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 책,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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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만에 헌책방에 들렀다. 헌책방에 가면 예기치 못한 책과 만나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평소 관심만 있는 책이라도 헌책방에 있으면 망설이지 않고 집어 든다. 절판되어 책방에서 더 이상 구할 수 없는 책이 있으면, 이미 소장하고 있어도 사는 편이다. 그에 따라 늘어나는 지출은 큰 단점이다. 그래서 자주 못 간다. 며칠 전에도 과도한 지출을 했다.

미국이나 유럽 지역에서 나오는 현대 추리소설은 별로 안 좋아하지만, 관심을 둘까 하여 법의학자가 주인공인 추리소설을 샀다. 마리 르도네의 『장엄호텔』과 파스칼 로즈의 『제로 전투기』는 또 샀다. 몇 년 전 헌책방에서 사서 읽었는데 너무 좋아, 그 후로 책이 있을 때마다 사고 있다. 마침 품절이라 더 챙긴다. 어제부터 『장엄호텔』을 다시 읽고 있다. 여전히 좋다. 『장엄호텔』을 다 읽고 나면 『제로 전투기』를 읽을 예정이다. 다 읽고 나면, 이 책을 소장하고 싶은 누군가에게 넘길 예정이다. 혹시 원하시는 분은 댓글 남겨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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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구사하고 싶은 문장과 내가 실제 구사하는 문장 사이의 거리를 느낄 때마다 나의 부족함을 느낀다. 난 짧은 문장을 선호한다. 비문을 많이 쓰는 편이기 때문이다. 문장이 길어질수록 주술관계가 불분명하고 문장이 꼬인다. 짧게 쓰면 그나마 덜 꼬인다. 하지만 특정 주제(대체로 트랜스젠더, 간성과 같은)로 글을 쓰면 문장이 한 없이 늘어난다. 문장이 한 없이 늘어난다는 건, 고민이 충분히 영글지 않았다는 의미다. 적어도 내겐 그렇다. 그래서 부끄럽다. 부끄러움이 이곳, [Run To 루인]에 넘친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연습하지 않으면 어쩌겠는가 싶어 그냥 끼적이고 있다. 글을 쓰는 나는 부끄럽고, 글을 읽는 이는 괴롭다.

이건 일종의 반성문인 셈이다. 근데 너무 뻔뻔한 반성문이다. 😛

[영화] 레볼루셔너리 로드

[레볼루셔너리 로드] 2009.03.15.일. 18:35. 아트하우스 모모. B4층 2관 C-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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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텍스트란 많은 말을 생산하는 텍스트라고 정의한다고 치자. 많은 말을 생산한다는 것이, 반드시 듣기 좋은 말, ‘정치적으로 올바름’에 충실한 말이란 건 아니다. 많은 논쟁을 유발하여 다양한 목소리를 표출시킬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좋은 텍스트를 이렇게 정의한다면, 적어도 내게 [레볼루셔너리 로드]는 좋은 텍스트이다.

영화관을 나섰을 때 정신이 멍했다. [레이첼 결혼하다]와 같은 날 읽지 않아 다행이라고 중얼거렸다. 동시에 어디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 하면 좋을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남성다움 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찌질함(사랑 혹은 관심을 구걸하는 태도), “이름을 붙일 수 없는 병”이라는 “여성의 신비”와 인종-계급 정치, 소통 (불)가능성과 관계 맺기, 광기-정신병의 의미, 또 뭐가 있을까? 이들 각각을 별개로 논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어떤 주제로 얘기를 하던 적어도 네 가지 이슈 모두를 언급할 수밖에 없다. 어떤 주제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 다른 이슈들의 무게가 줄어들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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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초에 출간된 베티 프리단의 책, 『여성의 신비』는 페미니스트 운동의 제2의 물결을 일으킨 계기로 평가받는다. 이 책은 당시 ‘여성’들이 겪고 있던 “이름을 붙일 수 없는 병”인 우울증을 다루고 있다. 세계 2차 대전 이후, ‘여성’들은 공적 시장노동자의 위치에서 쫓겨나 가사노동자로서, ‘과학적 모성’을 실천하는 존재로 다루어졌다. 당시 ‘여성’들은 가사노동과 아동양육에 전념하며 많은 무력감, 상실감, 우울증 등을 경험했는데, 주류 담론은 ‘여성다움이란 역할’에 좀 더 충실해야만 치료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무력감은 가사노동에 좀 더 전념하고 아동양육에 헌신하면 해결된다고 주장했다. 프리단은, 주류 담론이 ‘여성’들을 ‘집안의 천사’로 만드는 구조를 비판하며, ‘여성’들이 직장을 가지고 일을 할 것을 제안한다. 프리단의 주장은 상당한 호응을 얻었다. (진위여부와 상관없이) 제2의 물결의 시발점이자, 페미니즘의 고전으로 평가 받을 정도로.

