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아시아 지역의 트랜스젠더 여성과 남성은 건강에 곤란함을 겪는다.

#기사 출처: http://j.mp/bqdJy2
#보고서 다운로드: Neha Sood “Transgender People’s Access to Sexual Health and Rights” http://j.mp/bG6ZgI

제 목: 아시아 지역의 트랜스젠더 여성과 남성은 건강에 곤란함을 겪는다.
Transgender Men and Women Face Health Hurdles in Asia

by 로리 아델만 Lori Adelman on July 13, 2010 (옮김: 루인)

인도 델리에 바탕을 둔 페미니스트 활동가(아울러 IWHC Advocacy in Practice 졸업생) 네하 수드는 12개 아시아 국가에서 트랜스젠더의 성적 건강 서비스와 재생산 건강 서비스 접근권 관련 탁월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방대한 사실과 함께, 보고서는 공표된 정책 분석, 유용한 사례연구, 그리고 감동적인 1인칭 이야기를 제공한다. 그녀는 대륙을 가로지르며 모두를 위한 – 특히 트랜스젠더를 위해 – 건강권과 인권의 증진을 위한 강력한 사례를 작성한다.

The study was part of a monitoring project by IWHC colleague The Asian Pacific Resource and Research Center for Women (ARROW), which seeks to review and monitor progress towards the commitments made in the International Conference on Population and Development (ICPD) Program of Action (PoA).[번역 불가. 대충 ARROW의 프로젝트 일부란 소리;;] 아시아의 12개 국가 – 방글라데시, 인도, 네팔, 파키스탄, 중국, 캄보디아, 라오스, 태국, 베트남, 인도네시아, 필리핀, 그리고 말레이시아 – 에 초점을 맞춘 프로젝트는 법과 정책이 건강 및 권리에 끼치는 영향 및 트랜스젠더 공동체의 주변화 증가에 중요한 성찰을 제공한다.

보고서의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다:

– 트랜스젠더는 연구 지역 전체에 걸쳐, 폭력에 상당히 취약하다. “태국을 제외하면 연구에 포함된 국가의 어떤 법도 트랜스여성이 성폭력 피해를 겪을 수 있음을 인지하지 않는다 … 그리하여 [폭력적] 범죄에 직면하여 어떤 보호나 법적 의지를 제공하지 않는다”고 보고서는 기술한다.

-연구한 국가의 가족은 일반적으로 젠더 다양성과 성적 자유[sexual freedom, 성적지향의 자유?]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많은 트랜스젠더는 그들의 가족 그리고/혹은 공동체로부터 강압 그리고/혹은 폭력을 겪는다. 이것은 종종 부족한 지지 제도, 노숙, 그리고 빈곤을 초래할 수 있다. 보고서는 “가족에게 섹슈얼리티와 젠더 다양성을 교육하고, 내부의 다향성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고, 지지적이고 힘기르는 역할을 수행할 개입이 필요하다”고 적었다. 보고서는 또한 “트랜스젠더에게 부족한 사회적 지지를 제공하기 위해 가난한 트랜스젠더에게 저렴하거나 무료 주택을 제공한다면, 그들이 기술을 숙련하고 직장을 구할 수 있는 자원에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고 제안한다.

– 종종 LGBTQI 공동체 내에서도 트랜스젠더에 반대하는 차별이 일반적이다. “사회에서, 트랜스젠더는 성적 소수자로 보이지만, LGBTQI 운동에서 그들은 종종 낮은 지위에 있다고 여겨진다.” 이것을 넘어, 차별은 사회계급, 직업, 그리고 여성성에 바탕을 둔 트랜스젠더 공동체 내에서 발생한다. 예를 들어, 보고서는 트랜스젠더 성노동자가 트랜스젠더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에 의해 상당한 방법으로 차별을 겪는다고 기술한다.

