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위, 자격증,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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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은 또 예전 일본의 박사 학위란 학문 연구에 큰 업적을 남긴 사람이 은퇴하기 직전에 받았던 ‘성공 보수’였다는 점을 지적한다. 반면 요즘의 박사 학위는 자동차를 굴리기 위해서 따는 ‘운전면허증’으로 평가 절하한다.” (채명석. “박사 학위 우리 아들, 가문의 ‘애물’이여.” <시사인> 82호 2009년 4월 11일. 39쪽.)

이번 주 <시사인>에, 일본의 경우 박사 학위 소지자의 취업률이 60% 정도라는 기사가 실렸다. 다른 기사보다 이 기사를 먼저 읽었다.

사람들과 농담처럼, 학위는 자격증이라고 말할 때가 있다. 맞다. 지금의 학위는, 폐쇄적인 학제에서 교수와 강사 노릇을 할 수 있는 자격증에 가깝다(연예인과 같은 유명인은 별개로 하고). 문제는 학위가 자격증에 가까운 것과는 상관없이 학위가 여전히 권위와 우월한 권력으로 통한다는 점이다. 때때로 학위는 지식을 독점할 권리, 특정 지식에 독점적 소유권을 주장할 권한과 같다. 어떤 경우엔 학위 소지가 곧 전문가란 오인을 유발한다. 하지만 학위란 사실 학교의 돈장사잖아.

그나저나 취업률은 남 얘기가 아니다. 나 자신이 (적어도 내겐) 애물단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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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교수와 꽤 오랫 동안 연락을 하지 않아, 안부 메일을 보낼까 고민하고 있었다. 오늘 저녁에 메일을 쓰리라, 다짐하고 있을 때 선생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런 저런 안부를 묻고 근황을 전하다가, 논문 얘기가 나왔다. 학위 논문 얘기와 학술지에 투고할 논문 얘기 등등. 선생님은 참고 문헌 적당히 읽고 얼른 논문을 쓰라고 다그치셨다. 난 변함 없이 망설였다. ‘내가 할 수 있을까? 내가 해도 괜찮을까?’라고 고민하며. 이 고민은 내 모든 행동의 출발점이다. 난 내가 하면 안 되는 일을 감히 한다는 죄의식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 한다. 난 내가 한 모든 결과물엔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고 믿는다. 완벽주의여서가 아니라 소심해서 그렇다. ㅠ_ㅠ

암튼 몇 달 동안 품고 있던 주제, 하지만 어떤 진전도 없이 주제만 품고 있던 글을 시작할까 보다. 선생님과의 통화를 끝내고, 좀 걷다가, 계획했던 글을 더 미루면 안 되겠다고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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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과2범”을 잠시 고민했다. 아직도 고민 중이다.
(이건 아는 사람만 아는 의미! 크핫.)

어떤 시험 기억

# 사실 요즘 어떤 카페와 음식점 이야기를 쓸까 하다가 관뒀어요. 진짜 있는 공간도 가상 공간으로 만들 것 같아서요. 으하하. 루인은 양치기. 케케.

고등학생일 때였나, 중학생일 때였나.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그것이 전국모의고사였는지, 부산시 지역 모의고사였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내가 다닌 학교 외에도 거의 모든 학교에서 특정 학원이 주최하는 시험을 쳤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종종 그런 날이 있었다. 교과 성적에 반영하진 않지만 하루 종일 시험을 치는 날. 내가 말하고 싶은 시험이 일 년에 한 번 있었던 시험인지, 빈번하게 있었던 시험인지 확실하지 않다. 중고등학교를 거치며 너무도 많은 시험을 쳤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떤 시험을 가지고 그것이 정확히 언제 친 것인지를 떠올리는 건, 내게 불가능에 가깝다.

