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이사 가는 곳에 인터넷을 설치할 것인가, 말 것인가…
설치를 하면 급하게 인터넷을 사용해야 할 때, 카페에 가야 하는 불편함과 불필요한 비용을 줄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전 이미 카페 사용에 적응했다는…;;;
설치하지 않으면, 玄牝에 머물 때 인터넷을 할 수 없으니 책을 읽는 것 외에 달리 할 일이 없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책 읽을 시간을 확실하게 확보할 수 있는거죠. 전 인터넷만 안 하면 책 읽을 시간이 무지무지 늘어난다는… 하하. ;;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이래저래 갈등입니다.
참… 인터넷을 설치하면 하고 싶은 게 있긴 합니다. 현재 나스타샤(데크스탑)에 주분투를 설치해서 사용하고 있는데요. 리눅스 민트란 걸 한번 설치해서 사용해보고 싶달까요. 나스타샤의 장점은, 아무 OS나 재미로 설치할 수 있다는 거니까요. 워낙 오래된 컴퓨터라 확실히 부담이 없네요. 흐흐. 이왕이면 리눅스의 다양한 버전을 한번씩 설치해서 사용하며, 제가 가장 편하게 사용할 수 있고 제게 가장 적합한 OS를 찾고 싶은 욕심도 있고요. 하하.
십대청소녀-‘불량’-구금시설 관련 논문들
이런저런 일로 영어논문을 찾아서 읽고 있습니다. 학교에 속한 학생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학생이라고 자처하는 입장에서 영어논문을 읽는다는 게 뭐 그리 대수겠어요. 영어건 한국어건, 논문인건 단행본이건 뭐건 읽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죠. 뭐든 읽지 않고 있다면 그걸 부끄럽게 여기고 고백해야겠죠. 그러니 읽는다는 일은 특별할 것 없습니다. 다만 저로선 워낙 새로운, 이제까지 공부하지 않은 영역을 읽고 있어서 이런저런 고민이 많달까요? 제가 구금시설, 비행/일탈/불량, 십대와 같은 주제어로 논문을 찾고, 읽을 줄은 상상도 못 했으니까요. 뭐, 워낙 잡식성에 온갖 것에 관심이 있으니 언젠가는 한번 읽었겠죠. 하지만 이렇게 찾아서 읽을 줄은 몰랐어요. 그것도 집중해서 여러 편을… 하하;;
찾아 읽은 논문 중엔 상당히 좋은 논문도 많고 제목에 낚였다는 느낌이 드는 논문도 많습니다. 낚였다는 느낌이 드는 논문의 대다수는 양적연구를 수행한 논문입니다. 설문지를 몇 백 명에서 몇 천 명에게 돌려 그 내용을 통계로 분석한 논문들. 고백하자면 학교를 다닐 때, 통계분석(양방) 논문을 읽는 적이 거의 없습니다. 2년 동안 5편이 될까 말까 합니다. 그보다 적을 수도 있고요. 전 통계분석 논문은 재미가 없어서 안 읽는 편입니다. 이미 다 아는 사실을 반복하는 경향이 있으니까요. 이를테면, 한국에서 트랜스젠더의 생활을 조사한 후, 트랜스젠더가 한국사회에서 살아가는 건 정말 힘들다란 결론을 내린다면? 읽는 시간이 아까워요. 조사한 사람에겐 의미가 있으려나요? 정책이나 제도를 바꾸기 위한 자료로선 의미가 있습니다. 어쨌거나 통계자료를 통해 어떤 ‘구체적인 사실’을 제시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논문이라면 힘들다는 통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구조적인 맥락 등을 같이 분석해야겠죠. 언론사의 여론조사에서도 제시할 수 있는 내용을 학술지 논문을 제시한다는 건 좀… 양식이 없거나 양심이 없거나…
Cochran, Bryan N., Angela J. Stewart, Joshua A. Ginzler, and Ana Mari Cauce. “Challenges Faced by Homeless Sexual Minorities: Comparison of Gay, Lesbian, Bisexual, and Transgender Homeless Adolescents With Their Heterosexual Counterparts.” American Journal of Public Health. 92.5 (2002): 773-777.
