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채식을 채식주의라고 말하는 경향이 있다. 적어도 나와 마주치는 사람들 중 일부는, 내가 채식을 한다는 걸 알고 나면, “채식하세요?”라고 묻기보다는 “채식주의자세요?”라고 묻는다. “주의자ist”라는 무거운 접미사를 사용하는 채식주의자라는 표현이 그렇게 낯설지는 않다. 주의ism란 부담스러운 접미사를 곧이곧대로 해석해서, 채식을 하나의 사고방식으로, 세상을 해석하는 세계관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채식주의에 반드시 채식이라는 행위가 필요한 걸까? 채식을 해야만 채식주의를 할 수 있는 것일까?
물론 채식을 하는 사람에게 “채식주의자세요?”라고 묻는 건, 채식을 하는 사람은 어떤 계기와 정치적 신념 같은 게 반드시 있다는 선입견 때문일 터. 여기서 선입견이란 말이 반드시 부정적인 늬앙스는 아니다. 그저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채식이 소비되고 유통되는 어떤 방식이 있음을 알려주는 표현일 뿐. 채식은 어떤 신념에 바탕을 두고 이루어진다는 통념은 채식과 채식주의ism을 동일시한다. 하지만 이 둘이 반드시 일치할 필요가 있을까?
언젠가 이곳 [Run To 루인]에서 “육식하는 채식주의자vegan”란 상상력으로 채식을 고민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표현했을 때(http://goo.gl/amhT 심심하면 http://goo.gl/q2zP 도;; ), 나는 동물과 식물이란 구분 자체를 문제제기하고 싶었다. 그리고 무려 3년이 지난 지금이라고 이와 관련해서 고민을 더 진전한 건 아니다. 채식은 내게 그냥 습관일 뿐, 채식이 매우 분명한 정치학으로 내 삶에 등장하는 일은 드물다. 그래서 나는 내가 채식을 한다는 사실 자체를 잊어버리곤 한다. 적어도 혼자 다닐 때, 나는 채식을 하는 사람이기보다는 그냥 안 먹는 게 많은 사람일 뿐이다. 농반진반으로 나는 편식주의자일 뿐이라고, 정치적으로 편식한다고 말하면서. 하하.
그렇다고 “육식하는 채식주의자”라는 구절을 놓치고 사는 건 아니다. 고민하지 않을 뿐, 이것은 나의 몇 가지 화두 중 하나다. 그리고 지금 다시 든 고민은, 채식과 채식주의가 반드시 일치해야 할까? 그러니까 요즘 들어 나의 고민은 채식이라는 어떤 행위와 채식주의라는 어떤 인식론을 구분할 수 있다면(한시적으로 구분할 필요가 있는데), ‘채식을 하지 않는다고 채식주의자로 자처하지 못 할 이유는 뭔가?’다. 이런 고민은 몇 해 전에 읽은 한 선생님의 글이 떠오르면서 촉발했다. 중산층인 대학 교수는 맑스주의자일 수 있는데, 페미니즘/페미니스트는 여성이라는 특정 젠더로 제한하는 것 자체가 페미니즘에 대한 문제적인(혹은 논쟁적인) 인식이라고 지적한 글이었다.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당사자주의에 대한 문제제기. 어떤 운동은 소위 말하는 ‘당사자’만 할 수 있는가? ‘당사자’는 정말 자신의 ‘경험’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걸까? 예를 들어 트랜스젠더 운동은 트랜스젠더만 해야 하는 걸까? 트랜스젠더는 정말 트랜스젠더 운동을 가장 잘 할 수 있고, 트랜스젠더 이론을 만드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할까? 당사자 정체성이라는 것이 분명 의미있는 역할을 하지만, 앞의 질문에 나는 대답을 망설일 수밖에 없다. 당사자와 비당사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식으로 활동하고 고민하는가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아예 당사자주의에 바탕을 두고 질문하면, 트랜스젠더는 반드시 의료적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당사자 앞에서 나는 당사자이기 힘들고, 트랜스젠더는 당연히 이성애자며 비이성애자 트랜스젠더는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는 당사자 앞에서 나는 곤란한 당사자거나 당사자이기 힘들다. 이럴 때 누가 당사자일까? 간단하게 말해 어떤 경험이나 (정체성)범주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것을 해석하는 방식이 중요하다.
다시 채식 얘기로 돌아와서, 나는 채식을 하는 사람이 반드시 채식주의자일 필요는 없고, 채식주의자가 반드시 채식을 할 필요도 없다고 믿는다. 물론 이 말이 성립하기 위해선 채식과 육식을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어야 하고, 어디서부터는 채식이고 어디서부턴 육식인지를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어야 하지만(http://goo.gl/q2zP). ;;; 채식과 채식주의를 구분하려는 이유는, 바로 나 자신의 현재 상황 때문이다. 나는 과거엔 어떤 이유에서 채식을 했지만, 지금은 그 이유로 채식을 하는 게 아니다. 그 이유가 현재로선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서, 현재의 내겐 채식을 시작한 이유가 없(는 것과 같)다. 아울러 나는 내가 채식을 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그냥 대충 먹는 사람이라고 말하길 더 선호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에게 나는 채식을 하는 사람이고, 다른 어떤 사람에게 나는 채식주의자에 해당한다. 내가 사용하지 않는 범주와 다른 사람들이 내게 붙여주는 범주 사이에서(물론 타인이 붙여주는 범주를 내가 사용할 때도 적지 않지만;; ) 갈등하며, 새롭게 든 고민은 ‘채식 혹은 채식주의가 당사자주의일 필요가 있을까?’다. 그래서 채식과 채식주의라는 구분을 설명하는데, “육식하는 채식주의자”란 표현이 다시 한번 유용하게 다가왔다. 그렇다면 채식주의라고 불리는 어떤 인식론, 세계관은 뭘까? 글쎄. 아직은 나도 잘 모르겠다. 비건인 사람도, 육식을 하는 사람도 모두들 자신을 채식주의자라고 설명하면서 서로 열심히 논쟁하다보면 뭔가 나오지 않을까? 흐흐.
