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강, 글, 아이디어

지난 금요일 특강을 했습니다. 메일로 요청 받기는 참 오랜 만이랄까요. 몇 해 전만 해도 트랜스젠더 관련 특강 요청 연락이 가끔은 왔습니다. 그게 2006년부터 2007년 정도. 그땐 한국사회에서 트랜스젠더 이슈가 유난히 유행했죠. 새로운 이슈는 늘 많은 사람들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지만, 이런 관심이 유지되는 기간은 매우 짧습니다. 관심이 시든 시기가 되면, 이제 관련 이슈에 관심이 있고 고민하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간신히 명맥을 유지합니다. 트랜스젠더 이슈만을 특별히 지칭하는 건 아닙니다. 소중한 너무 많은 이슈들이 단발성의 화제로 끝나고, 관련 이슈에 천착하는 이들은 늘 생계를 고민해야 한다는 점이 걱정일 뿐입니다.

암튼 지난 금요일 진행한 강의는 지금까지 경험한 강의 중 가장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강의를 하는 제가 재밌었달까요. 사실 걱정이 많았습니다. 강의를 요청한 곳이 워낙 수준이 높은 집단이라 어떤 얘기를 어떻게 해야 할지 가늠하기 힘들어서요. 아울러 어떤 소재를 해석하며 풀어갈지가 고민이었습니다. 하고 싶은 얘기는 있지만, 그것을 풀어가는 소재를 찾기가 쉽지 않아서요.

소재를 걱정하고 있는데, 그날 아침 트랜스젠더로 불린 한 사람의 피살된 사건이 뉴스에 나왔습니다. http://goo.gl/mJRb 여자인 줄 알고 좋아했는데 여관에서 알고 보니 남자라 격분해서 살해했다고 했고, 언론은 이를 트랜스젠더 살해 사건으로 제목을 뽑았습니다. 첨엔 저도 트랜스젠더 혐오 사건으로 간과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상합니다. 고인도 자신을 트랜스젠더라고 얘기했을까요? 이 간단한 질문에 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트랜스젠더란 범주를 어떤 맥락에서 부여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여성처럼 보이는데 알고 보니 남자라서 트랜스젠더라고 부른 것이라면 매우 위험합니다. 아울러 살해한 이유를 단순하게 상대가 트랜스젠더여서라고 단언할 수도 없습니다. 가해자의 진술을 100%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전 바로 이 사건을 통해, 강의 주제로 연결하면 좋겠다고 판단했습니다. (트위터 만세!) 관련 사건과 논쟁 몇 가지를 엮어 얘기를 풀어갔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사람들의 반응이 좋았고, 걱정보다는 얘기가 풀렸습니다. 어쩌면 이제야 비로소 저도 제 말하기 방식에 적응한 것일까요? .. 아하하;;

한 가지 더 기쁜 건, 강의를 진행하면서 6월 중에 있을 발표글의 초안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5월 마지막 날까지 원고를 넘겨야 하는데, 고백하건데 아직까지 초안도 못 잡고 있습니다. 하고 싶은 얘기는 있는데 어떤 식으로 풀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강의를 진행하면서 대충의 틀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이제 쓰는 일만 남았는데.. 쉽지 않네요. 하하..

아무려나 글을 쓰기 전에 강의를 할 일이 있을 때보다 좋은 경우는 없습니다. 강의를 통해 막연한 아이디어나 원고 초안을 정리할 수 있으니까요.
(글이 읽을 만하면 발표 뒤에 이곳에 공개할게요. 흐.)

강의가 끝난 후 돌아오는 길도 즐거웠습니다. 강의 가기 전에도 즐거운 시간을 보냈으니, 지난 금요일은 즐거움이 가득한 하루였나 봅니다.

+
이곳을 폐쇄할까 하는 고민을 했습니다. 두 가지 방안이 있었습니다. 글은 구글독스를 통해 공개하고 소통은 트위터로 하는 방법, 혹은 아예 계정을 옮기는 방법. 하지만 관두기로 했습니다. 이곳은 이곳 만의 존재 이유가 있으니까요.

근황: 집.. 고양이.. 논문

01
오랜 만에 집에 앉아 글을 읽고 있다. 글을 읽는 곳은 계속 바뀐다. 동거묘가 나를 부르는 곳, 동거묘가 드러누워 잠을 자는 곳이 내가 머무는 곳이다. 마루에서 싱크대에 기대 글을 읽다가 동거묘가 방으로 들어가 사료를 먹기 시작하면 나는 따라 간다. 동거묘가 나를 부르기도 한다. 냐옹, 하고 부르면 나는 가야 한다. 그럼 동거묘가 밥을 먹는 동안 나는 그 옆에 앉아 글을 읽는다. 그러다 다시 마루로 가서 아깽이를 돌보기 시작하면, 나는 또 그 옆에 앉아 글을 읽는다.

