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기억: 2009년 7월 22일을 기억하는 한 방법

대여섯 살 무렵 살던 집에선 석유풍로로 음식을 했다. 풍로를 사용할 때마다, 석유를 채울 때마다 석유 냄새가 진동했다. 그래서일까? “휘발하다”란 단어를 들을 때마다 석유풍로가 같이 떠오른다. 아마, 석유와 휘발유를 헷갈렸기 때문이겠지. 정유소의 냄새는 싫지만 “휘발하다”란 단어는 좋다.
(비슷한 이유로, 사실 “풍로”보단 “곤로”란 말을 더 좋아한다.)

“기억이 휘발하다”라고 쓴다면 명백한 잘못이겠지. 하지만 이 표현을 좋아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형태를 바꿔가는 기억의 속성과 “액체에서 기체로 변하는 작용”이란 휘발의 정의가 닮았기 때문이다. 기억은 ‘왜곡’하지 않는다. 형태를 바꿔갈 뿐이다. ‘왜곡’이란 원본, 절대적인 진실을 가정하는데, 도대체 누구의 기억을 원본으로, 절대적인 진실로 말할 수 있을까? 모두가 “기억”한다는 점에서 “왜곡”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러니 기록이 기억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다. 기록은 그 자체로 기억이자 기억의 시작이다. 어떻게 변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이 변화때문에, 과거의 기록과 현재의 기억 간의 간극을 확인하는 일은 즐겁다. 기억이 어떤 식으로 휘발했는지 어림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진부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몇 가지를 기록하기 위해서다.

사사오입보다 더 한 방식으로 미디어관련법이 통과되었음을 기록하자.
이 와중에 대기업이 은행을 소유할 수 있는 금산분리정책 완화 법안도 통과되었음을 기록하자.
경찰이 시위를 진압한다고 테이져건을 쏘아 사람이 맞았다는 사건도 기록하자.
부산에서 폭우로 난리였을 때, 구의회 의원들은 해외관광을 떠났다는 사건도 기록하자.

이 외에도 기록할 일은 무수하다. 시발점으로서, 최소한 이 정도는 선별해서 기록-기억하자.

[성명서] 현병철 인권위원장 취임을 규탄하고 현 체제의 국가인권위원회와의 협력사업을 철회한다!

사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훨씬 많아요. 지금은 할 수 없는 이야기를 10년 정도 지나면 할 수 있을까요?

아울러 메일을 발송하는 그 순간에도 망설였어요. 다른 단체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치면 어쩌나 하는 우려였죠. 그럼에도 결국 결정했네요.

이 일을 어떻게 회고할까요? 조금 두렵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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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병철 인권위원장 취임을 규탄하고
현 체제의 국가인권위원회와의 협력사업을 철회한다!


지난 2009년 7월 16일 현 정부는 현병철씨를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 인권위원장으로 내정하였다. 이에 많은 인권단체들은 현병철씨가 현재까지 인권 전문성, 인권활동경험 및 인권감수성에 대한 고민이 없음을 지적하고 있다. 특히 17일 인권단체들은 자진사퇴를 촉구하기 위해 현병철씨를 방문하여 인권위원장의 자격을 지적하고 입장을 밝힐 것을 요구하는 자리를 마련하였다. 하지만 인권단체들과 소통을 중시해야 하는 인권위원장 내정자 현병철씨는 뒷문으로 도망치는 모습을 보였고, 취임식은 20일로 연기되었다. 이러한 현병철씨가 인권위를 독립기관으로 수호할 능력(정파적 독립성)과 의지가 있는지 의심스럽다. 그럼에도 20일 현병철씨는 인권위원장으로 취임을 졸속으로 강행했다. 과거부터 인권위 축소를 강행하고 국무회의에서 인원감축을 단행한 상황에서, 현병철씨 취임은 인권위 독립성 훼손을 심히 우려케 한다.

인권위는 정치적, 경제적 논리에 좌우되지 않는 독립성을 지녀야 한다. 이 독립성에 따라 인권을 침해하는 주체들–심지어 그 주체가 국가권력기관이라 하더라도–에게 반대하고 시정권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관료적 관습에 따르지 않고 비가시화되어 있는 인권침해 영역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관련 인권단체들의 노력과 역할을 공식화해야 한다. 이 역할들은 우리가 인권위에 요구하는 최소한의 역할이다. 그러나 인권을 경제와 실용의 논리로만 접근하는 현 정부의 편협한 태도로 우리는 인권위의 최소한의 역할을 기대할 수 없다.

