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원 니시키 씨의 행방』: 형식과 내용 모두가 흥미 진진

소설의 마지막 부분을 읽으며 왜 이렇게 질질 끄는 걸까, 궁금했다. 조금 더 일찍 맺으면 좋을 텐데 싶어 아쉬웠다. 소설을 읽으며 느꼈던 긴장감도 떨어진 상태였다. 그저 마지막까지 몇 장 안 남아 마저 읽는 셈치고 읽었다. 이렇게 긴장감이 풀리고 느슨해진 상태에서 한방 먹었다.

처음 두 장을 읽었을 땐 연작 단편을 읽는 줄 알았다. 장편소설인 줄 알았는데, 첫 번째 장의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주요인물과 두 번째 장의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주요인물이 달랐다. 그래서 같은 공간에서 일하는 인물들 각자의 일상을 다루는 소설인가, 했다. 추리소설인줄 알았기에, 착각한 건가 싶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각 에피소드가 너무 재밌기 때문이다. 『은행원 니시키 씨의 행방』(이케이도 준 지음, 민경욱 옮김) 이야기다.

결론부터 말하면 총 10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각 장 마다 다른 주요인물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처음엔 얼핏 별개의 이야기 같다. 근데 어느 순간 이야기들이 하나의 큰 흐름 속으로 모여든다. 물론 각자의 이야기가 하나의 큰 이야기 속으로 사라지는 건 아니다. 각각의 이야기는 여전히 개별 이야기로 남아 있다. 각각 어느 정도 완성도를 갖춘 단편들이 하나의 이야기를 이루면서, 동시에 전체 이야기를 이루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소설의 마지막 쪽을 덮으며 작가의 내공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구조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소설은 제목 그대로이다. 소설은 제목 그대로 니시키 씨의 행방을 좇고 있다. 중의적이다. [스포일러 있음!] 제목에 니시키 씨의 이름이 등장한다 해도 니시키가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장은 없다.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그때도 니시키는 희미하게 등장한다. 다른 주요인물이 니시키를 추적/추정하는 방식으로 등장할 뿐이다. 어떤 장에선 등장하지 않기도 한다. 존재하는 듯, 존재하지 않는 듯, 존재감이 모호하다. 소설의 결론에 가장 적합한 등장 방식이다. 결론을 읽고 나면 다시 한 번 더 읽고 싶은 바람이 생긴다. 눈치가 없는 나는, 두 번째 읽어야 비로소 니시키 씨의 행방을 추적할 수 있을 거 같다. 소설 진행 과정에서도 니시키가 사라져 동료들이 그를 추적하기 시작하는데, 이런 추적은 다소 표면적이다. [스포일러 끝.]

구조적인 형식만 흥미로운 게 아니다. 각 에피소드는 때때로 숨이 막힌다. 은행원들의 직장 생활을 다루고 있는 이 소설은, 성과지상주의, 실적지상주의에서 스트레스 받고, 좌절하는 개개인들의 모습에 집중한다. 때로 그 장면들이 더 숨막힌다. 목표 실적에 미달하는 사원에게, 부지점장은 인신모독의 욕설을 퍼붓고 지점장은 냉소한다. 주변에선 실적을 올리라고 압박한다. 실적과 성과. 오직 이 두 가지만을 지향하는 직장생활을 세밀하게 그리다 보니, 읽는 내가 힘들다. 어느 정도냐고? 생활비에 쪼들리면서도 직장 생활을 하지 않고 있는 나의 생활에 안도할 정도로.

그럼 이제 미미 여사의 『모방범』을 읽을 때가 된 걸까? 아직일까?
(결론은 언제나 뜬금없음. -_-;;)

과거로의 여행

관련 기사: 시간을 거꾸로 돌릴수 있다?

이럴 땐 미투데이 같은 데 아이디가 있으면 좋을 텐데, 아쉽다. 길게 쓸 만한 글은 아니라서.

위에 링크한 기사 제목을 읽고 문득 떠올랐다. 시간을 거꾸로 돌릴 수 있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할 수도 있다는 것을.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미지의 미래”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지 못 하는 과거로 가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고 인식을 전환하면 된다. 시간이 거꾸로 가면 나이가 젊어져야 한다고 말하겠지만, 이 역시 마찬가지다. 현재의 시간 개념으로 나이 먹었다는 것, 늙는다는 게 실은 시간 ‘역’행인지도.. 벤다민 버튼 식의 시간이 ‘순’행이고 지금 우리 삶이 ‘역’행인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 나는 기억할 수 없는 어떤 과거의 글을 쓰고 있는 중이다. 내가 남긴 흔적들은 모두 다가올 과거의 기록이다.

밑줄: 아마미야 가린, 마쓰모토 하지메, 이케이도 준

01
“가난한 사람에게 ‘애국’은 없다. 조국을 덜 사랑해서가 아니라 가난한 사람에게 고통을 더욱 전가하는 국가는 사랑받을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아마미야 가린(김은남, 박근영 “일본 ‘로스 제네’, ’88만 원 세대’를 만나다” 『시사인』 제86호 2009년 5월 9일)

늦은 오후 이번 주 『시사인』을 사서 특집을 읽다가 이 문장에 끌렸다. 아마미야 가린은, 이미 아는 사람들도 많을 것 같은데,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던 극우에서 반(反)빈곤 운동을 주도하는 신사회 운동의 기수로 변신한 인물이라고 한다. 그가 쓴 책이 최근 번역되어 나왔다고 한다. 도서관에서 읽을 수 있으면 읽을까 고민 중이다.

02
“한국과 일본의 백수가 연대할 수 있을까요?” 누군가 진지하게 물으면 이런 식이었다. “가능하지 않을까요? 한가하니까요.”
-마쓰모토 하지메(김은남, 박근영 “정신 차려, 자네도 각 잡힌 가난뱅이야” 『시사인』 제86호 2009년 5월 9일)

역시 『시사인』의 같은 특집에 실린 글이다. 마쓰모토 하지메는 ‘가난뱅이 운동’을 한다고 할까? 암튼 이 사람의 책도 나중에 챙겨 읽어야겠다. 이 기사의 말미엔 그의 다음 말을 인용하고 있다.

“정규직 됐다고 ‘우등반’에 들어갔다고 생각하는 자네! 우쭐거릴 일이 아닐세! 안 된 얘기지만, 자네도 이미 각 잡힌 가난뱅이란 말씀이야. 진짜 우등반이란 말이지, 잠깐 쉬거나 몇 년쯤 아무 일 안 해도 저절로 돈이 굴러 들어오는 놈들이라고.”

03
“그때 당신네 차장이 내게 와서 이럽디다. 주거래은행 같은 금융관행은 이제 사라졌습니다. 주거래, 주거래 하면서 매달리는 건 곤란합니다.”
할 말이 없었다. 도모노는 입술을 깨물었다.
“사장님, 정말 죄송합니다.”
사과하는 길밖에 없었다. 과거에 어떤 벽창호가 했던 말을 자신이 지금에 와서 사죄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활활 불타오르고 있는 오키도의 분노를 잠재울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생각이었다.

(이케이도 준. 『은행원 니시키 씨의 행방』. 민경욱 옮김. 58-59쪽)

도모노는 은행 직원. 어느 회사 사장에게 자신이 다니는 은행에서 대출을 하라고 부탁하러 갔는데, 사장이 과거 그 은행에서 당한 수모를 말하는 장면이다.

이케이도 준의 소설은 은근히 위의 두 기사와 어울린다. 물론 내가 이케이도 준의 글을 인용한 부분은 전혀 다른 이유에서 밑줄을 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