Cochran 등이 쓴 논문 “노숙 성적소수자에 의해 직면하는 도전: 이성애 노숙 청소년과 게이, 레즈비언, 바이 그리고 트랜스젠더 노숙 청소년의 비교”를 읽었습니다. 일단 제목만으론 혹합니다. 검색하다가 이 제목에 끌려 내용도 검토하지 않고 출력부터 했습니다. 하지만 결론은? 이성애 노숙청소년보다 LGBT 노숙청소년이 더 어렵다, 성적지향 및 동성애혐모/호모포비아 문화와 십대란 점이 겹쳐있다…가 끝입니다. LGBT 십대의 가출을 호모포비아 문화와 연결해서 고민해야 한다는 문장에 감동 받을 정도입니다. 겨우 이 문장에… 물론 잡지의 성격에 따라, 분과학문에 따라 논문을 쓰는 방식에 차이는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건 좀… 암튼 제목 하나는 잘 뽑았습니다. ㅡ_ㅡ;;
(조만간에 읽을 논문 중에 더 매력적인 제목도 있는데, 그건 어떨까요? ;; )
Widom, Cathy Spatz, and Joseph B. Kuhns. “Childhood Victimization and Subsequent Risk for Promiscuity, Prostitution, and Teenage Pregnancy: A Prospective Study” American Journal of Public Health. 86.11 (1996): 1607-1612.
위덤과 쿤스의 논문 “아동 피해와 그것이 난교, 성매매, 그리고 십대 임신에 끼치는 위험”을 읽었습니다. Promiscuity를 사전에선 난교라고 설명하고 있어서 이렇게 옮겼지만 정확한 번역은 아닙니다. 아니, 동의할 수 있는 번역이 아닙니다. Promiscuity는 일부일처가 아닌, 배타적인 관계가 아닌 성관계를 지칭하는 용어입니다. 논문을 읽다보면 1년 동안 10명과 성관계를 맺은 경험을 promiscuity란 용어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논문의 전제 자체에 문제가 있습니다.
내용은 어린 시절의 아동폭력 피해 경험이 promiscuity, 성매매, 그리고 십대임신에 끼치는 영향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여타의 논문이 통상적인 통계 자료를 비교하며, 아동폭력 피해 경험이 있는 이들은 promiscuity, 성매매, 십대임신 경향이 상당히 높고, 피해 경험이 없는 이들은 경향이 낮다는 식의 결론을 내립니다. 하지만 이런 비교는 두 집단의 다른 사회적 조건을 간과합니다. 만약 피해 경험이 있는 집단은 빈곤층이 상당수고 피해 경험이 없는 집단은 상류층이 상당수라면? 빈곤층에 피해 경험이 많고, 상류층에 피해 경험이 적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계급, 젠더, 인종, 성적지향, 젠더정체성 등에 따라 전혀 다른 결론이 나올 수 있다는 점이 고려해야 하는데 간과한다는 거죠. 그래서 이 논문은 아동폭력 피해 경험이 있는 집단과 피해 경험이 없는 집단을 나눌 때 비슷한 환경에 있는 이들을 선별합니다. 그래서 가급적 다른 조건은 비슷하게 세팅하고, 아동폭력 피해 경험 여부만을 변수로 만들려고 애씁니다. (물론 이런 세팅이 완벽할 수 없는 건 저자들도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데이터 통계를 분석하니, promiscuity와 십대임신은 아동폭력 피해 경험과 상관관계가 없고, 성매매만 아동폭력 피해 경험과 관련 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이 결론은 기존의 많은 논문들이 제시하는 결론은 다르고요.