동거묘가 들어오고 아가들이 태어나고 무사히 자라기까지… 얼추 80일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내가 사는 방에 고양이가 들어온지 80일 정도가 지나자, 이제야 비로소 책과 논문을 조금씩 읽을 수 있다. 초기엔 논문을 읽기 위해 외출했다. 고양이와 사는 일에 워낙 처음이라 적응을 못 했다. 논문을 읽기 위해선 밖으로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동거묘와의 생활에 적응할 즈음, 아가들이 태어났다. 다시 적응해야 했다. 아가들을 돌보는 동거묘의 생활에 나를 맞추기 시작했다. 다시 이 생활에 적응할 즈음, 이젠 아가들이 우다다 달리기 시작했다. 배변을 못 가리고 모든 물건에 호기심을 보여 정신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 맞물려 나는 알바와 다른 일로 정신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또 흘렀다.

얼추 80일 정도의 시간이 흘러, 말도 안 되는 세계일주를 할 시간이 흐르자 비로소 나는 여유가 생겼다. 아가들이 자고, 그 옆에 엄마냥이 자고, 난 그 옆에 앉는다. 다들 자는 모습에 덩달아 자기도 하고, 논문도 읽으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토요일. 이제야 비로소 집에 앉아 논문을 읽을 수 있다. 사실 어제 밤에만 해도 밖으로 나갈까, 고민했다. 망설였다. 불필요한 소비라 망설였다. 그러다 시도하기로 했다. 가능하다.

02
뭔가 일자리를 구할 거 같은데 좀 재밌는 일이 생겼다. 확정되면 나중에 자세히..

03
석사논문을 겸사겸사 읽고 있다. 심사후 수정판이 아니라 심사를 위한 제출판으로. 논문을 읽으며, 손발이 오그라든다. 어떻게 이 논문을 통과시켜 줄 생각을 했는지 이해가 안 갈 지경이다. 정말 조잡하다. 각 장별로 나눠서 별도의 글이라면 읽을 만하다. 하지만 하나의 논문, 한 권의 책이라면 정말 아니다. 그래도 이렇게 확인하니 나쁘진 않다.

04
행사 일주일을 앞두고 강연청탁이 왔다. 행사 일주일 앞두고 청탁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지만 덥썩 물었다. 그런데 왜 그 이후로 연락이 없지??

05
아무려나 집에 앉아 논문을 읽으니 참 좋다. 주제도 6월에 있을 발표 내용에 맞는 거라 다행이고.

공부

오랜 만에 선생님을 만났다. 갱년기를 겪고 있는 선생님이 걱정이지만, 역시나 선생님을 만나고 나면 소소한 일상만 주고 받아도, 공부하고 싶은 욕망이 솟아오른다. 정말 그렇다.

요즘 알바를 구하며 가장 속상한 부분은, 공부를 하고 싶은데 알바를 구하고 생계유지를 위해 공부를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는 거다. 그래서 너무 속상했다. 공부하려고, 아가들 먹여 살리려고 돈을 벌어야 하는데 돈을 벌고 있노라면 공부를 할 시간이 안 난다. 절대 시간의 부족. 그래서 너무 속상했다. 최근 알바 하나를 구할 뻔 했는데, 결국 거절한 이유는 상당히 다양하다. MB의 본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공간이고, 활동 시간이 너무 많이 뺏기기도 했거니와 무엇보다 공부할 시간이 없었다. 그 일을 해서 저축을 적당히 하면 향후 2~3년간 생계비 걱정 없이 활동도 하고 공부도 할 수 있다면 하겠다. 하지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결국 포기했다.

그런데도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포기할 수 없었다. 결국 생계비가 걸린 문제니까. 그래서 여러 사람에게 상의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고. 다들 생계가 걸려 있으니 어쩔 수 없지 않겠느냐고 위로했지만, 다들 비슷한 고민이었으리라. 활동만 신나게 하는 방법은 없을까, 공부만 신나게 하는 방법은 없을까? 다들 이런 고민을 하고 있겠지.

아무려나 이런 요즘 상황에서, 읽고 싶은 논문이 잔뜩 있고 특정 주제로 읽고 싶은 논문도 여럿 있는데 이게 왜 이렇게 어려운 일일까를 고민하는 하루였습니다.

뭐, 이런 고민이 하루 이틀은 아니지만요…

암튼 오랜 만에 선생님을 만난 건 정말 즐거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