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환경, 우분투사용자, ‘소수자’운동의 연결고리 상상하기

며칠 전 인터넷교보문고에서 책을 주문했다. 후치에선 인터넷결제를 잘 안 하니, 오랜 만에 나스타샤에서 윈도우를 실행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결제에 실패했다. 많은 이들이 알겠지만 인터넷결제를 위해선 몇 가지 Active-X(라 쓰고 악성코드라고 읽는다)를 설치해야 한다. 키보드’보안’ 프로그램을 설치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고, 결제에 실패했다. 더구나 공포의 파란화면까지 떴다. ㅡ_ㅡ;; 그 키보드’보안’ 프로그램이 시스템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다만 파란화면은 처음이라 짜증났다.

어쩔 수 없이 후치에서 윈도우를 실행했다. 동일한 문제가 발생했다. 키보드’보안’이라고 주장하는 프로그램에서 동일한 문제가 발생했다. 결국 나는 계좌이체를 선택했다. 다음날 아침에 입금하기로 했다.

계좌이체를 한다면, 굳이 윈도우-인터넷익스플로러(IE) 환경일 필요는 없다. 계좌이체를 선택하면 별도의 프로그램을 설치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예외도 있다. 텐바이텐에선 계좌이체를 선택해도 ‘보안’ 프로그램 설치를 강요한다.

아무튼 난 다음날 계좌이체를 했다. 인터넷뱅킹을 하지 않아 우분투/리눅스를 사용하는데 불편이 없었다. 물론 후치에서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윈도우를 사용하긴 했다. 그래도 결제할 일이 거의 없었고, 결제 할 일이 있으면 그때만 잠깐 윈도우를 사용했다. 이번에 계좌이체로 결제를 하며, 윈도우를 사용할 빈도가 더 줄겠다고 중얼거렸다.

우분투/리눅스를 사용하며 좋은 건, 필요한 프로그램을 모두 별다른 비용 지불 없이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필요한 프로그램을 불법으로 다운로드 받아서 사용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었다. 유료가 아니어도 사용하기에 충분히 좋은 무료/자유 프로그램이 많기 때문이다. 즉, 컴퓨터의 하드웨어만 있으면 더 이상의 비용을 지불하지 않아도 된다.

예전에, 컴퓨터 데스크톱이나 노트북을 살 때마다 매번 윈도우 프로그램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것에 문제제기를 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자신에게 정품 윈도우 OS CD가 있어도, 노트북이나 다른 컴퓨터를 살 때마다 기본비용으로 윈도우 OS 비용을 지불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 글이었다. 나의 경우라면, 후치를 사며 기본비용으로 윈도우 OS를 구매했는데, 학회 넷북을 사며 또 윈도우 OS를 구매해야 했다. 같은 혹은 유사한 프로그램을 두 번 구매한 셈이다. 강매당한 건지도 모르고.

불법을 자행하지 않으면서도 훌륭한 프로그램들을 사용할 수 있다는 건 분명 기쁜 일이다. 그리고 은행이나 현금인출기에 가서 계좌이체를 한다면 굳이 윈도우-IE 환경을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은행이나 현금인출기에 가서 계좌이체를 한다는 건, 외출을 하는데 부담이 없다는 걸 전제한다. 외출하기에 몸이 불편한 사람이라면 우분투/리눅스로는 어떤 형태로건 결제를 할 수 없다. 따라서 누군가는 자신이 원하건 원하지 않건 특정 환경 사용을 강요받는다.

외출이 쉽지 않은 몸과 소득에 상관관계가 있다고 가정한다면(이 가정이 옳다는 증거는 없다) 또 다른 이슈가 발생한다. 한국처럼 윈도우-IE를 강요하는 컴퓨터/인터넷 환경에서 특정 몸-계층은 합법으로 컴퓨터를 사용하기 힘들어 진다. 만약 내가 외출할 수 없는 몸이라면, 그래서 모든 구매는 인터넷결제를 통해야 한다면, 그때도 나는 우분투/리눅스만을 사용할 수 있을까? 최근 나는 누군가에게 내용을 꼭 확인해야 하는 파일을 받았다. 그 사람은 MS 오피스 최신 버전으로 파일을 작성했고, 내가 사용하는 환경(우분투와 윈도우 모두)에선 그 파일을 열 수가 없었다. 물론 그 사람에게 이전 버전으로 다시 보내달라고 하면 되지만, 자유 프로그램을 몰랐다면 어둠의 경로에서 최신 버전을 찾았을 지도 모를 일이다. 계급이 계급을 재생산하고, 계급이 불법을 재생산하는 구조다. 아울러 다른 환경을 사용하려는 선택을 제약한다.

