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오름] 먹는다는 것은 외모를 해석하는 것, 젠더를 실천하는 것: 채식, 외모, 그리고 트랜스/젠더

인권오름 원고 세 번째~

오랜 시간 제 블로그에 오신 분이라면 익숙한 얘기예요. 흐. 인권오름 원고를 쓰겠다고 했을 때부터 저 혼자 의도한 것이기도 하고요. 다만 흩어져 있던 얘기를 좀 더 읽기 쉽게 다듬긴 했어요. ;;; 어떤 의미에선 완전 새 원고지만, 소재나 주장은 워낙 익숙하고 진부해서, 예전 원고 재활용한 것만 같은 기분이랄까요.. 아하하. ㅠ_ㅠ 사실 제가 쓰는 모든 원고가 제겐 워낙 진부한 내용이라 늘 걱정합니다. ‘아, 이 정도 논의는 이미 세상에 널리고 또 널렸는데… 이미 다 아는 얘기를 또 하는 건데 꼭 해야 할까?’라고. 흑흑흑.

암튼… 삽화가 참 발랄하게 들었가지만… 흠… 뭔가 상당히 복잡한 기분이 드네요.. 나쁘진 않지만 썩 유쾌한 기분도 아니랄까요..  -_-;; 흐흐.

“먹는다는 것은 외모를 해석하는 것, 젠더를 실천하는 것: 채식, 외모, 그리고 트랜스/젠더”
인권오름에서 읽기: http://goo.gl/56g2
웹페이지 버전으로 읽기: http://goo.gl/V9oO

그냥 여기서 읽기.. 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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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_그냥 여기서 읽기|닫기| *지난 번 글( http://goo.gl/fSPH )에 이어서 읽으면 편해요. 🙂

#삽화, 하나
단골로 가는 가게. 그곳에서 주로 먹는 메뉴를 주문할 때면 늘 마요네즈를 빼달라고 했다. 채식을 하며, 계란을 비롯한 유제품도 먹지 않기에 음식을 주문할 때마다 별도의 요청이 많다. 그 가게는 나름 단골이었고 직원은 내가 마요네즈를 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단골이었기에 친하다고 느낀 걸까? 음식을 포장하면서 직원이 내게 물었다. “남자 분이 다이어트 하는 것도 아니고 마요네즈는 왜 빼세요?”

#삽화, 둘
가끔 들러 밥을 먹는 식당. 나물 반찬이 잘 나오는 가게지만 계란 반찬이 꼭 딸려 나온다. 먹지 않는 반찬을 받는 건 낭비기에, 매번 거절한다. 역시 몇 번 갔더니 내가 익숙하다고 판단한 걸까? 주인은 “계란도 없고, 반찬이 없어 어떻게 한 대..”라고 걱정했다. 식탁엔 나물 반찬만도 상당했다. 빠진 것은 육식의 한 형태인 계란 뿐이었다. 계란이 빠진 나의 식탁은 반찬이 없는 것일까? 주인은 지나가는 말로 한 마디 더한다. “요즘 젊은이들은 계란을 잘 먹던데…”

