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향하여

파스칼 로즈. 『제로 전투기』 김주열 옮김. 서울: 열린책들, 1999

『장엄호텔』과 『제로 전투기』 를 잇달아 읽었어요. 2005년 1월 즈음 처음 읽었으니 얼추 4년 만에 다시 읽었네요. 여전히 좋아요. 그래서 기묘했어요. 그 당시의 어떤 감정 상태에서 한 치도 못 벗어난 건가 싶어서요. 그냥 이 두 권의 책이 너무 훌륭해서 그런 거라고 믿을까봐요. 4년의 시간 동안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면 슬프니까요. 『장엄호텔』과 관련한 글은 다음으로 미룰 게요. 총 3부작이라, 나머지 두 권의 책을 읽고 나서 독후감을 쓸까 해요. 물론 독후감을 쓸 여력이 그때까지 남아 있을지 잘 모르겠지만요. 🙂

『제로 전투기』를 읽으며, 우울증과 자살이란 두 단어에서 한 순간도 벗어날 수 없었어요. 어느 영화 제목을 연상케 하는, 다소 자극적인 이 글의 제목처럼. 아마도 짐작하고 계시겠지만, 전 자살에 부정적으로 접근하는데 얼마 간의 불편함을 느끼는 편이에요. 특히 미디어에서 자살을 나약함으로 표현할 때면 울컥한답니다. 흐흐. 자살은, 나약함의 표현이 아니라 현재 처해 있는 상황에서 모색할 수 있는 최선이거든요. 아쉬움과 ‘나약함’이란 식의 표현은 남겨진 이들의 감상이죠. 전 그렇게 고민해요. 살아 있는 게 반드시 좋은 거란 보장은 없으니까요. 🙂

자살 이야기를 하는 건, 책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을 거예요. 제로 전투기는 2차 대전 당시 일본이 미군함을 공격한, 가미카제란 자살 특공대에서 사용한 기종이에요. 소설 속 주인공은 끊임없이 제로 전투기의 엔진 소리와 전투기 조종사 쓰루카와의 목소리를 들어요. 자살을 향한 질주 혹은 긴 여정에 대한 은유랄까요. 가미카제를 낭만적으로만 그리진 않아요. 주인공의 아버지는 가미카제의 공격으로 죽은 미해병이니까요. 작품 전반에 자살이란 어떤 이미지가 넘실거리지만, 작가의 단문은 어떤 생기를 부여해요. 자살을, 자살 시도 경험을 부정적으로 그리지 않고 삶의 한 경험으로 풀어내는 시선이 무척 좋아요. 덤덤하게. 힘들다라는 말 조차 덤덤하게….

이 책의 마지막 즈음에 등장하는 다음 구절은 단연 아름다워요.

해가 눈부시게 빛났다. 우리는 세잔느까지 천천히 달렸다. 나는 좀더 빨리 혼잡에서 벗어날 것을 예상해서 *** 택했었다. 세잔느에서, 우리는 비트리 르 프랑수아 쪽으로 비스듬히 돌았다. 백미러에 해지는 광경이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발을 액셀러레이터에 올려놓고 깊숙이 밟은 다음 늦추지 않았다. 지금이 기회야, 쓰루카와, 지금이 기회야. 네가 와서 나의 고막을 두드린 이래로 나는 정말 여러 번 내 몸을 허락하지 않았어. 날 도와 줘. 네 품에 꼭 안아 줘. 밀은 아직 푸르다. 우리는 밀이 누렇게 익는 것을 보지 못할 것이다. 나는 내 앞에 나타나는 모든 것을 추월했다. 태양은 뒤에서 대지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배를 향해 내리꽂기 전에, 가미카제는 외친다. <뛰어든다!> 나도, 쓰루카와, 나도 곧 뛰어들거야. 화물차가 커지는 것이 보인다, 헤드라이트 때문에 앞이 안 보인다. 나는 눈을 감지 않을 것이다. 쓰루카와는 액셀러레이터 위에다 내 발을 꼭 누르고 있었지만 내 손이 그를 벗어났다. 나는 핸들을 틀었다. 그리고는 암흑이었다.(142-143쪽)

남성성, 성형수술, 몸 변형 실천의 의미

성형수술하면 떠오르는 텍스트는 영화, [미녀는 괴로워]네요. 무척 좋아하는 영화죠. 성형수술이 젠더 변형/성전환수술과 매우 밀접하다는 걸 알 수 있는 작품이에요.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한나/제니(김아중 분)를 놀리는 이들이, 그의 차에 “인조인간”이라고 쓴 낙서는 의미심장하죠. 다른 여러 텍스트들을 상기시켜요. 트랜스젠더의 이미지, 소설 『프랑켄슈타인』 등등. 수술을 비롯한 의료기술을 통한 몸 변형은 개인의 존재를 기이하고 낯설게 만드는 효과를 낳죠. 이 효과는 매우 특수한 이들만이 의료기술에 관련 있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의료기술에 무관한 존재로 여기도록 하고요.