나는 이런 구조들이 소위 말하는 ‘소수자 운동’과 밀접하게 닮았다고 느낀다. 현재 한국에선 인터넷결제를 위해 윈도우-IE만을 사용해야 하는 데, 이건 이성애-비트랜스만 강요하는 것과 비슷하다.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극히 제한되면서도 마치 모든 것이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인 것처럼 호도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리플 같은 곳에선 “불편하면 윈도우를 써라, 네가 우분투를 쓰기로 하고선 왜 그렇게 불만이 많냐”, “다수가 사용하는 걸 사용해라”란 글을 읽을 수 있다. 이런 말은 이성애주의가 아니라 비이성애자 개개인들이 잘못인 것처럼 얘기하는 방식과 다르지 않다. 비단 이성애-비트랜스만이겠는가. 비장애 중심인 구조와도 닮아있고, 정체를 알 수 없는 ‘한민족’이란 환상과도 닮아있고, 학벌, 지연 구조와도 닮아있다. 모든 것이 구조적으로 얽혀 있다는 점에서 우분투사용과 ‘소수자운동’은 무척 닮았다. 그리고 이들은 그 어느 이슈도 별개로 다룰 수 없을 정도로 얽혀있다.

닮아있다는 말이 우분투 사용자가 비이성애자나 장애인과 동일한 위치에 있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기엔 차이가 상당하다. 그저 특정 환경, 특정 조건을 강요당하는 구조에 있다는 점에서 무척 닮았다. 일례로 우분투 사용자 집단과 비이성애 운동 단체가 연대할 수 있을까, 란 질문엔 다소 회의적이다. 우분투 사용자 집단이 모두 이성애-비트랜스라서가 아니다. 그들 모두가 이성애-비트랜스도 아니다. 그저 그 둘 사이의 연결고리를 설명하는 게 쉽지 않을 거라 회의적일 뿐이다. 그래서 이 둘이 같이 연대한다면, 그것만큼 흥미로운 일도 없겠지.

그냥, 요즘 이런 상상을 하면서 살고 있다.

두 영혼의 사람들(버다치), 젠더를 이해하는 다른 방식

딸만 여럿이고 아들이 없는 가족을 상상하자. 그 가족이 사는 사회에서 여자는 사냥을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아버지는 사냥을 도울 아들이 필요하다. 마침내, 아이가 새로 태어났지만 딸이었다. 부모는 사냥꾼이 필요했기에, 그 아이를 아들로 키우기로 결정했다. 그 아이가 5살이 되었을 때 부모는 그 아이가 임신을 할 수 없도록 조치했다. 그 아이는 소년으로 옷을 입었고, 남자들의 기술을 배웠고, 실제로 매우 튼튼하게 자랐고, 훌륭한 사냥꾼이 되었다.
아들이 있는 또 다른 가족을 상상하자. 그 아이는 여자들의 일에 관심을 보였고, 남자들의 일은 피했다. 그래서 부모는 그를 시험하기로 했다. 그들은 작은 울타리에 아들을 데려갔고, 활과 화살, 그리고 바느질 도구가 든 바구니를 넣어줬다. 부모든 울타리에 불을 질렀고, 아들이 무엇을 챙겨 탈출하는지 지켜봤다. 그 아이는 바느질 도구를 챙겼고, 그때부터 그 아이는 딸이 되었다.
-Kessler and McKenna. “Cross-Cultural Perspectives on Gender.” Gender: An Ethnomethodological Approach. Chicago and Londo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8. 21.


위의 문장은 케슬러와 맥켄나(맥케나/맥키나?)가 함께 쓴 책의 일부다. (정확한 번역은 아니고 대충 얼버무린 번역. -_-;;) 미국 인디언 원주민들 중엔 버다치(berdache)로 불렸던, 지금은 두 영혼의 사람들(two-spirit people)로 불리는 또 다른 젠더가 존재했다고 한다. 위에 날림으로 번역한 내용은 두 영혼의 사람들의 일화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인디언 문화를 조사한 인류학자들이 남긴 기록의 일부다.