음식을 섭취하는 일은 단순히 몸에 필요한 영양분을 섭취하는 행위가 아니다. 음식을 먹는다는 건, 내가 살고 있는 사회의 문화를 실천하는 일이다. 나의 경험에서 채식은 이 사회에 익숙하지 않은 실천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간섭한다. 혹자는 한국이 나물 반찬이 많기에 그나마 채식을 하기 편할 거라고 말한다. 물론 나물 반찬이 많긴 하다. 나물 반찬에 젓갈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과는 별도로, 나물 반찬이 많다고 해서 채식이 편한 건 아니다. 타인의 행동이 ‘나’와 다르면 간섭하고 훈수 둘 수 있고 때때로 교정해야 한다는 오지랖이 일상인 사회라, 채식을 비롯한 ‘다른’ 행동은 늘 피곤함과 고단함을 동반한다.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만약 내가 남성이 아니라 여성으로 보이는 외모였다면 어땠을까? 첫 번째 삽화의 점원은 내가 다이어트한다고 단정했을 가능성이 크다. 나의 실천은 채식이 아니라 다이어트로 치환된다. 다이어트가 여성에게 당연한 일이라고 여기는 사회에서 다이어트의 정치학은 부각되어도 채식의 정치학은 희석된다(이 두 정치학이 경합한다는 건 아니다). 두 번째 삽화의 주인이라면, 다이어트하냐고 물었을까? 적어도 “요즘 젊은이들은 계란을 잘 먹던데…”와 같은 말은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비슷하게, 음식을 배식하는 식당에서 여성의 밥과 남성의 밥의 양이 다를 때가 많다. 음식 섭취와 채식은 외모를 통해 해석하는 젠더에 따라 달라진다. 즉, 채식을 한다는 것,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한국 사회에서 요구하는 젠더 규범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고민한다. 트랜스젠더이며, 남성은 아니지만 남성으로 곧잘 통하는 나의 외모로 나는 늘 고민한다. 내가 만약 호르몬 투여를 상당 기간 진행해서, 여성으로 통하는 외모였거나 여성인지 남성인지 헷갈리는 외모였다면? 그랬다면 점원이나 가게 주인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사회는, 세상엔 여성과 남성만 존재한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트랜스젠더란 존재가 있긴 하지만, 일상에서 만날 순 없다고 여긴다. 트랜스젠더는 여전히 관계 맺기의 기본 토대가 아니다. 아울러 트랜스젠더라면 호르몬 투여를 하고 수술도 하여, 여성이나 남성으로 통하는데 별 문제가 없다고 여긴다. 즉, 의료적 조치를 ‘아직’ 안 했거나, 의료적 조치를 선택하지 않는 트랜스젠더를 상상하지 않는다. 만약 세상에 여성과 남성만 존재한다고 여기는 사회가 아니라서 상대의 외모로 젠더를 판단하지 않는 사회라면? 그런 세상에서 나의 행동은 어떤 다른 문화양식과 젠더 규범으로 해석될까? “남자 분이 다이어트 하는 것도 아니고 … “와 같은 말은 어떻게 변할까? 채식과 음식을 먹는 일은 젠더 규범을 실천하는 일이다. 그리고 상대의 음식 습관을 관찰하는 일은 상대의 외모를 관찰하는 일이다. 젠더 판단은 거의 언제나 관찰하는 이의 경험(상상력의 한계)에 바탕을 두고 상대의 외모로 결정된다. 결국 외모에 맞춰 개개인의 젠더를 단정하고, 이렇게 단정한 젠더에 맞춰 식습관을 달리 대한다는 점에서, 채식이나 음을 먹는 일은 내게 트랜스젠더 이슈기도 하다. 트랜스젠더 이슈는 어디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상대를 겉모습으로 피상적인 판단을 하며 “여성” 아니면 “남성”으로 단정하는 그 찰나는, 그 단정이 옳건 그르건, 트랜스젠더 이슈를 조우하는 찰나기도 하다.

그나저나 난 밥 먹다 말고 무슨 생각이 이리도 많담…_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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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 페이지 버전과 인권오름 버전은 딱 한 줄이 다릅니다. 상단에 건 링크가 빠졌는데, 인권오름에선 필자의 원고를 하단에 모아주니
필요가 없네요. 흐. ;;; 근데 이게 자동으로 모아주는 게 아니라 편집자가 수작업하는 거 같아요…
본문도 조금 다를까요? 일일이 확인하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는… 아하하. ;; 아무려나 판본이 다양하다는 건 재밌는 일이지요. 😛

글을 쓰고 싶은 바람이…

나는 글을 쓸 때면 늘 괴로워하지만, 글을 쓰고 있을 때도 글을 쓰고 싶다는 바람을 품는다. 내 몸에서 부는 바람. 글을 쓰고 싶다는 이 바람.