프리단의 책은 이후, 많은 페미니스트들에게 비판받는다. 앨리스 워커 같은 이는 이 책을 읽지도 않았다고 혹평했다 한다(워커의 글에서 직접 읽은 건 아니고 다른 이가 간접 인용한 글에서 읽음). 벨 훅스 같은 이는 이 책을 자신의 책에서 여러 번 언급하고 비판한다. 프리단이 얘기하는 ‘여성’은 미국의 대학교육 받은 중산층 백인 비장애 이성애 여성들이라고. 사실이 그랬다. ‘흑인 여성’들, ‘빈곤층 여성’들은 항상 일을 하고 있었다. 일을 하기 싫어도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벨 훅스는 프리단의 주장이 상당히 제한적인 범주로서 ‘여성’을 사용할 때만 타당하다고 비판한다. 프리단의 주장은, 여러 범주 수사로 제한한 ‘여성’을 ‘모든 여성,’ ‘대표 여성’으로 만듦으로써 그 범주에 속하지 않는 이들의 경험을 배제하고 있었다.

[여성의 신비]와 관련한 얘기로 서두를 시작한 건 영화, [레볼루셔너리 로드]의 시대적 맥락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에이프릴(케이드 윈슬렛 분)과 프랭크(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분) 부부의 중산층 계급, 교외 정원이 있는 집, 백인이란 인종 등등은 특정 계층의 경험이란 걸 명백하게 보여준다. 심지어 이 영화엔 표면적으로 백인이 아닌 것 같은 인종은 등장하지 않는다. 백인들만 살아가는 세계다. 아울러 낙태가 불법인 시대다(이와 관련해선 [더 월]ㅡ핑크 플로이드의 영화 아님;;ㅡ이란 영화를 참고).

에이프릴은 연극을 하고 싶지만 연기에 재능이 없어 무대에 더 이상 오르기 힘든 상태고, 프랭크는 자기가 가장 취업하고 싶지 않은 직장에서 일하고 있다. 에이프릴은 집에서 하루 종일 가사노동으로 생활을 영위하고 프랭크는 자신의 천직을 못 찾아 억압받고 있다며 직장 생활에 불성실하다. 둘의 관계가 위기에 처할수록 에이프릴은 가사노동에 더 충실하려 하고, 그럴수록 우울증과 무력감, 고통은 더 커진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에이프릴은 프랑스 파리로 가고자 한다. 언젠가 프랭크가 미국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라고 에이프릴에게 말했던 세계, 파리. 에이프릴은 프랭크를 설득하기 위해, 파리에 가면 자신이 국제기구의 비서직에 취직해서 일하고, 프랭크는 쉬면서 자신이 진정 원하는 일을 찾으라고 한다. 프랭크의 현재는 프랭크의 본질을 억압하고 있으며, 프랭크의 아름다운 진짜 남성을 찾으라고 말하며.