성형수술을 하는 이들 대부분이 ‘여성’이라는 이미지도 강한 것 같네요. 그리고 이럴 때 성형수술의 이미지는, “할 수도 있지”라면서도 여전히 부정적인 거 같아요. ‘타고난 몸의 아름다움을 부정하고 가부장제가 요구하는 몸 규범에 맞추는 실천’이라고 비난하기도 하죠. 성형수술을 선택하는 건 ‘주체적인 실천’이라는 주장을 허위의식이라 매도하면서요. 다른 한 편, 성형수술을 비롯한 몸 변형 실천을 아름다움의 의미를 스스로 재구성하는 실천이라고 주장하는 입장도 있어요. 성형수술이 반드시 규범적 미를 지향하는 실천이 아닐뿐더러, 규범적인 미를 지향한다고 해서 사회적으로 완전하게 용인되는 건 아니니까요. ‘허위의식’과 관련한 주장은, 몸 변형 실천자들을 수동적이고 무력한 타자로만 여긴다고 비판받고 있고요.

이런 고민들의 연장선상에서 어제 읽는 논문은 흥미로워요. 캐나다 ‘남성’들의 성형수술 경험을 연구한 논문이거든요(Michael Atkinson. “Exploring Male Femininity in the ‘Crisis’: Men and Cosmetic Surgery.” Body and Society. 14.1 (2008): 67-87.). 성형수술과 관련한 많은 논문들이 ‘여성’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남성’을 대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부터 흥미롭기도 하죠.

캐나다는 현재 ‘남성성의 위기’ 시대라고 하네요. 페미니즘 운동이 활발해지고, 사회가 ‘여/남’ 평등을 지향하면서 ‘남성성의 위기’가 도래했다는 거죠. 물론 저자는 ‘위기’ 담론에 동의하지 않아요. 사실 세계 어디에서도 ‘남성성’이 ‘위기’였던 적은 없어요. ‘남성성이 위기에 처했다’라는 말들만 넘칠 뿐이죠. 한국에서 1997년 IMF가 터지면서 ‘고개 숙인 아버지’란 말과 함께 ‘아버지/남편 기 살리기’ 운동이 전개된 적이 있습니다. (지난 2월, KSCRC에서 주최한 “남성성” 강좌에 권김현영 선생님도 지적했듯) 문제는 아버지들이 고개를 든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거죠. 역사책을 봐도 알 수 있고, 매 시대 등장한 소설들을 읽어도 알 수 있죠. 모든 시대의 아버지들은 고개를 숙이고 있거나 부재해요. ‘고개 숙인 아버지’란 언설이 IMF 이전의 아버지들은 고개를 들고 살았다는 허상을 (재)생산한 거죠.

암튼, 이 논문은 ‘남성성 위기’라는 언설이 만연한 상황에서 캐나다 남성들이 성형수술을 고려하고 이해하는 방식을 분석하고 있어요. 총 4가지로 분석하는데 제가 흥미로웠던 점은 성형수술을 남성성과 연결시킨 점이었습니다. 앳킨슨(Atkinson)이 인터뷰한 남성들 중엔, 성형수술은 무척 고통스러운 과정이기에 이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친다는 것은 ‘여성적인 행동’이 아니라 ‘남성다움’의 표현이라고 말합니다. 수술을 고통으로 치환하고, 고통을 견디는 행위를 ‘남성성,’ ‘남성다움’으로 이해하는 거죠. 전 이런 해석이 가능하단 점이 무척 흥미로웠어요. 이렇게 말하는 이들이 ‘여성의 성형수술’은 어떻게 이해하는지는 알 수 없지요. 앳킨슨이 질문 했지만 이 논문에선 언급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질문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요. 널리 알려진 언설들에 따르면 ‘여성의 성형수술은 가부장적 의료기술에의 종속’이라고 이해되죠. ‘여성성의 수동적/종속적 속성을 표현’한다는 거죠. 하지만 성형수술을 ‘남성성/남성다움’의 표현으로 이해하는 이들의 입장에 따르자면, ‘여성의 성형수술’은 좀 더 흥미로워져요. ‘규범적인 여성성’을 표현하기 위해 ‘남성다움’을 실천한다고도 이해할 수 있을까요? 🙂

이 논문이 수술의 위험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은 아쉬운 대목이에요. 몸 변형 실천과 관련해서 수술이 건강을 해치는 위험한 행동이라고 주장하는 입장이 있긴 합니다. 하지만 건강이란 개념 자체를 재구성할 것을 요구하는 실천이라고 주장하는 입장도 있지요. 이 두 가지 외에도 상당히 다양한 논의들이 진행 중이에요. 앳킨슨은 수술과 건강이란 주제와 관련해서 “자신에게 가하는 폭력”이라는 다른 이의 주장을 언급하며 지나가네요. 이 주장에 동의하는 뉘앙스고요. ‘수술과 건강’이란 이슈를 좀 더 폭넓게 다뤘다면 훨씬 흥미로웠을 텐데요. 수술을 고통과 위험으로 이해할 때에만 성형수술이 ‘남성성’ 실천일 수 있긴 해요. 그래도 아쉬워요. 좀 더 다층적인 논의가 가능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죠.