인권위는 이미 경찰청이 5월 중순에 발표한 “2008년 불법폭력시위 관련 단체 현황”에 인권위 협력사업 단체가 포함되었을 때 사업비 지급을 미루었다. 관련 단체들은 인권위에 정부보조금 조건에 대한 입장 표명을 요구했지만, 인권위는 어떤 공식적인 입장 없이 뒤늦게 사업비만 지급한 채 침묵하고 있다.

이상의 정황으로 보았을 때 우리는 인권위를 협력사업기관으로서 신뢰할 수 없다. 2009년도 인권위 협력사업 단체인 트랜스젠더인권활동단체 지렁이는 이러한 불신에 따라 우리의 결과물이 현 인귄워 체제에서 어떻게 쓰일 지 알 수 없어 우려된다. 이러한 우려가 인권위의 지난 8년 간의 성과와 독립기관으로서의 역할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현 정권 하에서의 인권위 행보와 전망은 우리에게 불신과 우려만을 주고 있어, 우리는 더 이상 현 인권위와의 협력 사업이 인권신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인권단체들의 협력사업 결과물이 향후 어떻게 이용될지에 대해 신뢰를 주지 못 하는 상황은 되려 인권위를 인권감시대상으로 인식하게 한다. 아울러 인권위는 인권단체를 정부사업의 수주단체 정도로 대하는 건 아닌지도 의심스럽다.

이에 우리는 2009년 인권위 협력사업을 철회하고 인권위의 조속한 ‘정상화’를 촉구한다. 우리는 우리가 기대하는 수준의 인권위가 아닌 상황에선 더 이상 같이 사업을 지속할 수 없다.

2009년 7월 21일
트랜스젠더인권활동단체 지렁이

논문과 단행본?

지난 일요일 세미나를 준비하고 있는데 ㅈㅎ님에게서 문자가 왔다. 예전에 받은 논문을 읽고 있는데 단행본을 내란 내용이었다. 그냥 예의상 하는 말로 넘겨들었다. 그럴 내용이 아니란 걸 알기 때문이다. 내 논문에 대한 나의 평가는, 글쓴이의 주장이 없는 발제문이니까. 그래서 그냥 잊었다.

ㅈㅎ님과 같이 하는 프로젝트가 있어, 어제 모처에서 만났다. 근데 논문을 책으로 내라는 얘길 시간이 날 때마다 반복하는 거다. 일요일에 받은 문자를 빈말로 들었기에 조금 놀랐다. 좀 정리를 해서 단행본으로 나오면 여성학 교재로 정말 좋겠다고. 조금만 쉽게 풀어 쓰면 학부와 석사초급과정 교재로 좋겠다는 말과 함께. 논문의 현실과는 별도로, 이 정도의 평가에 황송할 따름이다.

재밌게도, ㅈㅎ님의 얘기를 들으며 내 논문을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나는 도대체 내 논문에 무얼 기대한 걸까? 다소 혼란스러웠다. 나의 평가대로 발제문이라면, 발제문 역할에 충실하면 그것으로 충분한 건 아닐는지. 논문을 쓰기 전엔 정희진 선생님의 석사논문수준을 욕망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건 너무 당연하잖아(『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가 정희진 선생님의 석사논문이다ㅠ_ㅠ). 현재 한국에서 젠더를 논의할 때 많은 경우 트랜스젠더를 배제하거나 책 말미에 덧붙이는 식이 대부분이다. 관련 문헌을 찾거나 접근하기도 쉽지 않는데, 상당수가 외국어거나 이제는 구할 수 없는 자료집이나 보고서 정도다. 이런 상황에서 트랜스젠더 이론을 중심으로 젠더 논의를 재배치한 책이 한 권 정도 있다면, 어떤 식으로건 쓸모가 있지 않을까? 『젠더 트러블』을 쓸 것도 아니고 그럴 능력도 없음을 아는 상황에선 간단한 입문서 정도도 괜찮지 않을까?
(사실 3년 전부터 미국의 트랜스젠더 이론을 정리하는 책이 나온다는 얘기가 있어 굳이 내가 낼 필요가 없는데, 아직 감감무소식이다.)

뭐, 이런 고민을 했다. “인세 계약을 하면 일 년에 10만 원 정도의 인세는 들어오지 않겠냐”란 말에 “그럼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의 생활비는 벌 수 있겠어요”라는 농담도 주고받으면서. 흐흐. 근데 정말 준비해볼까?

사실 이 모든 고민과 농담에 결정적인 문제가 있다. 그건 내 논문을 책으로 낼 출판사가 있을 리 없다는 것. 으하하. 내 논문을 책으로 낼 출판사가 없다는 걸 확신하니 이런 망상도 하는 거다. 크크크. (결국 자학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