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시간 웹, 참고문헌표기법도 변할까? 책을 쓰고 읽는 방식도 변할까?

책방에서 새로 들어온 책을 확인하다가 어느 책에서 흥미로운 부분을 봤다. 책 주제와 관련 있는 내용을 소개하기 위해 위키피디아에 올라와 있는 것을 번역한 것인데, 출처를 위키피디아라고만 표시했다. 근데 이렇게만 표시해도 될까?

학술논문에서 참고문헌을 인용할 때, 전통적인 출판물인 종이인쇄본은 보통 출간년도만 표시한다. 그것이 1월에 출간했건, 12월에 출간했건 2010년에 출간했다면 둘 다 2010년 출판물이다. 이건 종이출판물이 1년 안에 수정출판이 힘들었던 역사를 반영하는 것일 듯하다. 특히나 학술서적의 경우, 출간한 그해 2쇄나 3쇄를 찍는 경우가 드무니 더욱 그러할 것이다. 즉, 출판물의 유통속도는 년 단위였을 듯. 물론 아이디어 경쟁에선 하루 이틀이 중요한 의미가 있지만, 그래서 서로 자기가 먼저 발견했다고 옹졸하게 싸우기도 했지만, 통상의 인용에선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1990년대 들어, 특히 2000년대 들어 웹출판물, 온라인출판물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면서 참고문헌 작성에 웹출판물을 표시하는 방법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중요한 특징은 웹출판물은 출간년도 뿐만 아니라 내가 그 자료에 접근한 날짜를 표시하도록 한다(MLA의 경우). 웹출판물의 경우, 종이인쇄물보다 수정이 용이해서 해당 자료에 접근한 날짜가 중요하다. 예를 들면 2010년 7월 5일에 관리자가 해당 자료를 수정했다면, 7월 4일에 접근했는지, 7월 6일에 접근했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내용일 수도 있다. 위키 역시, 이 부분이 중요하다. 언제 접근한 자료를 번역했는가는, 다양한 사람이 수시로 수정할 수 있는 위키의 특성상 매우 중요한 이슈다.

하지만 실시간 웹이라고 불리는 오늘날, 트위터 시간으로 서너 시간 전이면 이미 까마득한 옛날 같은 이 시대에 날짜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나 웹으로 실시간 협업이 가능하고, 수시로 문서수정이 가능한 상황에선 더 그럴 것이다. 위키의 경우도, 접근한 날짜 정도로는 충분하지 않다. 몇 시 몇 분에 접근했느냐에 따라 정보의 내용은 매우 다를 수 있다. 따라서 온라인출판물의 경우, 참고문헌으로 인용할 때 해당 자료에 접근한 시간을 2010년 10월 27일 16시 21분(2010.10.27.16:21)이라고 표시하는 시대가 오지 않을까? 아니, 분 정도로는 충분하지 않고, 초까지 표기해야 하는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내가 사용하는 참고문헌 표기법인 MLA라면 다음 판본에서 이렇게 바뀔지도 모른다. 이제는 세세한 시간이 중요한 상황이니까. 이를 위해 웹브라우저는 해당 사이트에 접근한 시간을 초단위로 기록하고 알려주는 기능을 기본으로 포함할 수도 있고.

모든 사람이 트위터와 같은 실시간 웹에 참여하는 건 아니지만, 이제 새로운 정보와 문서는 실시간으로 유통되는 시대가 오는 걸까? 광고수익을 위해 구글이 전세계에 무선인터넷을 무료공급하고, 컴퓨터를 최대한 싸게 공급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실시간웹에 참여하고, 어떤 정보를 얻기 위해 책이 출간되기까지 몇 년의 시간을 기다릴 필요도 없이 실시간으로 얻을 수 있게 된다면… 책 한 권을 쓰는 것도 실시간으로 이루어질까? 트위터나 구글웨이브 같은 도구를 이용해서 책을 쓰고, 독자는 실시간으로 그 책을 읽고. 실시간으로 오류를 수정하고. 그렇게 쓴 책은 펭귄북의 디지털서적 데모 영상처럼( http://goo.gl/C1QK 꼭 한 번 보시길. ) 그렇게 출간될까?

앞으로 읽는다는 행위는 무얼 의미하게 될까?

가네시로 카즈키와 낭만적 연애

어제 신분과 계급을 뛰어 넘는 사랑이야기의 계급질서 유지 효과 관련 트윗을 @junuak와 잠깐 주고 받았다. 그러다 며칠 전 가네시로 카즈키의 책 두 권, [레벌루션 No.3]와 [연애소설]을 읽으며 가진 어떤 의구심을 어느 정도 풀 수 있었달까.

가네시로는 재일한국인 경험을 주로 쓰는 작가로 알고 있었다. 이런 편견으로 읽은 책 두 권은 다소 낯선 느낌이었다. 재일한국인이 등장하고, 차별과 울분을 표현하고 있긴 하지만 그것이 주는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가네시로 자신이 밝혔듯 재일한국인 20대에게 가장 중요한 건 민족의 소속이 아니라 연애라고 했던가. 이 말처럼, 두 소설은 모두 연애소설이다. 그 자신은 [레볼루션 No.3]는 모험담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연애소설의 모험담 버전에 가깝다.