에이프릴은 파리에 가고 싶다. 현재 사회가 아닌 다른 세상에서 뭔가 새로운 일을 하고 싶기 때문이다. 비서직에 취직하겠다는 말엔 가사노동과 아동양육에 제한된 여성역할이 아닌 어떤 일을 하고 싶은 바람이 섞여 있다. 프랭크는 사실 파리에 가고 싶지 않다. 현재에 안주하며 살고자 한다. 다만 에이프릴이 자신을 ‘진짜 남자’로 부추겨 주자 기분이 좋아져 가는데 동의한다. 프랭크의 바람은 자신에게 여전히 ‘남성으로서의 매력’이 있으며 자신의 ‘남성다움’을 인정받고 ‘여성들’에게 사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강할 뿐이다. 그래서 나중에 어떤 계기로(스포일러일 것 같아 생략) 에이프릴이 더 이상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자 분노한다. 아니, 에이프릴에게 “당신은 나를 사랑한다”고 사랑할 것을 강요한다. 에이프릴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 한다. 사랑받지 않고 있는 상태, 더 정확하게는 자신의 남성성을 인정받지 못 하는 상태를 받아들이지 못 한다. 그래서 분노하고, 진실로 찌질하게 사랑과 인정을 구걸한다. (난 그 장면에서 사랑을 구걸하는 태도를 느꼈다.)

이 찌질함을 분명하게 설명하는 인물은, 다름 아니라 수학박사 학위가 있지만 신경증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를 받고 있는 존 기빙스(마이클 새넌 분)다. 모든 사람들이 미쳤다고 기피하는 인물이다. 그의 부모들 역시 존의 행동에 안절부절 못 하며 그의 모든 행동을 광기에 기인한다고 말한다. 존의 광기, 존의 미친 행동은 한 사회가 지배규범으로서 자연스럽다고 여기는 규범들을 폭로하는 방식으로 드러난다. 즉, 존은 암묵적으로 부재한다고 가정하는 규범의 찌질함, 규율들을 발화하여 모든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기에 미쳤다는 소릴 듣는다. 존은 에이프릴과 프랭크가 파리에 간다는 계획을 들었을 때 유일하게 축하하는 인물이다. 아울러 프랭크가 자신의 남성성을 인정받고 싶어 안달하고 있음을 발화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광기란 그런 거다. 지배규범이 금기하는 것들을 폭로하는 인물이 광인이며, 차마 말하지 못 하는 걸 드러내는 행위가 광기다. 그래서 정신병원에 감금하고 어떻게든 치료하고자 한다. 사실 치료는 안 된다. 지배규범의 폭압을 체화하며 입을 닫을 뿐이다. 지배규범에 가장 유순한 몸이 되어 질문자가 바라는 대답만 하여 치료되었다는 평가를 받을 뿐이다.

마지막 부분은 고통스러워서 생략. 차마 적을 엄두가 안 나서….

영화의 끝 장면은 흥미롭다. 존의 부모가 에이프릴-프랭크 부부와 관련한 얘기를 나누고 있다. 헬렌 기빙스는 새 입주자를 칭찬하며 에이프릴-프랭크 부부를 욕한다. 그 소리가 듣기 싫은 하워드 기빙스는 자신의 보청기를 끄며 그의 부인, 헬렌 기빙스의 말을 듣지 않는다. 이 장면은 소통 거부, 혹은 소통이 안 되는 상황을 선명하게 상징한다. 왜냐면, 이 영화에서 에이프릴과 프랭크는 서로에게 내 말 좀 들으라고 소리를 몇 번이고 지르기 때문이다. 서로 처음 만난 순간을 제외하면 영화 내내 소리를 지른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결국 서로 떠들고 있지만 그 어느 말도 서로에게 닿지 않는다. 보청기를 꺼서 소리를 차단하는 것처럼. 소통 불가, 혹은 소통할 의지가 없는 태도가 어떤 파국을 일으키는지 암시하는 것처럼.

03
그나저나 요즘은 영화관에 며칠에 몰아서 갔다가 한 동안 안 가는 생활인 거 같다. 이제 한 번만 더 가면 3월엔 다 간 거 같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흐.

그리고 요즘 나의 영화 감상문은 좀 재미가 없다. 너무 태만한 틀로 쓰는 거 같아서. 게으르단 뜻이다. 반성해야 한다.

[영화] 레이첼 결혼하다

[레이첼 결혼하다] 2009.03.14.토 16:30. 아트하우스 모모. B4층 2관 E-4.

※내용을 조금 설명하겠지만, 이 영화는 스포일러가 큰 의미가 없는 듯해요. 저의 경우, 제가 극장을 찾을 영화라면 아주 짧은 한 줄 평가도 읽지 않는데, 이 영화는 줄거리를 모두 다 알아도 상관없겠다 싶더라고요.

