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굴 속,

01
도서관과 같은 공간에 가면 4인 용 책상 하나에 한 명만 앉는 경우가 많아요. 친구와 같이 도서관에 가는 게 아니라면 대체로 누군가가 앉아 있는 책상에 앉지 않더라고요. 책상 당 한 명씩 앉고 난 후, 더 이상 혼자 앉을 수가 없을 때에야 누군가가 있는 자리에 앉죠. 그것도 대각선 자리.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일까요?

시험기간의 도서관을 사용하기란 참 힘들어요. 사람들이 많아 앉을 자리가 없는 경우도 있거니와 혼자 앉을 수 없기 때문이죠. 그래도 부득이한 경우 누군가가 앉아 있는 책상의 자리 하나를 차지해요. 근데 전 이게 참 불편해요.

얼마 전에도 그랬습니다. 자리가 남는 책상에 가방을 풀고 앉았는데, 계속해서 옆 사람이 신경 쓰이더군요. 제가 괜히 상대방을 방해한 것만 같은 느낌이라서요. 상대방의 공간을 부당하게 침해한 기분이라서요.

얼추 일주일 혹은 열흘 전엔 어떤 선생님에게 아는 사람을 추천할 일이 있었어요. 어떤 주제로 글을 쓰기 좋은 사람들을 추천해줬으면 한다는 말에, 제 멋대로 추천했지요. 전 그냥 추천만 하면 그만인 줄 알았거든요. 근데 그 선생님이, “메일을 쓸 때 너에게 추천받았다고 쓸게.”라고 말했어요. 전 손사래를 치며 거절했어요. 제 이름은 빼달라고.

만약 누군가가 어떤 주제로 글을 쓸 사람으로 저를 추천했다면 전 어떤 기분일까요? 어떤 부담이야 있겠지만, 그래도 기분이 조금은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쓸 수 있으면 쓰고 아니면 사양하고요. 이걸 거꾸로 하면 상대방이라고 기분 나쁠 이유는 없겠죠. 하지만 전 상대방이 기분 나쁠 수도 있겠다고 상상했습니다. 이유는 다름 아니라 제가 추천했기 때문이죠.

작년 말부터 이런 상태로 살고 있습니다. 제 몸이 살얼음이에요. 혹은 살얼음을 조금 바꿔, 살유리거나.

02
상태가 상태이니, 얼추 한 달 전부터 블로그를 닫고 싶은 욕망에 시달렸습니다. 주기적으로 겪는 감정이기도 하고요. 이제와 고백하자면 만우절 특집으로 하고 싶었던 일 중 하나는 블로그 리뉴얼과 함께 폐쇄였어요. 만날 이런 바람으로 [Run To 루인]에 접속해요. 다만, 일시폐쇄를 한 번 경험하면, 습관이 될 것 같아 걱정이었죠.

그러다 며칠 전, 이곳은 저만의 공간이 아니란 걸 (마치 처음인 것처럼)깨달았습니다. 이곳의 호스팅 비용, 도메인 비용을 결제하는 사람이 저이긴 하지만, 이곳에서 저의 권리는 본문에 글을 쓸 수 있는 것 뿐이란 거죠. 지극히 사적인 공간이지만, 제 멋대로 할 수 있는 공간은 아니더군요. 2005년 8월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이곳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저의 의지만으로 가능한 게 아니죠.
(이렇게 쓰고 내일 폐쇄합니다? 크크크)

도서관에서 소설 읽기: 아멜리 노통브, 라디오헤드

이틀 전 저녁엔 자료를 찾으려고 도서관에 잠시 들렀다가, 그냥 자리 하나 차지하고 책을 읽었다. 아멜리 노통브의 얇은 소설책 두 권. 하나는 『적의 화장법』. 지난 일요일 아침에 라디오에서 이 책을 소개했다. 몇 해 전에 읽었지만, 내용이 떠오르지 않아 다시 읽었다. 읽는 김에 최근작 『제비 일기』도 읽었다. 우연의 일치일까? 두 소설엔 공통점이 너무 많았다. 노통브의 소설 대부분에 등장하는 것만 같은 강간/성폭력, 글쓰기, 살인과 같은 주제/소재는 여전했다. 아울러 타인의 이름을 알고자 하는 욕망, 사랑하는 사람의 가장 내밀한 순간인 그의 죽음을 목격하는 행동도 똑같이 등장했다. 기시감을 느낄 정도였다. 내가 노통브의 소설을 열렬히 좋아한다면 시간 순서로 읽으며 차근차근 분석했을 거 같다. 내겐 노통브 소설이 그저 가끔 떠오를 때 읽는 정도라 다행이라면 다행. 그나저나 최근작 『제비 일기』엔 힘이 너무 들어갔다는 느낌이다. 어떤 의미, 은유와 같은 것을 만들려는 태도가 두드러져 재미가 덜했다. 세월이 지나도 살아 남는 고전을 쓰고 싶은 작가의 욕망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달까.

『제비 일기』를 읽으며 기시감이 들었지만 계속 읽은 건 소설 내내 흐르는 라디오헤드의 노래 때문이다. 내가 라디오헤드를 열렬히 좋아해서가 아니다. 그저 신보가 나오면 관심을 가지는 정도다. 라디오헤드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건, “Creep”이나 [OK Computer]와 같은 앨범 때문이 아니라, [Kid A] – [Amnesiac] – [Hail to the Thief]으로 이어지는 스타일 때문이다. [OK Computer]가 나왔을 당시, 무척 많이 들었지만 [Kid A]를 듣고서야 난 이들을 좋아했고 각별한 관심을 가졌다. 이 얘기를 하는 이유는, 『제비 일기』에 등장하는 라디오헤드 음악이 모두 [Kid A] – [Amnesiac] – [Hail to the Thief]에 수록된 노래들이기 때문이다. 소설의 화자는 이 세 앨범을 가장 즐겨듣는다고 말하는데, 그 말에 무척 공감했다. 흐흐. 그래서 책을 읽는 동안 세 장의 앨범도 같이 들었다. 특히, 소설에 곡 제목이 나오면, 그 곡을 들으며 책을 읽었다. 이 재미가 각별했다.