이 논문은 데이터 통계분석이 중심이지만 조사분석을 위한 세팅의 방식에 따라 상당히 흥미로운 논문이 될 수 있음을 잘 보여줍니다. 물론 구조적인 분석 등은 거의 없다는 점에서 통념을 반복하긴 합니다. 하지만 세팅만으로도 이렇게 다른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읽는 재미가 있습니다.
(관련 공부를 하시는 분들은 이미 이런 기법을 잘 알고 계시겠죠? ^^;; )
Brown, Lyn Mikel, Meda Chesney-Lind and Nan Stein. “Patriarchy Matters: Toward a Gendered Theory of Teen Violence and Victimization.” Violence Against Women. 13.12 (2007): 1249-1273.
브라운, 체스니-린드, 스틴(슈타인?)의 논문을 읽었습니다. 논문 제목을 번역하기가 좀 난감한데요. 이 논문의 가장 마지막 문장에 제목의 단서가 나옵니다. “… the reality that living in a patriarchy matters.” 대충 옮기면, 가부장제에서의 삶이 물질로 만드는 실재…? 가부장제라는 사회구조에서 여러 억압 구조들이 교차하며 만들어지는 삶을 문제 삼자는 내용인데, 이걸 한글로 옮기려니… 저 처럼 내공 없고, 실력 없는 인간으로선 불가능한 일입니다. 크크크. ㅠ_ㅠ 억지로 옮기면 “가부장제 문제: 십대 폭력과 피해의 젠더화된 이론을 향하여” 정도입니다.
체스니-린드는 관련 주제어로 검색하기 전까진 전혀 모르던 사람인데요. 이번에 이런저런 논문을 찾고, 읽는 과정에서 청소녀-일탈/불량-구금시설 관련해서 상당히 유명한 인물이더군요. 마찬가지로 브라운과 스틴도 유명인들이고요. 제게 좀 더 익숙한 이들로 비유하자면, 게일 러빈, 주디스 버틀러, 스잔 스트라이커가 공동으로 논문을 쓴 격? 아니면 구글, 마이크로소프트(MS), 애플이 협력해서 신제품을 출시한 격? 혹은 네이버, 다음, 네이트가 협력해서 새로운 포털을 만든 격? 흐흐. 뭐, 대충 이 정도의 느낌을 주는 공저자들이 모인 논문입니다. 물론 이런 기획에 따른 문제도 많을 테고, 제가 아직 모르는 분야라, 이런 비유가 문제가 많긴 하겠지만요. 그나마 다행인 건, 적어도 체스니-린드의 경우 꽤나 괜찮은 논의를 펼치는 저자란 점이죠. 다른 논문을 읽고 호감을 느껴서 이 논문도 읽기로 했으니까요. 🙂
체스니-린드는 단독저서보다 공저가 많은 듯한데요. 다른 공저 논문에선 여성의 폭력이 좀 더 관계적이란 식의 표현, 덜 폭력적이란 식의 표현이 기존의 여성성을 반복하고, 강화할 수 있음을 지적해서 인상적이었죠. 현상적으로 그렇다 아니다를 떠나서, ‘더 관계적이다’, ‘남자/소년에 비해 덜 폭력적이다’란 표현 자체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는 지적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으니까요.
