쓴 메모지만, 기사를 읽고 가장 먼저 떠오른 걱정은 다른 거였다. ‘트랜스젠더(mtf/트랜스여성)는 어떡하지?’ 의료적 조치를 선택하지 않거나, 아직 하지 않았거나, 이제 막 시작해서 남성으로 통하는 mtf/트랜스여성은 여성전용칸을 사용할 수 있을까?
트랜스젠더 관련 특강을 하면, 늘 하는 얘기가 있다. 화장실을 비롯한 몇몇 공간의 젠더 구분이 유발하는 이슈다. 여성화장실, 남성화장실과 같은 공간 구분은 트랜스젠더를 곤란하게 만들고 모든 개인에게 규범적 젠더를 내면화하도록 한다. 머리카락 길이가 매우 짧고 남자처럼 보이는 여성이 여성화장실을 사용하기 쉽지 않고, 여성스러운 남성이 남자화장실을 사용하기 쉽지 않다. 화장실을 비롯하여 젠더 이분법으로 나뉜 공간은 이 사회가 요구하는 규범적 젠더를 실천하도록 하는 일상 장치다.
비단 이분법으로 분명하게 나뉜 공간만의 문제가 아니다. 전용공간 역시 마찬가지다. 전용공간은 특정 젠더를 위한 공간이어서 문제라는 게 아니다. 어떤 젠더를 배제하기 때문에 문제인 것도 아니다. 전용공간을 사용할 수 있는 특정 젠더의 범위를 매우 협소하게 규정하기 때문에 문제다. 가장 진부한 질문을 던지면 다음과 같다. “여성전용공간이 얘기하는 여성은 누구인가?” 주민등록번호 상의 성별이 2/4/6으로 등록되어 있는 사람? 그렇다면 ftm/트랜스남성은 여성이 아니지만 여성전용공간을 사용할 수 있다. 이럴 때 그 공간은 ‘여성전용’공간일까? 그렇다면 겉모습이 여성으로 통하는 사람의 공간? 앞서 말했듯 남성으로 통하는 mtf/트랜스여성은 매우 곤란하다. 모든 mtf/트랜스젠더에게 의료적 조치를 요구하는 것은 더 많은 논쟁거리를 낳지만 여기선 생략. 다시, 자신을 여성으로 정체화 하는 사람? 그렇다면 피상적으로 ‘여성전용’공간이란 구분이 무의미할 수 있다. 또 다른 방책으로, 주민등록번호 상 여성이지만 트랜스여성은 예외적으로 출입 가능? 그럼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트랜스젠더는 행사진행요원에게 자신이 트랜스젠더라고 밝혀야 하는 걸까? 다른 말로 그 행사에 참가하는 모든 구성원에게 ‘저는 트랜스여성이에요’라고 대대적으로 알려야만 그 공간을 사용할 수 있다. 밝히길 원한다면 밝힐 수도 있겠지만 밝히길 원하지 않는 사람도 차고 넘친다. 전용공간 역시 지배 규범적 젠더를 실천하도록 하는 장치일 수밖에 없다.
지하철에 여성전용칸이건 여성안전칸이건 어쨌거나 젠더 구분 공간이 발생했다고 치자. mtf/트랜스여성은 그 공간을 사용할 수 있을까? 내 상상력에 존재하는 mtf/트랜스여성의 상당수가 사용할 수 없다. 그러니 나의 반응은 간단하다. 그런 정책은 매우 폭력적이라고(이런 표현 참 오랜만이네..; ).
+
댓글을 읽으며 좀 웃겼다. 서울시 시장이 밀고 있는 정책인데 욕은 여성가족부가 먹고 있다… 흠… 제목만 읽고 댓글 쓴다는 말이 사실이었다…
++
몇몇 댓글은 ‘남성도 매너손으로 불편하니 남성전용칸을 만들어라!’고 주장한다. 가해자로 의심 받지 않기 위한 행동(성폭력의 복잡함을 고민하길 바라는 건 아니니;; )과 피해를 겪지 않기 위한 행동을 동일시하는 언설은 매우 곤혹스럽다. 아… 가해자의 인권, 수용인(구금인)의 인권, 피해경험자의 인권 논의가 매우 지저분해지면서 논의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거야… 아놔… -_-;;