01
예전에 어느 다큐멘터리 감독과 얘기를 하던 와중이었다. 그이는 팔 힘이 셌으면 좋겠다고 했다. 카메라가 무거워 촬영을 하다보면 팔이 아파 화면이 흔들리는 경우가 있다면서. 흔들리지 않는 화면. 공중파 방송이나 영화관에서 접하는 영상물들의 화면이 지닌 특징 중 하나는 화면이 흔들리지 않는다. 영화건 다큐멘터리건 상관없다. 화면이 흔들린다면 편집 과정에서 빼지 않은 실수거나 웃음을 유발하기 위한 의도적인 장치일 가능성이 크다. 혹은 촬영에 익숙하지 않은 경우거나. 사진의 경우, 흔들린 상태로 나오면 ‘수전증’이라고 농담을 할 정도고. 그만큼 안정된 화면은 영상물의 기본이다. 그렇다고 화면의 흔들림이 미숙함의 표현이라고 단정할 이유는 없다. 처음 한두 번 흔들렸다면 미숙함이라도 백 번, 이백 번을 찍어도 흔들린다면 그때부턴 스타일이거나 의도적인 행동일 테니까.

영상은커녕 영화와 관련한 책을 단 한 권도 읽은 적 없는 내가 뜬금없이 영상 이야기로 시작하는 건 영화, [레이첼 결혼하다] 때문이다. 영상 혹은 화면의 흔들림은 이 영화의 핵심이다. 적어도 내겐 그랬다. 이 영화의 영상은 시작할 때 잠깐, 끝날 때의 잠시를 제외하면 시종일관 흔들린다. 이 영화는 카메라를 삼각대와 같은 지지대에 올리고 찍지 않고 손에 들고 찍었다. 흔히 카메라가 주인공을 쫓아가거나 손에 들고 찍으면 다큐멘터리 촬영 기법이라고 했나?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접한 대부분의 다큐멘터리들의 영상은, 손에 들고 찍었건, 어깨에 걸치고 찍었건 화면은 꽤나 안정적이다. 반면 [레이첼 결혼하다]의 영상은 시종일관 흔들린다. 마치 카메라를 처음 잡은 사람이 찍은 것처럼. 장면은 수시로 바뀌고, 가까이서 찍은 장면과 일정 거리를 두고 찍은 장면이 계속해서 교차한다. 시작과 끝 장면에서만 장면의 변화 없이 한 장면을 지속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이 역시 카메라가 미세하게 흔들린다. 특히 마지막 장면은 (이 영화로 치면) 상당히 먼 거리에서 찍은 모습을 드러내는데 일순간 ‘카메라를 고정시켰구나’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 만큼 흔들림이 적다는 뜻이다. 상대적으로 흔들림이 적을 뿐, 영상은 미세하게 계속해서 흔들린다.

화면의 흔들림이 중요한 건, 이것이 영화의 전반적인 정서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약물중독인 킴(앤 해서웨이 분)이 재활원에서 퇴원한 날은 언니 레이첼이 결혼을 앞둔 날이기도 하다. 킴은 집으로 돌아가고 가족들은 반기는 것 같지만, 그들 사이엔 미묘한 금이 있다(킴을 데려가기로 한 아버지는 30분 정도 늦게 도착한다). 다들 킴을 걱정하며 챙기지만, 문제는 챙기기만 할 뿐이다. 킴의 말을 듣기보다 킴에게 무언가만 해주려고 할 뿐이다. 가족들에게 킴은 언제 터질지 모를 폭탄과 같아 조심스럽게 대하고 가급적 피해야 할 대상이다. 재활원에서 퇴원한 킴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중독자이고, 언제든 문제를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는 존재라고, 가족과 주변 사람들은 여긴다. 킴이 정말로 폭탄과 같은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사람들이 킴을 언제 터질지 알 수 없는 폭탄처럼 대한다. 주변의 이런 반응은 누구라도 폭발시킨다. 킴 역시 폭발한다.

