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절주절: 잠과 음악과 숙면마스크, 허수경, 나의 것이 아닌 글과 앎

01
요즘 음악을 틀어 놓고 잠든다. 잠귀가 밝은 편이지만, 음악 없인 잠들 수가 없어서. 그리고 음악으로 인해 숙면을 취할 수 없다. 악순환.

예전부터 음악을 틀어 놓고 잠들었던 게 아니다. 얼추 열흘 혹은 일주일 전부터 생긴 습관이다. 음악 소리가 들려야 잠들 수 있다. 잠드는 중간에 잠깐 깨었을 때 음악소리조차 없이 침묵만 무겁게 떠돈다면 불쑥 어떤 감정이 튀어 나올까 두려워 한다. 음악소리라도 나를 감싸주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 이런 기대로 잠든다. 그리고 음악소리는 잠드는 순간에도 나를 일깨운다. 잠들 수도 없고 잠들지 않을 수도 없고. 그렇게 늘 깨어 있는 상태로 잠들어 있고, 잠들어 있는 상태로 깨어있다.

어제 ㅈ님께 지나가는 말로 요즘 잠을 잘 못 잔다는 얘길 했는데 …. 오늘 ㅈ님께 전해줄 게 있어 잠깐 만난 자리에서, 무려 매우매우 귀여운 숙면마스크를 내게 선물로 주셨다!!! 정말 고마워요! (근데 여기 들어오시려나? ;;; )

02
네 마음은 이미 떠났니?
내 마음아, 너도 진정 가는 거니?
-허수경, 마치 꿈꾸는 것처럼

03
내가 공부를 계속할 수 있다면, 해야 한다면 그건 나의 즐거움도 있지만 이런 나를 지지해주고 독려하는 다른 트랜스젠더들, 퀴어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 공부는 내게 일종의 즐거움이자 욕망이며, 의무이자 권리다. 그러니 나의 앎은 결코 나 혼자 독점할 수 있는 앎이 아니며 나 혼자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앎이 아니다. 많은 이들의 지지와 격려 속에서 그네들의 언어를 배우면서 얻는 소중한 자산이다. 이 언어를 팔아 내가 먹고 살고, 글쓴이 자리에 언제나 나의 이름만 들어간다. 하지만 글쓴이 자리의 나머지 여백엔 무수하게 많은 이름들이 살아 꿈틀거리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길! 모든 문장에 나 아닌, 나인 무수한 이름들이 꿈틀거리며 숨쉬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길!

『럼두들 등반기』: 포복절도 블랙코미디

오전에 당고님 블로그에서 읽은 서평에 끌려, 보우먼의 『럼두들 등반기』(김훈 옮김. 서울: 마운틴북스, 2007)를 읽었다. 눈치 없는 산악대장, 길치인 길안내인, 과학실험에만 관심 있는 과학자, 사실상 혼자만 아픈 의사와 같은 이들이 등장인물. 에베레스트를 능가하는 높이의 산, 럼두들에 오르려는 이들의 등반 과정이 내용인데 ….

하지만 우리에게는 시간 여유가 없었다. 일몰 전까지 정글을 곤경에서 구해 내려면 뭔가 조치를 취해야 했다. 그것도 신속하게. 분명 누군가가 아래로 내려가야 했다. 그런데 누구를 내려보내야 하지?
나는 오전에 일어난 사건 덕에 그 해답을 얻었다. 친구를 위해 목숨을 거는 특권을 차지할 만한 사람으로는 셧만 한 사람이 없었다. 셧이 그 영애를 다른 사람들에게 양보하려 최선을 다한 모습은 그가 얼마나 겸손한 사람인가를 보여준다. 하지만 나는 그가 자신이 진짜 바라는 것을 포기하도록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우리는 곧 그를 로프로 붙잡아 맸다.(66)


