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KSCRC 겨울아카데미 “젠더포비아: 어느 트랜스젠더/’복장도착자’의 죽음”

2009년부터, 그 해 첫 번째 강의는 KSCRC 겨울아카데미 강좌다. 그래서 늘 긴장하고 떨리고 무섭고.. 흐. 그래도 늘 좋다. 해마다 하고 싶다는… 흐흐흐.
아래는 이번 강좌에서 배포판으로 작성한 글(배포판과 내가 직접 사용하는 원고는 다르다;; ). 그 외에 신문기사 세 편을 함께 읽었다. 핵심은 언제나 강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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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읽은 세 편의 기사는
“여친이 남자?” 격분해 트랜스젠더 살해 http://goo.gl/363Wr
아이들까지 혼란케 한 ‘여장 아빠’ http://goo.gl/STWVp
“18살 트랜스젠더의 ‘쓸쓸한 죽음'” http://goo.gl/rSMFz
2011 KSCRC 겨울아카데미 강좌3: 논쟁과 이슈. “혐오, 공포, 그리고 증오”
5강 젠더포비아: 어느 트랜스젠더/’복장도착자’의 죽음.
by 루인( runtoruin@gmail.com )
2011.02.22.화. 19:00- @이화여자대학교 ECC 132호
01
가해자가 폭력을 서술하는 과정은 자신의 젠더범주(혹은 정체성)를 입증하는 과정이다. 즉, 혐오폭력은 자신의 불안을 은폐하는 방식이다.
02
트랜스포비아: 한 개인의 젠더정체성이나 젠더표현을 이유로, 트랜스젠더, 트랜스섹슈얼 그리고 비규범적으로 젠더를 실천하는 개인을 향한 혐오, 공포, 증오.
-간접적 트랜스포비아: mtf/트랜스여성을 남성 전용 병원에 보내거나, ftm/트랜스남성에게 산부인과 서비스가 필요하단 점을 인식하지 못 하는 것과 같이, 트랜스젠더를 향한 무시나 잘못된 태도를 포함한다.
-직접적 트랜스포비아: 젠더정체성, 젠더표현 등을 이유로, 차별, 모욕적 언설, 괴롭힘, 위협, 폭력 등을 가하는 행동.
젠더표현: 복장, 헤어스타일, 목소리 등을 통해 외적으로 젠더를 드러내는 방법.
Forshee “Homophobia and Transphobia”(2010)에서 재인용.
[<- 첨언하면, 2번은 그냥 포함했다는.. 뭐, 그런.. 이 글에서 유일한 인용이라는…]
03
낯선 타인을 트랜스젠더로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나. 내가 나의 젠더를 확정하기 전에 타인이 나의 젠더를 의심할 수 있고, 이를 처단할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나. 우리 몸은 어떻게 구성되며 구성된 몸은 어떻게 해석되나.
04
1973년 DSM에서 동성애 항목 삭제. 동성애를 정신병으로 진단하지 않기로 함.
1980년 DSM에 GID(Gender Identity Disorder, 성주체성장애, 성별정체성장애) 항목 추가. 트랜스젠더를 정신병 항목으로 확정.
아동 GID 항목(GIDC)을 두고 동성애혐오 논쟁 발생.
05
호모포비아의 외적 단서는 젠더.
젠더포비아는 트랜스젠더가 겪는 혐오폭력을 가시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전략인 동시에 많은 혐오폭력이 젠더화된 관습, 젠더표현과 관련 있음을 지시화기 위한 용어. 티내지 않으면 혐오폭력도 없겠지만 티내지 않기는 다른 말로 지배 규범적 젠더를 실천하는 것. 다른 말로 트랜스젠더로 살지 말라는 뜻이자 매우 빨리 성전환을 완료하라는 뜻. 하지만 이 말의 역설은, 다른 많은 역설과 함께 티내지 않으면 그 누가 변태여도 상관하지 않겠다는 것. 그리하여 피상적으로 파악할 수만 없다면 누가 변태인지 알 수 없고, 규범적 젠더를 실천하는 것 같은 사람이 퀴어이거나 트랜스젠더일 수 있다는 것. 바로 이런 이유로 끊임없이 표식을 찾음.
06
젠더폭력의 두 가지 층위
첫 번째, 트랜스젠더를 향한 혐오와 폭력
두 번째, 개인을 그에게 적합하다고 여기는 젠더로 환원하고 그 젠더에 적합하게 행동할 것을 강요하는 폭력.
이 둘은 다른 이야기가 아니지만 조금 다른 층위로 가는데, 첫 번째가 피상적으로 트랜스젠더만의 문제로 수렴하는 경향이 있다면 두 번째는 젠더경합 개념과 함께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개인이 젠더를 경험하는 방식을 포괄해서 설명하는 경향이 있음. 두 번째 경향이 자칫 트랜스젠더 이슈를 희석하는 위험과 트랜스젠더가 겪는 젠더폭력과 비트랜스젠더가 겪는 젠더폭력을 동일시할 우려가 있다고 해도, 이 둘은 반드시 같은 수준에서 동시에 이야기할 필요가 있음.
