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것으로도

버지니아 울프는 자살하기 전 레너드 울프에게 사랑한다는 편지를 남겼다. 레너드가 버지니아에게 어떤 악덕을 행했는지와 별개로, 버지니아 울프의 편지엔 레너드 울프를 향한 사랑의 진심이 담겨있다. 그러니까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있음에도 버지니아 울프는 자살을 선택했다.

우울한 것도, 우울해서건 다른 이유에서건 자살하는 것도 무언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주변의 관심이 부족해서, 애정이 부족해서, 여유가 부족해서, 좋아하는 관심사가 없어서가 아니다. 그 모든 것이 있어도 우울증을 겪고 자살을 선택한다. 그러니까 이것은 소중한 관계망에 있는 누군가를 부정하는 행위도, 배신하는 행위도, 그 무엇도 아니다. 그냥 그런 것으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마음이란 게 있다. 그런 것으로도, 그 무엇으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태가 있다. ‘나’의 가치 판단에서 가장 완벽하게 행복한 상태에 있을 때에도 극심한 우울에 빠지고 죽음을 선택할 수도 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나는 150살까지는 살겠지만, 아니 그 전에 안락사를 선택하겠지만 지금은 그저 잘 살아내길 바랄 뿐이다.

불안

요즘 듣는 음악 목록을 확인하노라면 나는 10년도 더 전의 나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물론 새로운 곡이 몇 곡 추가되었지만 별로 변하지 않았다. 그때 내 이름을 루인이라고 정한 계기가 된 그 앨범과 또 다른 앨범 몇 장을 지금도 유일한 위로처럼 듣고 있다.

그때, 10년도 더 전에, 나는 지금보다 상태가 더 안 좋았다. 도움 받을 곳도, 이야기를 나눌 사람도 없어 나는 음악만 들으며 버텼다. 출근해서 일을 하고 퇴근하면 방에서 음악만 들었다. 미국 바퀴, 날아다니는 바퀴가 들어오는 좁은 방에서 나는 음악을 들으며 시간을 보냈다. 다른 건 하지 않았다. 출근은 어쨌거나 간신히 했지만 그 뿐이었다. 그리고 그때 나는 자살을 시도했다. 못이 헐렁해서 실패했다. 내가 자살을 부정하지 않는 이유, 부정할 수 없는 이유기도 하다. 종종 고민하기를 그때 못이 빠진 게 이후의 내 삶에 좋았던 일인지 아닌지 판단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그리고 지금 상태가 그때와 그닥 다르지 않다. 그래서 불안하다. 그때와 지금 나를 둘러싼 상황 자체는 많이 달라졌다.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소중한 사람이 몇 있으며 블로그도 생겼다. 아직 먹지는 않고 있지만 렉사프로도 있다. 그럼에도 나로선 달라지지 않았다고 느낀다. 괜찮을까… 어느 쪽이건 괜찮은 건지, 어느 쪽이 괜찮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괜찮을까.

잡담: 비염, 블로그의 의미

오늘 원고를 마무리하고 내일은 덕질을 하려 했으나 비염이 터졌다. 그것도 제대로 터져서 얼굴과 목 근육이 모두 아픈 수준이었고 결국 드러누웠다. 하루를 공쳤고 내일은 글을 써야 하고 추석에 부산 가기 전에 덕질을 한 번은 할 수 있을까 고민이다. 읽어야 하는 책, 읽고 싶은 책은 이번 주 정말 공쳤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아는 사람만 아는 블로그라 조용한 곳이고 그래서 편하다. 댓글이 많으면 그건 그것대로 즐겁겠지만 “댓글 많이 달아주세요!”라고 요청한다고 될 문제는 아니며, 내 블로깅은 댓글을 달기 무척 애매한 내용이란 말도 들었으니. 이런 내용과 상관없이 가끔 블로그가 더 무슨 의미일까란 고민(까지는 아니고 그냥 짦은 망상)을 한다. SNS 시대와 상관없는 고민이다. 10년 전 즈음인가, 나는 향기가 나지 않는 사람, 그래서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않는 사람으로 살고 싶어했다. 이런 소망은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고, 지금까지는 이런 나의 바람을 그럭저럭 잘 이뤄가고 있다고 믿는다. 극소수의 친밀한 사람을 제외하면 아는 사람이 별로 없으니까. 앞으로 새로운 친한 관계를 맺을 기회가 생기겠지만 많이 늘지는 않겠지. 그러니 돌연 내가 사라져도, 돌연 이 블로그가 사라져도 세상엔 아무 일 안 일어나며 그냥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흘러갈 것이다. 그럴 때 이 블로그는 나의 일기, 혹은 소박한 개인 기록이란 의미 외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물론 하고 싶은 말을 글로 푸는 습관이 붙어, 말은 못 하고 글로 쓰는 인간이라 이것만으로도 이 블로그는 내게 매우 중요하다. 내 안의 언어을 유일하게 표출할 수 있는 공간이니 무척 중요하다. 이 블로그가 사라져도 나는 곧 다시 어딘가에 새로운 블로그를 만들테니까. 하지만 이 블로그를 유지하는 게 무슨 의미일까? 답은 알고 있다. 아무 의미 없다. 이 블로그는 그냥 무의미하다. 지금 당장 닫아도 아무 일 안 생긴다. 그래서 내게 소중하다. 언제 닫아도 문제가 안 된다는 걸 알기 때문에 사용할 수 있다.
현재 상황에서 역대 가장 적은 수의 블로깅을 할 듯하다. 몇 년 전 128건의 글을 썼는데 올해는 그보다 더 적게 쓸 것 같다. 물론 작정하고 쓴다면 그보다는 많이 쓸 것 같지만 그냥 올해는 드문드문 쓰기로 했으니 그보다 적게 쓸 것 같다. 참고로 이 블로그를 처음 만든 2005년엔, 8월에 만들었음에도 가장 적은 블로깅이 아니었다. 그때는 꽤 많은 글을 썼다. 블로깅 수가 줄어든 게 석사논문 쓸 때였는데 그럼 내년엔 어떻게 될까… 하하…
(다시 확인하니 그때가 아니라 그 이후였… 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