아는 사람은 아는 사실인데, 난 원고 청탁을 거절하지 않는다. 미리 차단하는 경우가 아니라면(올 12월까지 마감인 원고 안 받습니다ㅠ 그래봐야 원고를 청탁할 사람도 없겠지만… 크크. ;; 원고청탁을 자주 받는 건 아닌데, 꼭 특정 시기에 몰린달까.. 올해만 해도 상반기에 마감인 원고는 학회발표문이 전부였다), 원고청탁은 다 받는다. 그래서 지금처럼 원고 마감이 몰려 괴로워하면서도, 글을 쓸 수 있다는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한다. 글을 쓰는 것이 괴롭지만 기쁘기 때문이다.

반면, 강의 청탁은 좀 갈등한다. 강의나 특강을 하는 게 낯설기도 하거니와 영 어색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시간이 맞지 않는 경우를 제외하면 강의 청탁도 거절하지 않는다. 크크. ;;;

그럼 원고청탁과 강의청탁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당연히 원고청탁을 받을 거 같지만, 강의를 선택할 거 같다. 강의보다 원고에 더 애착이 가고, 원고를 쓰는데 품이 더 들고, 더 괴롭다. 반면 강의는 그냥 사고를 치고 만다. 크. ;; 아울러 강의는 수강생과 곧바로 소통할 수 있어 내가 더 많이 배운달까? 강의를 하고 나면 원고를 쓰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어 좋기도 하다. 그래서 강의가, 원고보다 더 하기 싫은 일이지만, 부담은 덜하달까. 하하;;

마감이 몰려 있어 몰아서 글을 쓰고 있다. 미칠 듯이 달린달까? 머리는 아프지만, 머리에 열이 나니, 예열하는 것만 같다. 예열해서 원고 아이디어가 떠오를 것만 같다.

원고를 몰아써서 좋은 점은, 각 원고마다 주제에 좀 더 집중할 수 있달까? 예전이라면 한 원고에 이런저런 얘기를 몰아 넣었다. 그래서 글이 좀 중구난방일 때가 많았다. 하지만 겹치는 시기에 써야 하는 비슷하지만 조금은 다른 주제의 원고 세 편(다섯 편인가..;;)을 쓰면서, 아이디어와 소재를 확실하게 분리하고 있다. 이건 이 글, 저건 저 글.. 이런 식으로. 글을 쓰면서 글쓰기를 배운다. 읽는 사람만 실험 대상이다. 흐흐.

암튼 이런 생활, 두 번은 안 하고 싶지만 언제 내가 원한다고 할 수 있고, 원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을 수 있던가? 이런 식으로라도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고 있으니, 이것도 복이다. 🙂

+
오늘 원고 하나의 초고를 완성하고 수정 작업을 하다가, 혼자 흥분했다. “오, 이건 최소한 향후 10년은 널리 인용될 글이야!!”라면서… 크크크.

글을 쓰거나 퇴고를 할 때면, 어느 순간 이렇게 미쳐선, 자뻑에 빠질 때가 있다. 자뻑에 빠지는 찰나가 있으니 글을 쓸 수 있는 것이겠지. 하지만 자뻑도 한 순간. 다음 퇴고 때면 자학의 연속이다. “이건, 너무 진부한 얘길텐데… 남들 다 아는 뻔한 얘기하는 거 같아.. 이건 논리도 없고 뭣도 없고 그냥 헛소리의 연속이야!! ㅠㅠ”라면서. 흑. 오늘 자뻑한 원고는 묵혔다가, 10월 말부터 다시 퇴고할 계획인데, 아마 그때 다시 읽으면 새로 쓰고 싶은 충동에 빠질 게 분명하다. 으하하.

결론: 오늘 자뻑한 원고는 내일 자학할 원고다.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