이런 식의 유머가 이 책엔 가득하다. 읽는 내내 키득거렸다. 무려 도서관에서 읽었는데, 어찌나 웃기던지 민망할 지경이었다. 위에건 그나마 전후 맥락 없이도 웃겨서 인용했지만, 앞뒤 맥락 속에서 웃긴 내용이 너무 많다. 이들은 결국 등반에 성공하지만,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단 두 가지. 하나는 도저히 먹을 수 없는 음식을 만드는 주방장을 피하다 보니 어쩌다가! 다른 하나는 다재다능하고 힘 좋은 포터들이 들고 올라가서. -_-;; 흐흐. 즐거운 오전이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원래 읽어야 하는 책은 외면했다. *먼산*

난 이 책이 출판사의 소개처럼 “코믹산악소설”로도 충분히 즐거운 소설이지만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에 관한 블랙코미디로도 더없이 좋은 소설로 읽었다. 눈치 없는 대장은 대원들의 싸움을 격렬한 언쟁과 대화로 이해하며 좋은 징조로 받아들인다. 아울러 럼두들이 위치한 동양의 요기스탄이란 나라, 현지에서 채용한 포터들을 미개한 존재로 이해한다. 그래서 자신들이 사용하는 산소호흡기 사용을 포터들이 거절하자 포터들은 산소호흡기가 마법을 거는 물건으로 이해하는 듯하다고 쓴다. 이것은 정확하게 서구가 동양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소설에도 등장하지만 포터들은 서구유럽에서 온 등반대들이 간신히 오르는 산을 산책하듯 어렵지 않게 오른다. 누군가에겐 도전의 대상이며 정복의 대상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겐 일상 공간이다. 맥락을 탈락하면 언제나 등반 대장과 같은 식으로 이해하기 마련이다. 저자가 얼마나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책의 또 다른 의도는 제국주의나 서구의 시선에 대한 조롱이 아닐는지.

암튼 즐거운 오전이었지만, 다 읽고 나서 쌓여 있는 할 일을 깨닫곤 다시 무거워진 오전이었다. ㅜ_ㅜ

글쓰기, 수술 안 한 트랜스젠더의 이미지, 그리고 주절주절

01
어찌된 조화인지 4시간 전에 퇴고한 글을 퇴고했더니, 고칠 부분이 와르르 쏟아지더군요. 크릉. 이건 도대체 무얼 의미하는 걸까요? 4시간 전의 퇴고는 날림이었을까요? 아님 그만큼 고칠 부분이 많은 글이란 의미일까요? 아무려나 퇴고할 부분이 많다는 건, 좋은 겁니다. 아무렴요. (우헹 … 울면서 달려간다.;;;)

이제까지 글을 쓰고 나면 항상 혼자 검토한 후 발송했는데요, 이번엔 누군가에게 미리 논평을 받고 싶다는 바람을 품고 있습니다. 일단 청탁한 곳에 파일을 보낸 후 몇 사람에게 원고를 줘서 논평을 받고 수정한 후 다시 보내는 거죠. 하하. 청탁한 곳에선 일단 원고가 들어오면 안심을 하니, 완성도가 좀 떨어져도 보내는 거죠. 그러고 나서 최종 마감일을 확인한 후 그 며칠 전에 다시 보내고요. 근데 논평을 받고 싶은 이들이 모두 바쁘다는 것! 흑흑. 뻔뻔하게 괴롭힐 것인지 그냥 자숙할 것인지 며칠 더 고민한 후 결정할까 봅니다.

02
블로그 검색유입을 확인할  때마다 깨닫지만 제가 쓴 글은 “나를 증명할 길은 수술뿐인가”(http://bit.ly/6kW9U)뿐인 거 같아요. 으흑. 나름 글을 많이 썼지만 사람들이 계속해서 검색하는 글은 저것. 그래서 꼭 제가 저 글만 쓴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도 많죠. 흐흐.