시험을 앞두고 담임이 그랬다. 시험은 쳐야 하지만 시험 비용을 반드시 내야 하는 건 아니다, 자신의 등수와 점수를 알고 싶은 사람은 돈을 내고 그렇지 않으면 돈을 내지 않아도 된다, 고. 이 말이 통상적으로 하는 말인지, 담임이 특이했던 건진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다른 반의 담임들도 유사한 얘기를 했겠지. 이런 말의 진의는 분명하다. 지정한 날까지 돈을 내! 돈을 내도 되고, 내지 않아도 된다는 말의 진의가 돈을 내고 신청해야 한다는 건 알 만한 나이였다. 그 정도의 경험은 있었다. 실제 다른 반의 경우 많아야 한두 명을 제외하면 모두 돈을 냈다.

그런데 참 신기하지. 내가 속해 있던 반에선 두어 명만 돈을 냈다. 누군가 주도한 것도 아니고, 어떤 결의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냥 굳이 돈을 내지 않아도 된다고 했고, 억지로 돈을 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돈을 낸 사람은 두어 명 정도였다. 이 상황에 담임은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험날이 되었다. 다들 시험은 쳤지만 시험에 집중하진 않았다. 학교에 등교하니 시험을 치는 날이었고, 그래서 시험은 쳤다. 하지만 돈은 내지 않았으니 성적에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다들 분위기도 좋았다.

분위기가 좋았던 건 내가 속한 반 뿐이었다. 추측컨데 교무실에선 난리가 난 것 같았다. 시험감독을 들어온 교사들마다 돈을 내지 않은 것을 지적했다. 어떤 교사는 공공연히 비난했다. 그리고 시험이 끝났을 때 다른 반 교사가 들어왔다. 그리고 학생들을 싸잡아 비난했다, 어떻게 시험을 치면서 돈도 안 내느냐고. 답안을 체점할 사람들에게 돈을 주지도 않고 성적표를 받을 것이냐고. 직접 말했는지, 뉘앙스가 노골적이라 그렇게 기억하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돈을 내지 않은 이들을 도둑 취급했다. 다른 반 교사는 그렇게 한바탕 퍼붓고 나갔다.

잠시 후 담임이 들어왔고, 곤혹스러운 표정이었다. 돈을 내라고 말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몇몇은 화를 냈지만, 우습게도 적잖은 이들이 반성하는 표정이었고 그렇게 모두가 돈을 냈다.

난 이 상황에서, 굳이 누군가가 ‘도둑’이라면 누가 ‘도둑’인지를 따지고 싶진 않다. 이제 와서 따져 물어 무엇하랴. 시험을 치고, 돈을 내는 댓가로 교사들이 얼마를 받는지도 의심하고 싶지 않다. 어떤 물증도 없는 상황에서 의심할 필요는 없다. 그 어떤 ‘자율’적인, ‘자발’적인 선택도 용납하지 않았던 분위기를 말하고 싶을 뿐이다. 돈을 내도 되고, 내지 않아도 된다는 말의 진의를 그렇게 노골적으로 말하는 교사가 우스웠다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 학생들을 ‘도둑’으로 비난하며 돈을 받아 낸 교사가 우스웠다는 말만 하고 싶을 뿐이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 교사는 ‘떳떳’했을지 궁금할 뿐이다.

작년부터 일제고사와 체험학습으로 시끄럽다. 일제고사 얘기가 등장할 때마다 난 위에서 얘기한 일화가 떠오른다. 그리고 일제고사가 정당하다며 체험학습을 비난하는 이들의 말을 들을 때마다, 가증스럽다. 그리고 궁금하다. 무엇이 그렇게도 무서운 건지.

자살가게, 중력의 법칙

수요일과 금요일은 학교에서 일을 하다보니 책을 읽기가 쉽지 않다. 이유는 두 가지. 하나는 감시인이 없어서고-_-;; 다른 하나는 후치(노트북)를 켠 상태에서 책이나 논문을 올려 놓기엔 자리가 부족해서다. 물론 이 두 가지 이유는 모두 핑계! 아무려나 나는 수요일과 금요일이면 어떤 인쇄물을 읽기 보다는 후치와 함께 할 수 있는 일을 주로 한다. 그럼에도 저녁 즈음이면 기분이 무척 우울해진다. 하루 종일 놀았다는 느낌이라서. 여러 블로그의 글을 읽고, 자료를 찾아 읽는 것과 같은 행동들 하나하나 소중한 공부인데도 그렇다.