암튼 몸 변형, 신체기술과 관련한 논의들은 너무 흥미로워요. 언제 읽어도 즐겁죠. 비록 충분히 만족스러운 내용이 아니라 해도. 이런 저런 논문을 네댓 편 더 읽고 나면 글을 하나 써야 하는데, 귀차니즘이 발동하려 해요. 이번에도 ‘아, 저 글만 더 읽으면 좀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을 텐데’라고 회피할까요? 흐흐흐.

Gender Studies: Terms and Debates – 젠더 이론 입문서

누군가가 내게 혹은 당신에게 이번 일 년 동안 영어 책(이론서를 중심으로)을 10권 정도 읽으라고 한다면 부담스러울까? 10권을 하나의 단위로 상상하면 부담스럽다. 하지만 하루에 5~8쪽을 꾸준히 읽으면 일 년에 열 권은 충분히 읽을 수 있다. 책의 전체 쪽수에 따라 10권이 버거울 수도 있고, 10권 이상을 읽을 수도 있다. 어쨌건 얼추 10권 정도는 읽을 수 있다. 별 거 아니다. 그냥 매일 5~8쪽만 꾸준히 읽으면 된다. 이건 지금까지 내가 실천한 방법이기도 하다. 나의 영어 실력은 형편 없다. 하지만 영어 책이나 논문을 읽는데 부담이 적은 것도 사실이다. 2004년 가을 혹은 늦은 겨울부터 지금까지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일정 분량을 꾸준히 읽었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날은 시간이 도무지 생기지 않아 한 문장만 읽었고, 어떤 날은 너무 바빠 한 문단만 읽기도 했다. 한 문장이라도 읽은 건,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독해력을 놓칠 것만 같아서 였다.
*이 문단은 사전만 있으면 영어 문장을 독해할 수 있는 사람, 특히나 제도권에서 공부하고 있는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몸에 밴 습관 때문일까? 20쪽 정도 남은 책을 오늘 오전에 다 읽었다. 스스로 당황했다. 이렇게 빨리 읽을 수 있는 내가 아닌데, 하며. 아무려나 이렇게 해서 Gender Studies: Terms and Debates를 다 읽었다. 사실 이렇게 빨리 끝낼 계획은 아니었다. 올 초만 해도, 그냥 조금씩 읽을 계획이었다. 그런데 이런 어정쩡한 계획으로 인해 어떤 날은 읽지 않는 날도 생기더라. 그래서 작정하고 하루에 딱 8쪽을 읽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오늘 다 읽었다.

Anne Cranny-Francis, Wendy Waring, Pam Stavropoulos, Joan Kirkby 공저의 Gender Studies: Terms and Debates(『젠더 연구: 용어와 논쟁』, 어떤 사람은 term을 규준?으로 번역하던데 여기선 용어로 번역)는 일종의 입문서, 개괄서라 할 수 있다. 내용은 젠더 이론과 연구에서 빈번하게 사용하는 개념들, 용어들을 정의와 논쟁을 중심으로 소개하고 있다. 개괄적이긴 해도 여러 논쟁을 폭넓고 어느 정도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 아울러 논의는 가장 기초적인 설명에서부터 순차적으로 진행된다. 이 책의 미덕 중 하나는 퀴어이론이나 트랜스젠더 이론을 곁가지가 아니라 논의의 주요 틀로 다룩루고 있다는 점이다. 아쉬운 점이라면 퀴어이론과 트랜스젠더 이론을 지나치게 단순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일테면 퀴어 이론 내부에서 진행한 논쟁은 거의 다루지 않으며 어떤 대안처럼 다루는 뉘앙스를 풍긴다. 그만큼 독자층을 분명히 한다는 의미다. 젠더 논의를 이론적으로 기초부터 공부하고 싶으며, 퀴어이론이나 트랜스젠더 이론은 낯선 이들이 이 책의 예상 독자다.
(몸 변형, 성형수술과 관련한 논의는 상당히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저자들이 속한 집단의 성격을 반영하는 듯.)

영어 공부도 하면서 젠더 이론도 공부할 수 있는 책이 될 거 같다.

+
공저면서도 개별 필자를 밝히지 않지만, 읽다 보면 문체가 바뀐 걸 알 수 있다. 읽다가 당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