07
혐오는 언제나 기획되고 예행연습을 거침. 즉 증오와 혐오폭력은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우발적 사건으로 구성될 뿐. 아울러 기만된 사건으로 설명됨. 브랜든 티나/티나 브랜든처럼 가해자는 자신이 기만당했다고 주장하며 자신을 피해자로 설명하고 피해경험자 혹은 이제는 고인이 된 자를 가해자로 모함함. 이 기만은 가해자의 헛소리가 아니라, 젠더규범을 위반하며 사회적 공감을 획득하면서 호소력을 지님. 채윤 씨 강의에서 “가해자는 대의명분이 있다.”고 했는데 가해자는 언제나 정당함. 그랬을 때 젠더란 무엇이며 몸과 젠더범주의 일치, 복장은 무엇인가.
08
외부성기로 연결되는 젠더. 젠더와 외부성기의 추정.
의료에서 젠더는 외부성기로 결정되고, 우리는 타인의 복장과 얼굴 형태 등으로 젠더를 결정하고 그렇게 결정한 젠더가 성기형태와 동일할 것이라고 가정. 이럴 때 우리 몸은 곧 외부성기인가.
인터섹스의 수술, 외부성기 형태, 행복. 의사가 행복을 결정하는 과정. 비-인터섹스만이 행복한, 이성애자되기가 행복으로 가는 과정. 행복은 규범적 몸을 갖추는 것, 규범적 행복, 행복한 규범.
규범적 몸 형태에 적절한 젠더 표현(복장, 머리카락 길이, 몸짓 등)을 덧붙여 규범을 지향할 때 비로소 행복을 지향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고, 행복의 근거가 됨.
09
트랜스젠더는 트랜스젠더로 패싱할 수 없고 오직 여자 아니면 남자로 패싱할 수 있다. 그리고 이 패싱에 부합하지 않을 때, 폭력이 발생한다. “저 사람 여자야, 남자야?”란 질문은 트랜스젠더를 드러내는 전략일 수도 있지만 여자/남자라는 규범적 젠더를 환기하는 언설이기도 함. 아울러 이 사회에서 규범적으로 살아가기 위한,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한 조건은 여자/남자로 패싱하는 것이지 트랜스젠더로 패싱하는 것은 아님. 그런 의미에서 트랜스젠더로 패싱하는 것은 불가능함. 패싱할 수 없는 상황은 역설적으로 누가 트랜스젠더인지, 비트랜스여성/남성인지 알 수 없다는 뜻이며, 막연하게 타인이 비트랜스제라고 믿을 뿐 실제 타인이 트랜스젠더인지 비트랜스젠더인지 알 수 없다는 뜻. 그래서 인터넷 댓글에서 트랜스젠더 이마에 표식을 남겨라고 주장하며 블로그 리퍼러로그에 트랜스젠더 구별법이 찍히는 것. 끊임없이 구별하고 싶어 하는 것. 화학적거세처럼. 트랜스젠더도 있다거나 젠더는 둘이 아니다라는 인식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누가 트랜스젠더이고 비트랜스젠더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더 중요한지도 모르겠음. 아니, 혐오가해자에게 이 차이는 결코 알 수 없는 것이기에 무지를 알 수 있는 성질의 것으로 바꾸려는 욕망, 무지를 인정할 수 없다는 불안 등이 ‘모호한’ 존재를 폭력의 대상으로, 고인으로 만듦.
PDF 다운로드: http://goo.gl/2RLPN

언제나, 공리를 질문하기 위해

트랜스젠더는 “여자보다 더 여성스럽다”는 주장은, 트랜스젠더의 특성이 아니라 비트랜스가 트랜스에게 바라는 특성이거나 비트랜스가 트랜스에게서 읽어낼 수 있는 유일한 특성일 뿐이다.(https://www.runtoruin.com/1695)
작년 학술대회 발표문으로 쓴 글의 일부다. 다음 주에 있을 젠더포비아 강좌를 준비하며 예전 글을 읽다가 이 구절에서 잠시 쉬었다. 자기 글을 읽다가 잠시 쉬는 건 참 웃기고 남우세스러운 일이지만 그래도 잠시 멈췄다. 위 구절은 내가 늘 견지하고자 하는 인식론이지만 종종 놓치는 인식론이다. 부끄럽다.
수학을 공부하며 가장 즐거웠던 시간은 집합론 수업이었다. 그 수업이 집합론 수업 맞나? ;; 암튼 피아노 공리라는 내용을 배운 시간이니 집합론이 맞을 듯하다. 피아노 공리(악기 이름 피아노가 아니라, 사람 이름 피아노…;;; 아 썰렁;;;)는 여기에도 몇 번 쓴 적 있다. 쉽게 예를 들면, 1에 1을 더하면 2다. 2에 1을 더하면 3이다. 이렇게 순서대로 계속나갈 때, 우리는 10000에 1을 더하면 10001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하나하나 다 검토할 수 없지만 1억에 1을 더한 결과가 무엇인지 우리는 안다고 믿는다. 하지만 수학에서 이것은 공리에 해당한다. (물론 “1+1=2” 자체는 증명할 수 있는 명제다.) 수학에서 공리는 증명할 수 없지만, 수학이란 체계를 만들기 위해 맞다고 치자는 일종의 합의다. 그래서 그것이 수학적 엄밀성으로 옳은지 그른지 알 수 없다. 그저 수학적 귀납법에 따라 옳다가 가정할 뿐이다.
