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는 미루기 그리고 글쓰기

01
한 선생님께서 처음엔 어제 밤까지 원고를 보내준다더니, 다시 오늘 오전으로, 다시 낮 1시로, 다시 3시로, 또 다시 5시로 미루고 나선 아예 연락두절. 한참 후 다시 연락이 오길 내일 새벽에 보내준다고 한다. 아놔. -_-;; 덕분에 간사 세 명은 하염없이 기다릴 뿐이었다.

02
20일까지 마무리 해야 하는 원고의 공정율을 계산하니
보고서에 실릴 수준의 원고를 기준으로 15%
출판한다고 가정할 때의 원고를 기준으로 5%
나의 글쓰기 기준으로 0%
를 진척했더라.
모든 글쓰기는 퇴고에서 시작. 초고는 이제 글쓰기의 재료를 만든 거지 글을 쓴 건 아니다. 근데 난 아직 초고도 완성을 못 했다. 무려 20일이 마감인데! ㅜ_ㅜ
(앞의 두 기준은, 어쨌거나 아무 것도 안 한 건 아니라는 증거물을 만들기는 했다는 의미일 뿐.)

03
속도가 많이 늦어진 변명을 하자면 무엇보다도 내가 게으르고 고민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펜으로 이면지에 글을 쓰는 습관때문이기도 하다. 아는 사람은 알지만 펜으로 쓰는 글은 키보드로 쓰는 글보다 속도가 현저하게 늦다. 늦을 수밖에 없다. 아울러 나의 경우, 몇 문장을 쓰다가 안 풀리면 다시 처음부터 쓰는 버릇이 있다는;;; 물론 아예 처음부터는 아니고, 문단이나 소주제 단위로 처음부터 다시 쓴다. 그러다보니 많이 더디다. 그래도 좋다. 확실히 글은 펜으로 이면지에 써야 제 맛이다. 그래서 쓰는 일 자체는 즐겁다. 많이 늦어질 수도 있어 담당자에게 무척 미안한 점만 빼면. ;;; 사실 너무 미안해서 미안하단 말도 못 했다.

주절주절: 연애의 악순환, 성매매지역, 왼손목

01
ㄴ은 ㄱ을 좋아하는데, ㄱ은 ㄴ을 좋아하지 않는다.
ㄷ은 ㄴ을 좋아하는데, ㄴ은 ㄷ을 좋아하지 않는다.
ㄹ은 ….
슬픔의 악순환이라니.

02
같은 지역을 비슷한 시간에 지나다니면 은밀히 혹은 공공연히 이루어지는 일들을 알 수 있다. 나처럼 주변에 무관심한 인간도 알 수 있을 정도면 상당히 노골적인 일인지도 모른다. 그나마 나의 관심 주제이기도 해서 이제라도 깨달은 것인지도 모르고. 나의 관심 주제가 아니었다면 여전히 몰랐겠지.

어딘지는 밝힐 수 없지만(하지만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다는;;) 내가 주로 다니는 곳에서 공공연히 성매매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걸 깨달은 건 두어 달 전. 첨엔 무심했는데, 어느 순간 ‘혹시…’라며 의심했고, 그 다음엔 확신했다. 방식은 핸드폰과 자동차를 이용하고 있든 듯. 자세한 설명은 성매매의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니 생략. 하지만 핸드폰과 자동차란 단어만으로도 알 수 있는 사람은 알 수 있겠지.

내가 관심을 갖고 연구하는 지역이 아니라 연구할 의사가 없지만 누군가가 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있다. 트랜스젠더도 있는 듯해서 공동연구를 해도 재밌을 것 같다. 다만 한동안 더 이상의 자폭은 하지 않기로 했으니 참아야지. 지금으로 충분하니까. 흑.

03
한 사람의 일생은 왼손의 손목에서 빛난다. 희게 바랜 세월 속에서 환하고 또 아프다.

요즘 시집 몇 권을 읽고 있습니다. 달고 좋아요.

01
채호기 시를 읽고 있습니다. 그중

환한 대낮, 갑자기 엄습한 네 사랑 때문에
나는 내 삶의 항구를 잃어버렸네
-「환한 대낮에」

위의 구절을 읽고 잠시 숨이 멎었습니다. 허수경의 시에서 “아하 사랑! / 마음에 빗장을 거는 그 소리, 사랑!”이란 구절 이후 최고가 아닐까 싶을 정도예요. 길을 걸을 때마다, 잠들기 전, 혹은 샤워를 하거나 그냥 무심할 때마다 “환한 대낮, 갑자기 엄습한 네 사랑 때문에 / 나는 내 삶의 항구를 잃어버렸네”란 구절을 중얼거립니다.

이 시를 읽은 건 다소 우연입니다. 「환한 대낮에」이란 시는 『슬픈 게이』란 시집에 실려 있습니다. 『슬픈 게이』엔 게이인지 트랜스젠더인지 드랙인지 여장남자인지 알 수 없는 어떤 존재를 “게이”란 범주로 설명하고 있는 시가 몇 편 실려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이 시집을 읽은 건 아니고 요즘 찾고 있는 자료와 관련 있어서 읽은 거지만요. 첨엔 필요한 시만 몇 편 읽었는데, 왠지 다 읽고 싶어 처음부터 차근차근 읽기 시작했지요. 좋아요. 그리고 위의 구절에서 그만, 잠시 숨이 막혔습니다.

전 이 시집이 무척 흥미로워요. 게이인지 트랜스젠더인지 알 수 없는 몇 편 때문이 아닙니다. 프로이트 옹은 애도와 우울을 구분하고 있는데요, 애도는 대상의 상실을 받아들이며 충분히 슬퍼하며 떠나보내는 과정이라면, 우울은 대상의 상실을 부인하며 자신과 동일시/합체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합니다. 정확한 설명은 아닐 수도 있지만, 대충 넘어가고요. ;;; 이런 구분에 따르면 채호기의 시집은 우울증적 동일시의 지난한 과정을 보여줍니다. 몇 편을 제외하면 우울과 동일시란 주제를 다루고 있죠. 그 정점에 “게이”라는 명명으로 게이 혹은 트랜스젠더를 설명하고 있죠. 법적으론 남성으로 태어났다 해도 자신을 여성으로 동일시하여, 여성인 이들로 설명하면서요. 그렇다면 앞서의 시들이 이성애 구조를 분명히 하냐면 그것도 아닙니다. 시집을 통틀어 연애시라 부를 법한 시 중에서 이성애 관계로 보이는 시는 거의 없으니까요. 언젠가 기회가 되면 이 시집을 분석하는 글을 쓸까요? 글쎄요. 세월이 지나면 알 수 있겠죠.

02
친구에게서 시집 두 권을 선물 받았습니다. 이미 몇 달도 더 지난 생일의 선물입니다. 철지난 생일은 챙기지 않는 관례에 비춰 너무 늦은 선물이지만 괜찮습니다. 무려 10년 지기인 친구의 늦은 선물이지만, 괜찮습니다. 원래 이런 관계니까요. 하하. 그리고 사실, 몇 달 만에 만난 게 아니라 (제 기준으로)자주 만났지만 무려 8달 전에 제본한 제 논문을 이제야 줬으니까요. 아하하.

진은영의 시집 두 권인데 상당히 좋아요. 오랜 만에 시집을 읽으며 돌아다니고 있는데, 문득 아직도 시집을 읽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낯설음을 느꼈어요. 뭐랄까, 시인은 많아도 시를 읽는 사람은 없다는 얘길 몇 년 전 얼핏 들은 기억이 있거든요. 단지 그 때문이죠.

암튼 달고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