흥미로웠던 점은, 이성애 관계를 설명할 때 화자는 애인에게 막노동을 한달 내내해서 반지를 사줄께,라거나 필요하면 언제든 달려갈게,와 같은 이성애 규범의 남성판타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부분이다. 물론 [레벌루션 No.3]와 [연애소설]의 이성애 관계는 상당히 다른 면이 있다. [레벌루션 No.3]에서 화자는 동성(으로 여겨지는) 친구에게 안기고 싶다는 표현을 빈번하게 한다. 집단문화마다 의미가 다르긴 하지만, 동성(으로 여겨지는) 친구들끼리 사랑한다는 말도 심심찮게 하고. 그러면서도 규범적인 이성애 욕망을 충실하게 실천한다. 그래서 [레벌루션 No.3]의 화자가 말하는 이성애는 분명 규범적인 형태의 이성애지만 이성애관계라고 말하기엔 애매한 부분이 있다. 반면 [연애소설]에서 화자는 신분과 계급, 시간을 뛰어 넘는, 마치 죽음을 걸고 이루는 이성애 연애란 환상을 갈구하는 느낌이다. [연애소설]에 실린 세 편의 작품 모두, 역경을 이겨낸 이성애사랑을 다루고 있달까. 그래서 두 작품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싶기도 하다. 아무래도 내겐 [레벌루션 No.3]와 같은 방식이 흥미로우니까. 아무려나, 이런 차이에도 이성애 규범에 대한 남성판타지를 표현하고 있는데.

아무려나 이 두 권을 읽으며 흥미로운 부분은 과거의 사랑을, ‘역경을 이겨내고 이룬 사랑’으로 묘사하는 점이다. 마치 과거의 사랑은 어떤 역경을 이겨낸 사랑이라면 현재의 사랑은 그렇지 않다는 듯. 저자는 과거의 사랑처럼 죽음, 신분과 계급 차이와 같은 어떤 어려움을 이겨내며 사랑을 이루는 그런 관계를 이루고 싶다는 듯.

@junuak의 지적처럼, 이건 분명 신자유주의의 기획이고, 계급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한 방편이다. 과거엔 신분, 지금은 재력과 출신학교가 계급인 사회에서, 각 집단을 분명하게 구분하고 결코 섞이지 않도록 하려는 기획. 과거의 사랑 전설을 통해, 현재의 어려움이야 의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는 지독한 희망고문.

근데 과거엔 정말 신분 혹은 다른 어떤 어려움을 극복하는, ‘(무려)뛰어 넘는’ 그런 사랑이 있긴 했을까? 어쩌면 과거엔 이런 사랑이 있었다는 것 자체가 현대의 신화가 아닐까? 과거엔 그런 사랑이 있었다는 환상 자체를 제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혹시 관련 논의를 다룬 글이 있으려나요? 아신다면 추천 부탁…)

뭐, 이런 의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어떤 행복을 찾고 있는 걸까?

어떤 분과 문자를 주고 받은 후,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라는 내용을 마지막으로 보냈다. 그런데 나는 이 구절에 행복해지는커녕 조금은 우울했다. 운동을 하건, 공부를 하건, 뭘 하건 결국은 행복이다. 관건은 어떤 행복을 어떻게 추구할 것인가겠지. 어떤 사람은 행복이란 단어 대신 꿈을 사용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성공을, 어떤 사람은 많은 돈을, 또 어떤 사람은… 각자가 다르겠지만, 나는 여기에 ‘행복’이라는, 다소 철없게 느껴질 수도 있는 단어를 사용한다. 그런데 나는 내가 어떤 행복을 추구하는지 알고 있다고 믿었는데, 사실은 모른다는 것을…

아침, 아니 오전에 라디오에서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직장을 그만둔 사람이 나왔다. 그는 한동안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유예하고 살았다고 한다. 그러다 하고 싶은 일을 하려고, 회사를 쉬었다가 결국엔 그만두는 과정을 거쳤다고 한다. 예전이라면 나는 ‘난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 다른 가능성은 모두 없는 것처럼 살고 있어, 훗’ 했을 거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철없는 거 같은 삶이지만 내겐 내가 바라는 행복을 추구하고 있는 삶이니까. 재정적으론 풍요롭진 않지만 행복이란 측면에선 풍요로우니까.

그런데 오늘 아침 그 라디오를 듣다가, 문득 내가 어떤 행복을 추구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걸 깨달았다. 사실 이런 기분에 빠져 산 게 얼추 1년이 넘은 듯하다. 1년 동안,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 걸까, 내가 원하는 삶은 어떤 모습인 걸까 고민하는 나날.

명확하게 밝힐 수는 없지만, 사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있긴 하다. 무려 초등학교 시절부터 품었던 어떤 꿈. 나는 그 꿈을 이뤄보려고 이런 저런 노력을 하기도 했고, 우회하기도 했다. 우회적으로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애쓰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늘 끈기가 없었고, 시도하다 멈추고, 시도하다 멈추기를 반복했다.

물론 그 일만이 내가 하고 싶은 유일한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매순간의 욕망에 충실하며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았다. 지금 하고 있는 일 대부분 역시 내가 하고 싶은 일이다. 언제나 “생계가 위태로워ㅠ”라며 징징거리지만, 그래도 현재 삶과 생활방식이 불만인 건 아니다. 하지만 그래서 나는 지금 행복할까? 아니, 나는 도대체 어떤 행복을 추구한 걸까? 아님, 지금까지 추구했고 그래서 나를 행복하게 한 행복의 의미가 이제는 바뀐 걸까? 아님 나태해서 여전히 유효한 행복에 충실하지 않아 이런 걸까?

정말 난 어떤 행복을 추구하며 살고 있는 걸까? 내가 살고 싶은 행복은 어떤 얼굴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