브라운 등이 함께 쓴 이번 논문 “Patriarchy Matters”는 이런 인식의 연장선에 있다고 해야 할까요? 십대여성 혹은 청소녀의 범죄 및 구금과 관련한 논문에서 공통으로 지적하고 있는 사항은 1990년대 들어 여성범죄율, 청소녀 범죄율이 상당히 두드러지게 증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건 미국 논문과 한국 논문에서 공통으로 동의하고 있는 부분이고요. 경찰청, 교정시설 등에서 제시하는 통계 역시 이것이 사실이라고 증명합니다. 십대여성의 체포율이 상당히 증가하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재밌는 건, 1990년대 들어서면 ‘여성’과 ‘남성’에 관계 없이, 폭력이 줄어들고 있는 추세란 점입니다. 폭력은 줄어들고 있는데, 범죄율은 증가한다? 브라운 등이 쓴 이 논문은 바로 이 지점에서 논의를 출발합니다. 페미니즘/여성주의/젠더관점에서 접근하건 안 하건 상관없이, 거의 대부분의 논문들이 여성의 범죄율이 증가하고 있다는 점은 언급하지만 폭력은 감소하고 있음을 간과한다는 점에서, 이 논문의 의의는 상당합니다. 저자들은, 폭력이 감소하는데 체포율이 증가하고 있다는 건 다른 무언가가 변한 것이라고 지적하며, 그것은 여성을 통제하는 방식이 변한 점과 관련 있다고 주장합니다.
거칠게 요약하면 두 가지. 과거엔 젠더 차이를 강조하며 여성을 통제했다면 지금은 젠더 동등을 강조하며 여성을 통제하고 있으며, 과거엔 여성 섹슈얼리티를 통제했다면 지금은 여성 폭력을 통제하고 있다는 거죠.
전자의 경우, 과거엔 여성과 남성은 다르기에 여성의 가사노동은 당연하단 식으로 여성을 통제했죠. 하지만 지금은 여성과 남성은 동등하니, 젠더 범주를 고려할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여성의 행동을 통제합니다. 즉, 현대사회는 더 이성 성차별이 없다는 식의 접근이죠. 그래서 성폭력, 젠더 권력 관계가 작동하는 폭력을 그냥 개인 간의 폭력으로 대한다는 거죠.
후자의 경우, 과거엔 여성이 섹슈얼리티를 표현하면 그것을 처단하는 식으로 여성을 통제했죠. 마녀란 이름으로 부르거나, 무성적인 존재로 여기며 여성의 성적 표현을 억압하여 여성을 통제했다는 거죠. 하지만 지금은 특정 행동을 폭력으로 명명하고 그것을 못 하게 하는 방식으로 여성성을 통제한달까요? 이를테면 작년 말, “루저의 난”으로 불렸던 키와 관련한 논쟁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그 여성을 법원에 고소할 정도로 엄청난 테러가 있었는데요. 특정 발언을 폭력으로 명명하고, 그것에 테러를 가해 여성성을 통제하는 거죠. 그러니 이젠, 성적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것이 폭력이냐 아니냐로 명명하는 방식이 바뀌었고, 전통적 젠더 역할에 위배될 때 그것을 폭력으로 명명하고 처단하는 식이죠. 여성이 미니스커트를 입은 것을 “내가 미니스커트 입은 모습에 불쾌함을 느꼈으니, 성희롱이고 (성)폭력이다”란 식으로 반응하는 것이 단적인 예가 되겠죠. 폭력이란 명명이 상당히 포괄적인 표현이듯, 여성의 행동을 폭력으로 명명할 때 젠더표현부터 섹슈얼리티 실천까지 거의 모든 행동을 통제할 수 있습니다.
이 논문의 결론은 다소 뻔합니다. 젠더가 인종이나 계급, 성적지향 등과 별개일 수 없으니 여러 범주를 함께 고민해야 한다는 거죠. 하지만 논의 과정에서 충분한 사례와 분석을 제공하고 있어서 공허한 결론은 아닙니다. 어쨌거나 진부한 결론이긴 하지만, 논의를 차근차근 따라 읽노라면 꽤나 감동적입니다. 무엇보다, 누군가에겐 익숙하겠지만 다른 누군가에겐 막연하게 짐작만 하고 있던 부분을 잘 정리하고 있으니 유용하기도 하고요. 흐흐. 여성성 통제와 관련해서 참고문헌을 찾고 계시다면 읽으셔도 괜찮을 듯합니다. 치명적인 문제는 영어논문…ㅠ_ㅠ (그렇다고 제가 이 논문을 한국어로 옮길 의향은 없습니다. 그 시간이면 트랜스젠더 관련 논문을 옮길 수도 있으니까요. 흐흐. 그렇다고 트랜스젠더 관련 논문을 한국어로 옮기는 것도 아니지만요… 음하하;;; )
베르너 엔케.. 그러니까 아무 것도 안 하는 일을 한 거라니까…
베르너 엔케 글, 그림. [행복한 폐인의 하루] 이영희 옮김. 서울: 열린책들, 2004.