아울러, 늦은 저녁에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거, 꽤나 괜찮았다. 무엇보다 지금이 시험기간이라 시험공부하는 이들로 가득한 곳에서 부담없이 소설책을 읽는 재미라니! 그래서 더 즐거웠다. *사악* 사실 나, 사람들이 모두 시험공부 중일 때 혼자 부담없이 소설책 읽으며 노는 거 꼭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나름 뿌듯하기까지 했다. 왕유치한 거 나도 안다ㅡ_ㅡ;;;

“Your life, take two.”: 성형수술, 체중감량수술, 성전환수술의 모호한 ‘경계’

“Your life, take two.”

위의 구절은 어느 광고의 카피라고 한다. 그것도 무척 유명한!(난 얼마 전에 알았다.) 이 카피를 이해하는 핵심은 “take two”다. 음악인들이 곡을 녹음할 때면 한 번에 끝내지 않고 여러 번 녹음하는 경우가 있다. 이때 처음 녹음한 버전을 take one, 두 번째 녹음한 버전을 take two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런 표현은 ㅅㅌㅈ를 통해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럼 위의 광고 카피, “Your life, take two”를 어떻게 번역할 수 있을까? 당신의 삶, 두 번째? 당신의 삶, 다시 시작하기? 당신의 삶, 부활? 어느 번역도 충분하지 않다. 이 모든 의미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당신의 삶을, 마치 처음처럼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의미일 테니까. ‘리셋’으로 이해해도 괜찮을 거 같다.

그럼 이 광고 카피는 어디에서 사용했을까? 이게 중요하다. 이 카피는 체중감량수술 지면광고에 등장했다고 한다. 위(胃)의 크기를 줄이는 것과 같은 방식의 체중감량수술을 통해 ‘다시 태어날 기회’를 잡으라며, “Your life, take two”를 사용했다고 한다. 의미를 파악한 순간, 난 곤혹스러웠다. 광고카피로서 이보다 절묘할 수 있을까 싶으면서도 유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분이 무척 복잡했다. 과연 성형수술과 체중감량수술, 그리고 성전환수술을 구분하는 경계는 어디일까? 트랜스젠더들에겐 성형수술이 성전환수술의 일부란 점에서 둘을 구분하기 힘들다는 의미만이 아니다. 많은 경우, 비트랜스들의 성형수술이나 체중감량수술 역시 ‘여성’되기, 다시 태어남과 같은 수사를 사용하고 있다. 동일한 수식어를 사용한다고 같은 의미일 수는 없다. 비트랜스여성이 성형수술을 통해 ‘여성되기’를 경험하는 것과 mtf/트랜스여성이 (성형과)성전환수술을 통해 ‘여성되기’를 경험하는 것을 동일한 경험으로 수렴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간단하게, 전자는 형에서 언니로 전환하는 과정은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다. 반면 후자는 ‘하리수’ 같아도 여전히 형으로 남는 경우가 많다. 성을 바꾼다는 것에 상당히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사회에서, 성전환은 성형보다 좀 더 부담스럽고, 널리 시행되기 어렵다.

그렇다고 성형수술이나 체중감량수술이 성전환수술보다 덜 중요하거나, 덜 심각한 것도 아니다. 어느 쪽이건 어떤 규범적인 몸/젠더 되기란 점에서 유사한 위치를 점한다. 성형수술, 체중감량수술, 성전환수술은 모두 사회에서 말하는 ‘여성’과 ‘남성’이라는 것이 실재 존재할 수 없는 허구라는 걸 폭로한다는 점에서 각자가 그리는 지형도는 유사하다. 외과수술을 통하지 않고, 소위 ‘자연미인’이 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점을 감안하면, ‘소위 말하는 여성’, ‘소위 말하는 남성’이라는 식의 표현 방법, ‘소위 말하는’이란 수식어를 은폐한 ‘여성’과 ‘남성’은 모두 굉장히 협소한 범주이자 실재하기 힘든 기이한 범주다. 그런데도 이 셋은 동일하다고 말하자니, 껄끄럽다. 그래서 상당 부분 겹치고 어느 정도만 겹치지 않는다는 식의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 셋을 간단하게 구분하기 꺼리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성형수술이나 체중감량수술은 성(섹스, 젠더)이 바뀌는 경험이 아니라고 단언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영화 『미녀는 괴로워』에서도 잘 나타나듯, 성형수술과 체중감량수술 역시 젠더 경험의 변화를 겪는다. 이 변화 경험을 성전환수술과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단언할 근거는 무엇일까? ‘어쨌거나 성형수술이나 체중감량수술은 성전환수술과는 달라!’라고 말하는 건, 자칫 비트랜스의 젠더를 고정된 것으로 여길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마치 트랜스젠더의 젠더만 특별하고 비트랜스젠더의 젠더는 단일하고 동일하다고 가정하는 것처럼. 주민등록상의 성별을 바꾸고자 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차이 외에, 이들 간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수 있을까? “Your life, take two”란 구절은 성전환수술 광고에 사용해도 큰 문제가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또 얼마나 복잡한 고민을 해야 할까? 아, 아직도 부족한 나를 책할 뿐이다. ㅠ_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