스킨 살짝 수정
스킨을 살짝 수정했습니다. 뭘까요? 크크크.
이런 저런 얘기: 슬픔, 낙태 논쟁, 양희은
당고 댓글을 읽고 반성하며… 사실 항상 뭔가를 써야 하는데 하는 부담은 있었지만 살짝 방치했다는… 뭐, ‘목하 열애'(응? 크크크) 중이니까. 으하하;;
01
며칠 전, 눈이 내리던 날 알바를 끝내고 玄牝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심성락을 들었다. 수은등은 창백하고 또 흐렸으며, 바깥은 어둡고 또 김이 끼어 흐릿했다. 심성락의 아코디언은 바람의 소리를 내며 애잔했다. 나는… 장의차에 타고 있는 기분이었다. 움직이는 관 속에 있는 기분이었다. 어떤 불길한 상상을 하고 있었다. 엄청난 죄를 떠올리고 있었다. 아니다. 나는 그것이 최선일 수밖에 없다고 믿었지만, 이런 선택이 최선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슬퍼하고 있었다.
02
다른 한편, 누군가와 얘기를 하다가, 나는 뜬금없이 프로라이프(pro-life)가 되었다. 그 분은 생명이 소중하지 않느냐고 물었고, 나는 당연히 소중하다고 답했다. 그리고 나는 낙태를 반대하는 사람이 되었다. -_-;;
물론 이 상황에서 나는 논쟁을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사람과는 논쟁이 어렵다는 걸 직감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꽤나 피곤한 상태였고, 논쟁이 불가능한 사람과 논쟁하는 건 시간낭비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냥 “예, 예”라는 말만 반복했다.
갑갑한 건, 생명 vs 반생명(선택)이란 이분법 구도였다. 내가 아는 페미니즘에서 생명이 소중하지 않다고, 생명이 귀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책은 없다. 그런 페미니스트도 없다. 생명과 선택이란 이분법이 아니라, 낙태가 어떤 맥락에서 발생하는지 이해해야 하고, ‘여성’만을 비난하고 가해자로 내몰면서 ‘남성’은 부재중으로 만드는 구조를 비판하고, 태아를 초월적인 절대적 주체로 여기고 여성을 ‘인큐베이터’로만 대하는 언어의 한계를 지적하고, 모든 여성은 이성애자고 결혼해서 어머니가 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인식에 문제제기한다. 등등. 간단하게 말하면 복잡한 현실을 복잡하게 고민하자는 건데, 소위 프로라이프라고 자처하는 집단은 모든 상황을 매우 단순하게 만들어 버리며 책임지지도 못할 말들만 화살처럼 쏘아댄다.
근데 좀 웃긴 건, 방송에서 프로라이프를 자처하는 분들의 발언을 듣고 있노라면, 그 논의에서 어떻게 낙태반대란 결론이 나올 수 있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논의 과정만 들으면 선택권을 지지할 거 같은데… ;;
03
아침마다 양희은 씨의 라디오 방송을 듣는다. 그리고 매번 놀란다. 양희은 씨의 발언이 멋져서. 물론 그동안 내가 양희은 씨를 비롯하여 공중파 방송 진행자에 대한 편견이 있긴 했다. 그들은 젠더 권력 관계의 문제에서 “참고 살라”며 ‘여성의 인고’를 강조할 것이라는 어떤 편견. 성교육강사라면서 여성에게 조심할 것을 요구하는 말도 빈번했으니까.
근데 양희은 씨는 달랐다. 3.8 여성의 날을 지지하고 낙태 논쟁에서 여성의 선택권과 남성의 부재를 지적하는 발언을 방송 서두에 말하는 건 기본. 며칠 전엔 여성도 아내가 있다면 직장 생활을 비롯하여 일을 매우 잘 할 수 있다고, 남편/남성은 회사 일에만 집중할 수 있지만 아내/여성은 사회적 조건이 다르고 회사 생활과 가사 노동 등의 여러 일을 동시에 책임지고 있음을 분명하게 지적하더라. 언젠가는 왜 여동생이 오빠의 밥을 챙겨주느냐며 오빠가 여동생의 밥을 챙겨주는 혁명이 일어나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여성은 누나여도 여동생이어도 남자 남매의 밥을 챙겨줘야 하는 현실을 지적하며 했던 말. 공동진행자가 뭔가 좀 이상한 말이라도 할라치면 능숙한 언변으로 바로 문제를 지적하기도 하는데.
라디오를 들으며, 감탄 또 감탄. 한계가 없진 않(겠)지만, 공중파 방송이라는 맥락을 감안하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04
결국 이 모든 글도 트위터로 메모한 걸 정리했네요.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