– 종종 트랜스여성과 트랜스남성의 처우treatment에 차이가 있다. 보고서는 상술한다: “카트만두에서 온 Suman Tamang은 사람들이 트랜스여성[원문그대로]을 욕하고 경찰은 그들을 구타하고 길에서 그들을 연행하는 동안, 네팔에서 트랜스남성[원문그대로]은 같은 종류의 사회적 조롱과 경찰 폭력을 겪지 않는다고 말했다.” 보고서는 “복수성을 위한 존중을 증진하기 위해, 남성성과 여성성 담론을 더욱 발달시켜야 한다”고 제안한다.

– 보건 직원 사이에, 젠더, 섹슈얼리티, HIV를 포함한 건강 관련 이슈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 그리하여 “HIV 감염인과 AIDS 감염인[트랜스젠더 포함]이 적합한 치료와 적절한 의료에 접근하는 것을 보장하도록 정부는 을 법을 제정해야 한다.”

– 실질적인 변화를 이루기 위해, 정책과 함께 태도도 변해야 한다. 보고서는 “교사 훈련 후 학교에서 개발하고 가르치기 위한 포괄적인 섹슈얼리티 교육 커리큘럼, 섹슈얼리티, 젠더 다양성 그리고 젠더 평등에 대한 정보를 포함하는 커리큘럼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보고서의 중요한 결론은 명확하다: 젠더와 섹슈얼리티에 관련 있는 진보적인 법과 정책이 주변부 공동체에 힘을 줄 수 있고, 낙인, 차별 그리고 폭력을 줄일 수 있고, 재생산 및 성 건강sexual health 서비스 뿐만 아니라 핵심적인 정보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 구성적 사회 참여를 용이하게 한다. 이것과 보고서의 나머지 발견은 공공 건강 분야의 차별에 관한 정책 입안자와 법안 제정자의 각성을 요구할 뿐 아니라 지지그룹을 위한 자료로 활용된다.

퀴어함, 고단함, 그리고 삶

흐리고 비가 올 것만 같은 날씨, 집으로 돌아가는 길, 어느 토요일 오후.

어느 가게에서 호르몬투여를 시작한지 얼마 안 된 mtf가 간단한 장을 보고 나왔다. 호르몬 효과로 체격이 좀 변했고 얼굴은 곡선형으로 바뀌었다. 수줍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물론 그가 트랜스젠더인지 아닌지는 확신할 수 없다. 내가 mtf 트랜스젠더라고 분류하는 유형에 어느 정도 들어맞아 mtf라고 해석했을 뿐이다. 그는 트랜스여성이 아니라 비트랜스여성일 수도 있다. 비트랜스여성이라고 해서 몸의 형태가 유사한 건 아니다. 때로 비트랜스여성 간의 신체 차이가 트랜스여성과 비트랜스여성 간의 신체 차이보다 더 클 수도 있다. 그러니 그가 mtf 트랜스젠더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그저 그의 몸이, mtf로 통하고, 이태원이란 공간에선 여성으로 통한다는 점이 조금 부러웠다.

나의 욕 나오는 몸은, 언제나 내게 골칫거리다.

얼추 한 달 전. 외국에서 온 누군가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그는 내가 호르몬투여를 비롯한 어떤 의료적 조치를 하지 않는 이유가 정치적인 효과를 위해서냐고 물었다. 그렇진 않다고, 내가 무얼 바라는 건지 결정하지 않았으며 지금 상태가 문제가 덜 되기에 의료적조치를 취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그는 다시, 나의 행동이 정치적인 행동과 효과를 위해서냐고 물었다.

1990년대 이후, 미국에선 트랜스젠더 운동과 이론이 활발하다. 아울러 퀴어운동이 급부상하며서 트랜스젠더는 때로 퀴어의 대표적인 상징으로, 때론 퀴어가 아니라 기존의 규범을 강화하는 존재로 불리며 상당한 논쟁을 유발했다. 이 과정에서 몇몇 트랜스젠더/트랜스섹슈얼 활동가는 자신의 성전환과 호르몬투여를 정치적인 행동, 퀴어함의 상징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여성으로도, 남성으로도 통하지 않는 몸이 다른 사람에게 혼란을 주는 효과를 긍정했고 이를 적극적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의료적 조치를 취하지 않은 mtf는, 자신의 몸이 남성으로 보이지만 자신의 젠더범주는 여성이라고 설명하며 젠더범주와 그에 적합한 몸의 형태 간의 관계에 균열을 냈다. 일상에서 여성으로 통하는 mtf는 자신이 m(남성)의 역사와 흔적이 있는 여성이라고 말함으로써 역시나 범주와 몸의 관계에 파열음을 냈다. 비록 트랜스젠더의 몸은 가시성을 획득하는 순간 그 자체가 운동이지만, 그것이 썩 유쾌한 일은 아니다.