피아노 공리를 배운 시간은 매우 짧다. 기껏해야 5분도 안 된다. 수학(정확하게는 유클리드 기하학 체계 내에서의 수학)의 치명적 약점이기 때문일 수도 있고 이 내용 자체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나는 이 시간을 매우 선명하게 기억한다. 공리란 진리나 사실이 아니다. 사회적/집단의 합의일 뿐이다.
어떤 명제를 당연하다고 믿으며 그 명제를 전제로 삼을 때, 이후의 논의는 문제가 많을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사람은 당연히 여성과 남성으로 태어나고 자라고 죽는다는 말 자체를 질문하지 않을 때, 이 명제에 따른 논의는 많은 사람을 배제한다. 물론 이 명제가 여성과 남성이란 이분법에 부합하지 않는 존재는 사람이 아닌 어떤 ‘것’으로 배제하기 위해 의도한 것이라면 할 말이 없지만.. -_-;; 질문하고 증명해야 하는 어떤 명제를 공리로 삼을 때, 그 사람이 욕망하는 것은 무엇일까?
트랜스젠더 이슈로 계속 예를 들면, 나는 사람들이 “트랜스젠더를 (잘)모른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물론 모를 수 있다. 다만 의도적이고 규범적 망각이자 무지라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 트랜스젠더를 모르는 것이 규범적 지식이며 아는 것은 뭔가 의심스러운 지식(“너 혹시..?”)이란 점을 지독하게 잘 알기에 망각과 무지를 몸에 익힌 것 뿐이다. 이것은 내가 언제나 제기하려는 의문이고 어떤 이슈에 접근할 때 기본적으로 취하는 방법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내가 무엇을 아는가도 중요하지만 무엇을 모르고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 내가 무엇을 모른다는 사실 조차 모른다는 점이 더 중요하다. 그래서 나는 용감하지만 불안하다. 나는 무엇을 공리로 삼고 있을까? 나의 주장 역시 공리일 때, 경합하는 공리에서 나의 주장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혐오를 비판(?)하기 위해 썼다지만 혐오로 가득한 어떤 기사

오늘 하루도 심심하지 말라는지 어이를 상실케 하는 기사가 떴다.
제목: 하리수-미키 정 부부에 대한 삐딱한 시선, 그 자체가 사팔뜨기 http://goo.gl/4KZTz
트랜스젠더, 동성애자, 장애인 등 사회적 소수자/약자로 분류하는 이를 향한 부정적 시선을 비판하고자 하는 기사다. 그리고 이 기사가 엄청난 혐오를 드러내고 있다.
일단 기사 제목 자체가 장애혐오/비하 발언. 정치적 올바름에 강박적이거나 누군가를 훈계하려는 글에서 또 다른 혐오가 등장하는 일은, 다들 알겠지만 새로울 것 없다.
또 다른 히트작은 다음 구절.
이성애에 비해 극소수라 그렇지 동성애가 결코 병이나 이단은 아니다. 단지 ‘개인의 성적 아이덴티티’일 뿐이다. 물론 양성애는 욕심 충만한 변태다.
바이는 “욕심 충만한 변태” ㅇ화내홰먀옮ㄴㅇ;ㄹㄴ’ㅇㄹ
예전에도 이와 비슷한 논조의 기사를 읽은 기억이 있는데 같은 기자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려나 이 기사를 읽고 분노하면서 내린 결론, “ㅋㄷ 님, 빨리 논문 쓰세요.” 😛
이렇게 동성애를 권장하다시피 한 이유는 평화유지기간이 1~2년이 고작일 정도로 전쟁이 잦았기 때문. 휴화산 기간에 아버지는 자신의 부하를 고르고 그와 사랑을 나눔으로써 가정에 더욱 충실했고 전쟁발발시 여자를 찾아나섬으로 인해 발생할 전투력 상실을 막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구절에선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만 삼는 여성혐오.
왼손잡이가 사회생활이 불편하듯 이성애 부부 위주로 꾸며진 사회구조는 동성애 커플에 불편한 게 사실이다. 그런 핸디캡마저 극복하고 동성을 사랑하겠다는데 삐딱한 시선으로 봐선 곤란하다.
트랜스젠더 얘기로 시작해서 결론이 이렇게 나면, 결국 하리수-미키 정 부부는 동성결혼 관계란 뜻? 그러니까 하리수 씨는 여전히 남성이란 의미일까?
결국 이 기사는 신종 혐오발화 수법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