암튼 이런 이유로 저녁엔 도서관에 갔다. 오오~!! 도서관에 얼마나 안 가면, 이렇게 도서관 같다는 말을 쓸까. 흐흐. 그러곤 작년부터 읽고 싶던 책을 골라 책상에 앉았다. 작은 크기(A5)의 200여 쪽에 이르는 소설인데, 무려 2시간 정도 걸려 다 읽었다!! 난 책을 읽는 속도가 무척 느려 남들 읽는 시간의 두 배 정도 걸리는 편이다. 그러니 걸린 들린 듯이 읽었다는 뜻이다. 흐흐.

책은 장 퉬레의 『자살가게』. 작년인가 우연히 버스에 붙어 있는 광고를 접하곤, 단박에 끌렸다. 제목부터 흥미로워서. 흐흐흐. 근데 어쩐 일인지 사지도 않았고, 읽을 기회를 미루고 있었다. 그러다 얼추 열흘 전 문득 이 책이 떠올라 읽어야지 다짐만 하고 있었으니, 어제야 실천에 옮긴 셈이다.

내용은 자살에 도움을 주는 가게를 배경으로, 대대로 자살가게를 운영하던 집안에 희망적인 말을 하는 주인공, 알란이 태어나면서 발생하는 사건을 다루고 있다. 집안엔 웃음이라곤 없었고, 없어야 하는데 알란은 때때로 웃고, 세상의 밝은 면만 얘기한다. 그래서 가족들이 상당히 싫어 한다. 가족들의 분위기는 다음과 같다: 신문에 연간 15만 명이 자살을 시도하고 12만 명 정도가 자살에 성공한다는 기사가 난다, 주인공의 부모들은 걱정한다, 15만 명이 자살을 시도했다거나 12만 명이 자살에 성공해서가 아니라 무려 3만 명 정도가 자살에 실패해서. 그러며 자신들 가게에 오면 될 거라고 안타까워 한다. 반면 알란은 학교에서 자살자에 대한 글을 쓰라는 요구에 “자! 살자!”라는 글을 쓰는 성격이다. 그러니 가족들에게 알란은 골칫거리. 그럼 결말은? 충분히 예상 가능한 방향으로 끝난다. 아, 어떻게 예상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흐흐.

하지만 이 소설에서 결만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진부하다고, 예측 가능하다 해도 상관없다. 이 소설 전반에 흐르는 분위기가 이 소설의 매력이라고 느끼니까. 옮긴이(성귀수)도 지적하고 있듯, 이 소설은 『델리카트슨의 사람들』이란 영화의 이미지와 상당히 유사하다. 어둡고, 습하면서도 발랄한 느낌. 소설을 읽다 보면 종종 어떤 불편한 구석이 있는데, 소설 전반에 흐르는 분위기가 좋아 다 읽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한국에 출간한 책이 둘 뿐이라, 아침엔 같은 작가의 다른 책 『중력의 법칙』을 읽었다. 배가 너무 고파, 책을 읽는 후반부엔 집중력이 많이 떨어졌지만. 내용는, 남편을 살해했다고 주장하며 자신을 체포하길 요구하는 이와 자수를 못 들은 척 하며 그냥 집으로 돌아 갈 것을 요구하는 경찰 간의 논쟁 혹은 갈등을 다루고 있다. 분위기는 『자살가게』와 비슷하다. 내가 단어의 의미를 제대로 포착했다면, ‘음침하다’는 느낌으로 요약할 수도 있을 거 같다.
(다만, 난 좀 다른 결말을 예상해서인지 아쉽기도 했다.)

근데 이렇게 허겁지겁 책을 읽는 게 나쁘진 않지만, 역시 난 느긋하게 읽는 게 좋다. 아주 천천히, 남들 두 권은 읽을 시간에 한 권 끝내는 속도. 물론 아주 가끔은 이런 경험도 나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