나는 나의 몸이 일으키는 혼란과 헷갈림을 좋아한다. 그래서 이런 헷갈림을 즐기고 적극 활용한다. 그렇다고 마냥 즐거운 건 아니다.

나를 인터뷰한 이가 “당신의 행동이 정치적인 효과를 위해서냐?”고 반복해서 물었을 때, 불쾌했다. 그의 쿨함때문에? 글쎄. 어쩌면 글 몇 편 읽고, 그것도 트랜스젠더 몸의 정치적 효과에 관한 글 몇 편 읽고 질문하는 느낌이라 불쾌했는지도 모른다. 혹은 활동가의 삶과 행동을 모두 “정치”적인 행동으로만 수렴하는 태도가 불쾌했는지도 모른다. 내 몸에서 발생하는 정치적 효과가 어떤 것이냐고 물었다면 나는 신나게 얘기했으리라. 하지만 그는 내가 활동가이니 “정치”적인 효과를 위해 의료적 조치를 취하지 않은 거라고 어느 정도 확신하고 질문했다.

난 퀴어한 쾌락, 혼란과 헷갈림을 유발하는 행동을 좋아하지만 내가 정말 살피고 싶은 건, 그런 행동에서 언뜻언뜻, 때로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고단함이다. 내 몸으로 인해 발생하는 혼란과 논쟁이 너무 좋지만, 그래서 그걸 즐기지만, 즐기는 만큼이나 고단하다. 난 내 몸이 미학적으론 최악이라고 판단하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싫어하진 않는다. 그저 늘 짜증날 뿐이다. 내 몸은 타인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에게 많은 불편을 초래하고, 이런 몸이자 이런 몸에서 살아가는 삶은 늘 고단하다. 그래서 난 퀴어의 쾌락이나 즐거움이 아니라 고단함에 더 끌린다.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퀴어/트랜스젠더로서의 어려움, 힘든 삶을 말하는 게 아니다. 언론에서 기사로 팔기 위해 요청하는 그런 고통의 전시를 말하는 게 아니다. 쾌락과 함께 오는 고단함이 나의 관심이다. 그래서 더 어렵다. 때로 난 나의 고단함만으로 버거운데 종종 타인의 고단함도 살피다보면 타인의 고단함을 나의 수준으로 수렴하거나, 타인의 고단함이 피곤하여 도망친다. 그래서 또 한 번, 고단하다.

어느날 의료적 조치를 취한다면 나는 덜 고단할까? 글쎄… 내가 만약 의료적 조치를 시작한다면, 그저 괴물이 되기 위해서다. 지금보다 더, 사람들이 종잡을 수 없는 그런 몸으로 바꾸기 위해 호르몬 투여를 시작할 것이다. 지금은 이런 판단을 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사람들이 헷갈려하는 반응에 깔깔 웃으면서 더 많은 고단함을 느끼리라. 내 삶은 더 피곤해지리라.

나는 어떻게 살까? 내 몸은 앞으로 어떻게 변할까?

그리고 내가 mtf라고 추정한 이는 어떤 삶을 살까? 내가 행여 의료적조치를 취한다고 해도, 선택한 배경이 다르니 끝내 서로의 고단함을 ‘이해’할 수 없겠지만, 그는 어떻게 살아갈까?

에잇.. (뜬금없이) 올해는 연애를 할까보다. 하지만… 연애란 게 하겠다고 할 수 있는 건 아닌 법. 😛

채식 단상: 생명과 윤리 이슈 – 질문만 던지기

얼마 전, 가슴 아픈 일이 있었다. 자세히는 언급하지 않으리라. 동거묘가 있는 입장에선, 행여라도 냥이가 외출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겠다고 중얼거렸다. 물론 동거묘가 잠깐 외출한 사이에 사건이 발생하는 일은 빈번하니 이번 일이 특별한 건 아니다. 이번 일로 유난스레 조심해야겠다고 다짐하지도 않았다. 그저 이와 같은 사건이 특별할 게 없음을 새삼스레 깨달았을 뿐이다. 그래서 더 조심해야겠다고 다짐했을 뿐이다.
 