사실 저 글은 다른 어떤 글보다 많은 독자를 가진 매체에 실렸고, 읽기 수업의 교재(무려시중에 판매한다는;;)에 재수록 되기로 했으니 그런 거라고 믿고 싶어요. 하지만 아닐 수도 있습니다. 저 글이 유일하게 읽을 만한 글인지도 몰라요. 끄아악. ㅠ_ㅠ 뭐, 어쨌든 한 편이라도 읽을 만한, 사람들이 찾는 글을 썼다는 것 자체로 만족해야 할까요? 아무려나 찾아 주는 분들에겐 고마움을 느낍니다.

하지만 처음으로 매체에 발표한 글이 유일하게 찾는 글이라는 건, 왠지 쓸쓸하기도 합니다. 이건 성장에 강박적인 저 자신이 성장하지 않았다는 의미일 수도 있으니까요. 반성해야죠.

03
그나저나 이번 글쓰기는 나름 재밌는 부분이 있어 좋아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좋으면 다른 사람들에겐 별로일 가능성이 높지만요. 으흑. 전체 분량 중 후반부는 앞으로 특강 갈 때 꽤나 유용하게 사용할 부분이기도 하고요.

참, (예전에 한 번 언급했듯)지난 주에 특강을 했었는데요. 제게 특강 기회를 꾸준히 챙겨주는 선생님의 수업이었습니다. 그 분과도 꽤나 죽이 맞는 편이라 종종 재밌는 상황을 연출하곤 합니다.

기본적으로 저는 제 이성애혈연가족을 제외하면 커밍아웃이건 아웃팅이건 개의치 않는데요. 사실 ‘아웃팅’을 좀 더 편하게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특강을 할 때면 종종 눈치를 챌 수 있는 사람만 알 수 있는 방식으로 저를 드러냅니다. 그러니 대부분은 못 알아듣고요. 하지만 특강이 끝난다고 끝은 아니죠. 그 다음 시간에 선생님이 저를 트랜스젠더라고 소개합니다. 그럼 수강생들은 난리가 나죠. 정말 몰랐다고, 다시 한 번 보고 싶다고. 하하.

이건 한국에서 트랜스젠더가 소비되는 방식과 관련 있죠. 더구나 어떤 의료적 조치도 취하지 않는 트랜스젠더는 상상하지 않으니까 더 그렇죠. 그래서 저를 한 번 보고 난 후, 저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 사람들은 트랜스젠더에 대한 이해를 달리 한다고 합니다. 이건 제가 경험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고요. 그 선생님이 나중에 들려주는 부분이죠. 저를 한 번 본 후, 나중에 제가 트랜스젠더란 걸 알고 났을 때 달라지는 트랜스젠더 이미지. 그래서 전 이걸 선생님과 협의해서 전략적으로 사용하면 어떨까, 상상하고 있습니다. 하하.

그나저나 그렇게 트랜스젠더 이미지를 달리한 사람들에겐 부작용도 있습니다. 저와 같은 트랜스를 알 수 있거나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래도 드무니까요. 그래서 수술 안 한 트랜스도 있다고 말하면 주변에선 “에이 설마?”라고 반응하니까요. 뭐, 어쨌든 그건 제가 감당할 몫은 아니고요. 😛

이번에 쓴 글은 바로 이런 부분과 관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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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달 말이면 다시 수입원이 하나인 알바 인생이 됩니다. 아슬아슬한 인생이 도래하네요. 현재로선 나름 투잡 인생이거든요. 으하하. 사실 제 직업은 매우 많지만, 고정 수입이 들어오는 직업은 비정규직 하나, 알바 하나죠. 그래서 가끔은 이 둘이 제 직업 같기도 해요. 에헤헤. 그 중 비정규직은 다음 달로 끝. 문제는 알바인데, 이게 부동산 경기와 관련 있다고 합니다. 나 이사도 가야 하는데! 어찌하여 부동산 경기는 제 알바와 이사 모두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거냐고!!
 
암튼 12월부터는 정말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아야 하는 군요. 꽤나 위태롭겠지만 그래도 괜찮아요.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위태로우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