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담

글 하나를 준비하고 있는데 일정이 꼬였다. 7월 초부터 글 작업을 해야 했는데 참고문헌 읽을 게 늘어서 미루다보니 어느 순간 많이 밀렸다. 물론 특정한 마감 일정이 있는 글은 아니기에 늦어진다고 해서 큰일이 나진 않는다. 내가 정한 마감 시한에서 밀리고 있을 뿐. 다만 다음주부터 휴가라 휴가를 갔다 오면 그간 읽은 것과 고민, 어떤 리듬을 잊어버릴까/잃어버릴까 이게 걱정이다. 다시 처음부터 하는 기분일 거라 난감하달까. 뭐 휴가 자체는 좋은 일이지만.

만약 본인의 정치적 입장과 지향은 반전, 평화운동, 총기산업 반대 등인데 밀리터리 덕후라면 이 간극을 어떤 식으로 풀어나갈까? 자신이 진심으로 옳다고, 자기 삶의 지향이라고 믿는 가치와 덕후 분야가 충돌할 때 이 간극을 어떤 식으로 조율할 수 있을까? 문득 떠오른 궁금함이다. 이것은 아무런 모순이 아니며 갈등이 아닐 수도 있지만

폴리아모리 정치학을 인식하기: 대충 쓰는 메모

이른바 이성애 부부 사이에서 HIV/AIDS는 남성/남편이 여성/아내에게 전염시키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유는 부부 사이엔 신뢰가 있기에 성관계에서 콘돔을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믿음/강요 때문이다. (이성애 부부/관계만이 아니라 동성 성애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남편/남성은 어디서 바람을 피거나 외도를 해도 결혼규범에 비추어 잘못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잘 없는 사회에서, 부부는 평생 신뢰하는 관계란 망상이 강박인 사회에서 발생하는 일이다.
(HIV/AIDS 감염 자체가 나쁜 일인가는 또 다른 논의를 논하고, 세이프섹스 정치/정책이 무엇을 보호하는가 역시 또 다른 논의를 요하나 여기선 생략…)

법적 부부 관계에 있는 두 사람 중 한명이 이른바 간통을 했고 상대방이 그 장면을 목격했을 때 그는 깊은 빡침과 분노, 혐오, 불신, 우울 등을 느낀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간통 장면을 목격한 상대방이 그 순간 간통한 자신의 파트너를 살해를 할 경우, 이 살해는 정상참작이 될 때가 있다. 물론 살인죄에 따른 처벌 자체가 면죄되지는 않지만 감형되거나 동정을 받는다. 부부는 평생 서로를 속이지 않고 신뢰를 줘야 하며 서로에게 헌신해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다.

한국에서 남성이, 부부 관계가 아닌 전 여성애인이 자신을 만나주지 않는다고, 혹은 자신을 배신(!)하고 다른 사람을 만났다고 살인하는 경우가 잦다. 이것은 단순히 여성을 남성의 소유물로 이해해서만은 아니다. 이런 이해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배타적 일부일처 관계라는 망상적 강박, 강박적 망성, 지독한 사회 지배 규범과도 긴밀하다.

요즘 계속 관련 글을 읽고 있다. 그러며 깨닫는 바는 폴리아모리 정치학을 훨씬 더 진지하고 중요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아울러 이른바 사회적 약자로 분류되는 집단에게 있어 폴리아모리 정치학은 생존 전략으로 진지하게 사유할 필요가 있다. “네가 감히 날 배신하고/날 버리고 다른 사람을 만나?”라며 살인하고 이 살인행위가 정서적으로 공감되는 사회에서 배타적 일부일처 관계를 문제삼고 폴리아모리 관계를 더 적극적으로 사유하는 행위는 정말 중요하다. 실제 폴리아모리 관계를 맺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 사회에서 강력하게 작동하는 규범, 그리하여 살인도 용서하거나 어느 정도 정상참작하는 태도를 근본적으로 다시 사유하기 위해 폴리아모리 정치학은 중요한 인식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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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준비하는 글에 들어갈 아이디어 메모.
폰으로 대충 메모만 남기느라, 몇 가지 고민을 빼고 쓰느라 글이 엉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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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할 사람은 없겠지만… 폴리아모리 정치학이 유일한 저항 방법이거나 최선의 대응이란 뜻은 아닙니다. 훨씬 더 복잡한 문제여서리… 정치학을 해법 같은 걸로 사유하는 건 더욱 위함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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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맥락에서 동의와 신뢰 개념을 근본적으로 회의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나를 기록하는 방식은 어떻게 바뀌는가

구글맵에 있는 location history 혹은 Timeline(타임라인)(https://www.google.com/locationhistory)을 살펴보면 나의 일상을 따로 기록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몇 시에 어디로 갔고,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어디에 있었고, 해당 시간에 사진을 찍었으면 그때 찍은 사진이 무엇인지 모두 한번에 확인할 수 있다. 물론 내가 있던 위치나 가게 상호명의 경우엔 오차 혹은 오류가 생기기도 하지만 나름 정확하게 표시된다.