책방에 이 책이 있다. 얼추 일주일도 더 전에 들어왔는데, 의외로 아무도 안 사갔다. 이 책이 들어온 날, 꽤나 재밌을 거 같아서 살까 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그만뒀다. 그래도 왠지 재밌을 거 같아 어젠 일을 하면서 이 책을 읽었는데… 아, 정말 재밌다.
몇 년 동안 ‘아무 일도 안 하는 일’을 하며 지내는 하로가 주인공. 하로와 거의 매일 산책을 다니는 단짝 프랑크. 하로와 동거하는 주지. 주지의 단짝 민헨 콜마이어가 주요 등장인물. 번역 책 제목은 “폐인”이지만 내가 사랑하는 용어로는 잉여인간에 가깝다. 스스로를 잉여인간으로 여기는 이들에게 보내는 찬가. 그리고 무척 즐거운 책. (하지만 모든 가사노동과 경제적 지원은 주지가 책임지고 있다는 점에서 좀 짜증이 나기도.)
아래엔 특히나 인상적인 구절을 골랐는데, 고르는 거 정말 힘들다. 정말이지 모든 대화를 옮기고 싶었으니까.
프랑크: 무슨 일 하니?
하로: 피할 수 있는 한 피하지.
p.27
주지: 빨리 가자. 서둘러.
하로: 걱정 마. 우린, 너무 늦지 않게 적당히 지각할 거야.
p.38
프랑크: 네 책은 어떻게 됐니? 오늘은 얼마나 썼니?
하로: 빈 페이지 하나… 어쩌면 내일은 두 페이지 해낼지 모르지.
p.59
주지: 하로가 미안하다고 그러긴 해.
민헨 콜마이어: 그 문제에 있어서 하로가 하는 건 그것밖에 없지.
p.76
프랑크: 난 무슨 일이든 해야 해.
하로: 넌 빈둥대는 힘이 전처럼 활발하지 못해.
p.84
주지: 또 누워서 빈둥대며 하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어!!!
하로: 그렇지 않아! 난 벌써 한판 실컷 잤어…
p.85
주지: 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아…!
하로: 그 이상 뭘 더 바라?
p.96
주지: 너, 하루에 [담배] 얼마나 피우니?
민헨 콜마이어: 두 개.
주지: 두 갑?
민헨 콜마이어: 라이터 두 개.
p.101
[무덤 가에서]
프랑크: 우리도 언젠가 여기 묻히겠지…
하로: 죽는 건 그리 나쁜 일이 아닌가 봐.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 리 없잖아?
p.172
하로: 시간이란 없어. 시간이 흐른다는 건 은행 직원들이 지어낸 이야기일 뿐이야. 이자 때문에…
p.242
하로: 정신이 말똥말똥할 때보다 더 심한 숙취 상태는 없어.
p.267
하로: 오늘 밤에는 우리 집에서 자자.
프랑크: 주지가 날 좋아하니? 내가 가면 좋아해?
하로: 네가 돌아갈 때도 좋아하던 걸…
p.276
카티: 주지는 그래, 행복하대? 그 하로라는 놈은 하는 일 없이 놈팡이 짓만 하잖아?
민헨 콜마이어: 그래도 그 짓은 부지런히 해.
더 인용하고 싶지만, 자칫 저작권에 걸릴까봐 여기서 자제… 하하. ㅡ_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