트랜스젠더가 이 자리에 있다고 말하기가 쉬운 것만은 아니다

(트랜스젠더를 비롯한 퀴어가)”이 자리에 있을 수도 있다”란 말과 “이 자리에 있다”란 말의 간극은 매우 크다. “이 자리에 있을 수도 있다”란 말은 존재 가능성은 열어 두지만 실제 존재하고 있는 개인을 다소 모호한 상태로 만든다.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은 없을 수도 있다는 뉘앙스를 함께 내포하기 때문이다. 퀴어를 긍정하기 위한 표현이 자칫 퀴어의 존재를 애매하게 만든다. 그래서 난 강의를 할 때면 “이 자리에도 있다”고 말한다. 실제 나 외의 다른 어떤 퀴어가 있는지는 모를 일이다. 없어도 상관 없다. “이 자리에도 있다”와 같은 단정적 표현은 퀴어를 모니터 너머에만 존재한다고 알고 있는 이들에게 어떤 구체성을 제공할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요지는, 그 자리에 나 아닌 퀴어가 있는가, 없는가가 아니다. 퀴어를 구체적 개인으로 고민하는 것이다.
이런 나의 전략은 대학생 이상이 있는 자리에선 큰 문제가 없다(라고 믿고 있다). 초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라면? 글쎄.. 쉽지 않다. 한국 사회에선 퀴어 혐오가 상당하고, 초중고등학교의 왕따 이슈가 심각하다. 트랜스젠더도 아니고 게이도 아니지만 여성스러운 남학생이 있을 경우, 그 아이가 트랜스젠더로 혹은 게이로 왕따 당할 수 있다. 여성스럽지 않은 여학생이 있을 경우, 그 학생이 트랜스젠더 혹은 레즈비언으로 왕따 당할 수도 있다. 가능성은 이것 만이 아니다. 평소 어떤 소문이 돌았다면 나의 말은 내가 의도하지 않은 증거가 될 수 있다. 초중고등학교가 단체 생활을 하는 폐쇄 집단이란 점에서 단정적 발언은 다소 위험하다.
몇 년 전,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성교육 프로그램을 만든 적 있다(더 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ㅅ; ). 프로그램을 제작하기 위해 초안을 작성하고 공부방에 찾아가 시연도 했다. 그때 만난 초등학생 집단이 꽤나 재밌었다. 한 초등학생 ㄱ은 공공연하게 같은 공부방의 친구에게 좋아한다고 말했고 나중에 결혼하자는 말도 했다. 물론 이런 발언만으로 ㄱ을 레즈비언으로 단정할 수는 없다. ㄱ이 레즈이언이다, 아니다가 쟁점도 아니다. 동성 친구에게 나중에 결혼하자고 말했음에도 ㄱ은 그 집단에서 왕따를 당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ㄱ은 그 집단에서 이른바 짱이었다. 나이도 가장 많았지만 가장 힘있는 구성원이었다.
또 다른 구성원 ㄴ은 좀 달랐다. 그때 나는 트랜스젠더와 관련한 강의를 하고 있었는데 ㄴ은 나중에 여자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 말이 어떤 맥락에서 나왔는지는 모른다. ㄴ이 정확하게 “여자가 되고 싶다”고 했는지 그저 그와 비슷한 어떤 뉘앙스의 말을 했는지도 정확하지 않다. 아무려나 ㄴ은 그 집단에서 가장 힘이 없고 나이도 어렸다. 또래의 다른 친구가 있었지만 그들은 ㄴ과 친하게 지내지 않으려 했다.
ㄱ만 있었다면 나는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이 덜 부담스러웠을 거다. 이 집단에도 퀴어가 있다고. 물론 나는 ㄱ을 의도하고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ㄱ의 상황을 알고 있어도 부담은 덜 했을 것 같다. 나의 단정적 발언이 위험하긴 마찬가지다. 미래 일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니까. 사람들이 ㄱ을 레즈비언으로 인식하고 ㄱ의 행동을 해석할 때와 ㄱ을 레즈비언으로 인식하지 않고 ㄱ의 행동을 해석할 때의 효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부담이 조금 덜하겠지? 하지만 ㄴ만 있는 상황이라면? 그 상황에선 “있다”와 “있을 수 있다”의 뉘앙스 차이가 중요하지 않다. 이런 말 자체를 하지 않는 것이 더 안전할 수도 있다. 그러니 그 말을 할 것이냐, 말 것이냐를 고민해야 한다. “있다”란 말이 ㄴ에게 어떤 식으로건 힘을 줄 수도 있지만 집단의 다른 이들에게 ㄴ을 왕따할 빌미를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난 토요일 어느 청소년 단체 활동가를 대상으로 강의를 했다. 그 자리에서 이와 관련한 얘기를 나눴다. 십대에게 어떤 식으로 얘기를 하면 좋겠느냐는 질문을 받았고 단적으로 말하는 것이 좋지만 그것이 가진 위험성도 함께 얘기했다. 같이 얘기를 나누며 그나마 가능한 대안으로 동성애자 인구 비율 같은 통계를 언급하는 것, 타고난다는 말 같은 걸 하는 것이 좋을 수도 있겠다는 말이 오갔다. 정답은 없다. 평소 매우 비판하던 방식의 접근법이 어떤 상황에선 가장 효과적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무려나 난 솔직히 말해서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지 잘 모르겠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물론 정답은 없다. 그날 감을 믿을 뿐…

[남성성과 젠더]의 저자 특강!

하이브리드 인문학을 만나다: 남성성에 대한 여섯 가지 질문

시간: 2011.08.09.화. 저녁 7시 30분.
장소: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 회관
강사: 권김현영, 한채윤
기획: 알라딘, 자음과모음
자세한 내용은 http://goo.gl/EkmEF
지난 2월 말에 [남성성과 젠더](http://goo.gl/42g5m)란 책이 하이브리드 총서란 시리즈로 나왔습니다…(힐끔 ;; ) 이후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서 하이브리드 총서 시리즈를 강좌로 기획할 거란 얘기를 들었습니다. [남성성과 젠더]는 누가 강의를 할 것이냐고 물었고, 저는 청중으로 참가할 거라고 답했습니다. 크크. ;;; 강좌를 4월 즈음 진행할 줄 알았는데 여름 강좌로 열렸네요.
따로 신청해야만 갈 수 있는 건지, 그냥 가도 괜찮은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냥 갈겁니다. 알라딘 아이디도 없고 신청하기도 귀찮아서요..;;; 일단 갔는데 별말 없으면 많은 신청자 중 한 명으로 조용히 들으려고요. 신청자만 들을 수 있다고 얘기하면 공저자라고 우기고요. 우히히.
아무려나 권김현영 님과 한채윤 님이 함께 진행하는 강좌를 듣는 기회도 흔하지 않으니 시간이 괜찮으시면 꼭 참여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