구글의 My Activity(https://myactivity.google.com/)를 확인하면 내가 구글 계정으로 무엇을 했는지 모두 다 나온다. 안드로이드폰과 크롬북, 크롬 웹브라우저를 사용하기에 이런 정보는 더욱 자세하고 다양하게 나온다. 몇 시에 무슨 앱을 사용했고, 몇 시에 무엇을 검색했고, 몇 시 몇 분에 구글맵에서 어느 위치를 검색했고, 내가 어떤 사이트를 방문했고, 몇 시부터 몇 시까지 행아웃을 몇 번 사용했고… 행아웃 메시지 같은 거야 나타나지 않지만 나의 활동 내역의 상당 부분이 꽤나 정확하게 기록된다.
일종의 기록으로서, 나는 이 블로그에 나를 기록할 필요가 있을까? 물론 구글 타임라인이나 액티비티가 나의 최근 고민을 작성하지는 않는다. 그러니 블로그의 의미는 남아 있다. 하지만 과거, 다이어리르 사용하던 시절 남기곤 하던 기록, 몇 시에 어디에 갔다, 어디서 누굴 만났다 정도의 기록은 더 이상 애써 남길 필요가 없는 일이 되었다. 6월의 어느 금요일 저녁에 어느 식당에서 음식을 먹었다면 그리고 그 음식을 촬영했다면, 그 모든 걸 구글 타임라인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 나는 더 이상 내 자잘한 일상을 애써 기록할 필요가 없다. 그냥 안드로이드 폰 혹은 구글 계정이 로그인된 기기를 몸에 지니고 다니면 그만이다. 그럼 나보다 더 정확하게, 시간까지 정확하게 기록해준다.
(이것은 언젠가 어떤 사건에서 알리바이로 요긴하게 쓰일 수도 있다.)
이럴 때 기록한다는 행위는 무슨 의미가 될까? 더 이상 내가 나의 일상을 남기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괜찮은 시대에 기록이란 무엇을 의미할까? 기록에 다소 집착했던 나는 이제 더이상 무엇을 기록할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예를 들어 구글 캘린더에 나의 약속을 다 적어두고 있는데, 타임라인과 캘린더가 결합하면 더 강력한 기록이 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럼에도 일상을 꾸준히 기록한다면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 종종 궁금하다.
(예를 들어 구글이 트위터를 인수하고, 구글 서비스와 결합시킨 다음, 나의 타임라인에 내가 쓴 트위터 내용까지 표시하기 시작한다면? 몇 일 몇 시 어느 장소에서 내가 어떤 트윗이나 리트윗을 했는지 모두 확인할 수 있다면? 혹은 다른 블로그나 게시판을 구글서비스와 결합시켜서 타임라인에 표시할 수 있게 된다면? 그런데 언젠가 이런 시대가 올 것도 같다.)
물론 이런 시대로 바뀌고 있기에 나는 블로그가 더 중요하다고 믿는다. 내가 어떤 고민을 하는지에만 집중하면 되기 때문이며 블로그는 내 고민을 충분히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정말 안일하고 단순한 결론이다. 나는 이런 결론에 머물겠지만 세상은 더 복잡하게 변하고 있다. 어느 순간이 되면 나의 고민을 기록하는 행위 자체도 무의미해질 수 있다. 기기를 뇌에 직접 이식하는 세상이 올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내가 죽기 전에 충분히 겪을 수 있는 일이라고 믿는다. 자, 그럼 전통적 의미의 몸, 기기와 분리된 몸의 의미는 어떻게 재구축될까? 니키 설리반이 말했듯 소마테크닉의 의미를 얼마나 더 복잡하게 사유해야 할까? 나는 나의 욕망이나 행위를 어디까지 기기에 위임/대리할 수 있을까? 전통적 의미의 육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무엇이 될까?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그런 시대에 나 같은 인간은 가장 쓸모 없는 존재가 될 것이다. 이것만은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