1978년에 이 책을 쓴 케슬러와 맥켄나의 주장에 따르면, 현존하는 인류학지 중에서 두 영혼의 사람들을 직접 만나 인터뷰를 한 경우는 매우 드물다고 한다(사실상 없다고 한다). 대부분이 옆 부족에 두 영혼의 사람들이 있다고 하더라는 식의 얘기를 전하고 있단다. 암튼 그렇게 기록에 남은 두 영혼의 사람들과 관련한 위의 일화는 젠더를 다르게 상상할 수 있는 여지를 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물론 위의 두 사례는, “어쨌든 결국 남자 아니면 여자로 구분하고 있는 것 아니냐”란 반응을 끌어내기 쉽다. 현재 남아있는 기록을 중심으로 이해했을 때, 현대의 통상적인 젠더 개념으로 이해했을 때, 이렇게 이해할 여지는 상당하다. 그럼에도 이 두 사례가 말하는 젠더 개념은 현대 한국사회에서 접하는 것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우선, 위의 두 사례는 모두 젠더를 소위 “생물학적 본질로 불리는 몸”에 고착된 것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여기서 젠더는 개인이 어떤 역할을 선호하느냐에 초점을 맞춘다. 비록 태어날 땐 생물학 혹은 몸의 외부 형태로 젠더를 결정한다고 해도, 그것이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변화에 유연해서 여성과 남성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인식은, 개인을 둘 중 하나로 설명한다 해도 이분법이라고 단언할 수 없게 한다. 이 유연함은 개인의 젠더를 둘 중 하나로 인식하지 않거나, 인식할 필요가 없다는 걸 이해하고 있기에 가능한 듯하다. 혹은 그것이 그렇게까지 중요한 이슈는 아니라고 여겼거나.

물론 이 두 사례로 인디언 부족들 각각의 젠더 개념을 유추하는 건 불가능하다. 만약 인디언 부족의 젠더 개념을 이분법의 틀로 이해한다면, 그런 이해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는 것만이 유일하게 가능한 이해다.

그런데 …. 사실 첫 번째 사례를 읽으며, 뭔가 운이 좋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만약 새로 태어난 아이가 사냥꾼이 되기 싫었다면 꽤나 괴로웠을 테니까. 부모는 사냥꾼이 되길 강요하는데, 아이는 바느질을 하고 싶어 했다면 부모들은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두 번째 사례에서, 딸이고 싶지만 활과 화살을 좋아한다면 얘기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우선 그 아이는, 아마 매우 똑똑했을 테니, 시험에선 선택하기 어려웠을 거 같다. 바느질 도구를 선택하면 딸로는 살 수 있지만 활과 화살을 사용할 수 없을 테고, 활과 화살을 선택하면 사냥은 할 수 있겠지만 딸로는 살 수 없을 테고. 어쩌면 그냥 빈손으로 탈출했을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그 인디언 부족은 어떻게 대처했을까? 특정 문화적 기호와 젠더가 일치하지 않는 상황에서, 나는 분명 현대 사회의 대처 방법과는 달랐을 거라고 짐작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대처했을까? 아쉽지만 이 역시 상상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야마모토 후미오 『내 나이 서른 하나』

어린 시절부터 마음속에 똬리를 틀고 있던 사랑받지 못한다는 콤플렉스. 오랫동안 사로잡혀 있던 열등감에서 나를 해방시켜준 것은 소설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다음 순간 세상의 빛이 바뀌었다. 소설을 쓸 수 있으면 혼자 살 수 있다고 순수하게 실감한 것이다.
짝사랑은 괴롭고 안타깝다. 남편에게도,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소설에게도. 그 안타까움이 지금까지 나를 움직이는 소중한 보물이었다고, 나는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전철 안에서 비로소 깨달았다.
-야마모토 후미오. 「소설」 『내 나이 서른 하나』 이선희 옮김. 창해.


제목과 작가 때문에 읽었다. 주변에 서른 한 살인 사람이 있다면 권할 수 있는 소설이지 않을까 해서. 아울러 『플라나리아』를 읽으며 이 작가에게 관심이 생겨서 읽고 싶기도 했다.

첨엔 장편인 줄 알았다. 그래서 첫 번째 제목의 이야기가 끝나고 다음 제목의 이야기가 나올 때, 주인공이 여러 명인 소설인 줄 알았다. 근데 아니더라. 서른 한 살인 사람들의 서른 한 가지 이야기를 묶은 책이다. 중편이나 장편으로 이야기를 풀어도 좋을 법한 소재들을 9쪽 분량으로 풀어서일까, 아쉬움이 남는 소재가 많다. 물론 짧아서 더 매력적인 내용도 있고.

「밴드」란 작품은 인상적이지 않을 수 없다. 후미오 작품을 이제 두 권 읽었지만, 단편집 두 권 모두 레즈비언이나 바이가 등장한다.

「소설」은 작가 자신의 이야기 같다. 그리고 위에 인용했듯, 마지막 구절은 유난히 좋다. 사실 마지막 구절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 이 글을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