다른 많은 사건처럼 그 사건도 여성혐오를 동반했다. 많은 이들이 가해자로 가정하는 이를 비난했다. 이런 비난의 언설이 불편하여, 그 사건을 외면했다. 아울러 그렇게 비난하는 이들의 불안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렇게 비난하는 행위를 통해 얻고자/보상받고자 하는 것이 무엇(윤리? 권력? 규범적 지위? 욕설 자체? 도대체 무엇?)인지 궁금했다.
 
일각에선 채식-육식 논쟁이 벌어졌다. 모두가 예상할 수 있는 방향으로 이야기가 흘러갔다. 동물학대와 육식행위가 별로 다르지 않다는 논쟁은 어김없이 그럼 식물을 먹는 행위는 정당하냐는 질문으로 이어졌다. 동물학대와 육식의 연관성을 지적하는 언설에, 그럼 식물은 생명이 아니냐는 반론은 잊히지 않고 등장한다. 이 반론은 채식이 정치적 행위로 이해되기 시작한 그때부터, 음식을 먹는 행위가 더 이상 정치적이지 않을 때까지 반복하리라(즉,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듯).
 
비록 이런 반론의 일부는 혐오발화에 가깝지만, 나 역시 가끔은 묻고 싶다. 동물학대와 육식행위가 무관하지는 않겠지만 둘을 동일시해도 괜찮은걸까? 둘은 정말 대응관계에 있는 걸까? 채식하는 사람도 동물을 학대한다는 식으로 말하려는 게 아니다. 동물학대와 육식행위를 동일시할 때 놓치는 부분, 동물학대와 육식행위를 동일시하며 그 대안으로 채식을 얘기할 때 놓치는 부분이 있다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 (왜 채식이 대안이어야 할까? 난 잘 모르겠다.)
 
채식을 하는 이들 중 일부는 채식이 윤리적으로 정당하다고 얘기하며 채식행위와 육식행위에 윤리적인 위계(이른바 생명윤리)를 부여한다. 채식이 윤리적으로 정당하다는 것. (최근에 와선 이런 주장을 자중하는 분위기지만..) 하지만 이런 윤리는 늘 동물이라고 불리는 범주의 생명과 식물이라고 불리는 범주의 생명을 구분하고, 둘 사이에 우열관계를 만든다. 이 우열관계에서 죽어도 괜찮은 생명과 죽으면 안 되는 생명이 정해진다. 하지만 누가 이 둘의 위계관계를 정할 수 있는 걸까? 누구의 편의일까? 나를 비롯한 모든 판단은 결국 인간이 기준이라는 점에서 인간중심이라고 비판하는 게 아니다. 인간중심이 아닌 것이 어디있으랴. 그저 채식에 윤리적 우위를 부여하는 이들에게 육식이 문제인 것처럼, 동물-식물의 생명위계를 가정하는 언설 역시 논쟁적이라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이렇게 위계를 설정하겠다면, 생명윤리에서 식물의 생명을 하위에 둘 수 있는 근거를 ‘설득력’있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설득력이란 게 매우 논쟁적인 영역이라, 실현할 수 없는 영역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런 요청을 하고 싶다.
 
그리고 남은 질문에 나는 언젠가 어떤 모색을 하고 싶다. 지금은 나도 잘 모르겠다. 그저 동물학대-육식행위-채식행위의 관계를 좀 다른 방식으로 고민 해야한다는 고민만 있을 뿐. 뭐, 누군가 울림을 주는 그런 글을 쓰거나 이미 관련 글이 있어 추천해준다면 너무 고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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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콩단백이란 글과 같은 날 썼다. 그런데 이제야 공개하는 건, 내용이 부담스러워서가 아니라 까먹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