화면의 흔들림은 우선, 킴의 이러한 정서와 위치를 반영하고 있다. 가족에게도 자신의 과거와 현재에게도 안정적으로 자리 잡을 수 없어 언제나 겉돌고 있는 삶. 하지만 화면의 흔들림은 킴의 등장이 가족들에게 야기한 불안, 킴과는 별도로 서로에게 쌓였던 감정들도 반영한다. 킴이 없으면 평화로울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레이첼도, 아버지도, 어머니도, 다들 서로에게 쏟아 붇고 싶은 말들을 품고 산다. 그저 그 말을 하지 않고 불만이 없는 것처럼 행동함으로서, 행복을, 평화를 포장할 뿐이다. 얼마나 더 흔들리느냐, 덜 흔들리느냐의 문제다. 누군가가 없다고 불안이, 할 말이 없어지는 건 아니니까. 그러니 어떤 누군가의 삶은 흔들리고 불안정하지만, 다른 누군가의 삶은 안정적이고 흔들림이 없는 게 아니다. 모든 삶은 지속적으로 흔들리고 불안하다. 불안과 흔들림이 없었던 것 같아도, 아주 작은 사건이 촉매가 되어 드러나기도 한다.

하지만 영상의 흔들림이 좀 심했달까. 아침에 먹은 밥이 문제였는지, 영화관에 가기 전에 먹은 밥이 문제였는지, 화면의 흔들림 때문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어쨌거나, 영화 중반 즈음, 속이 메스꺼워 토할 것만 같았다. 영상의 흔들림으로 관객이 토할 것 같은 메스꺼움을 느낀 게 감독의 의도였는지도 모른다. 감독의 의도였다면, 적어도 내겐 성공했다. 덕분에 같은 극장의 다른 영화도 같이 즐길까 했는데, 결국 포기했다.

02
흔들림과 함께 내가 주목한 또 다른 부분은, 재활원에서 나온 킴이 참여하는 집단 상담 장면이었다. 다들 무언가에 중독되었고, 병원에 감금되어 치료를 받았고, 퇴원 후 집단 상담을 받는 과정에 있었다. 이미 중독에서 ‘완치’된 듯 한 이가 집단 상담 참가자들에게 말했다, 어제는 과거고 내일은 미래라고. 즉, 과거를 잊고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흔히 한 개인의 삶은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의 단선적이라고 가정한다. 과거 없는 현재란 있을 수 없다. 나의 현재는 과거라는 오랜 경험의 축적과 밀접하다. 젠더 범주로 예를 들면, ‘여자’로 태어났다면 소녀로 자라 죽을 때까지 ‘여성’으로 살아가리라 여긴다. 삶은 일관된 흐름을 지녀야 한다. 대체로 이러할 것이라 가정하지만, 모든 개인에게 이런 생을 요구하는 건 아니다.

어떤 개인들은 삶을 단절적으로 구성해야 한다. 단절적 생애사. 과거를 부정하고 미래만을 긍정하거나, 현재를 축으로 과거를 통째로 바꿔야 한다. 일례로 트랜스젠더들이 그러하다. 어느 트랜스젠더가 정신과 의사의 진단서를 발급받기 위해선 태어날 때부터 그이가 원하는 젠더에 맞춰 의사가 요구하는 방식으로 재구성해야 한다. 법적 성별이 바뀌었고 자신의 호적상 성별변경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트랜스젠더라면 바뀐 성별에 따라 생애사를 새롭게 써야 한다. 그이가 mtf/트랜스여성이고, 주민등록번호 상의 성별 2번으로 바뀌었다면 1번으로 살았던 삶은 더 이상 발설할 수 없다. 1번으로서의 삶은 부정해야 할 과거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영화에서 집단 상담을 받고 있는 이들이 그렇다. 중독 경험을 마치 부끄럽거나 밝히면 안 되는 경험이라도 되는 냥, 강사들은 중독경험자들에게 과거를 잊고 새로운 미래를 기획할 것을 종용한다. 중독이었던 과거에서 벗어나 회개하고 재활할 수 있다는 언설. 이건 사회적으로 금기시 하는 것을 경험했거나 실천한 바 있는 이들 모두에게 해당한다. 사회는 이들에게 과거를 완전히 부정하고, 그 역사를 지우도록 하는 분절적/단절적 생애를 구성할 것을 요구한다. 이를 통해 새로운 ‘단선적’ 생애를 만들어 낸다. 그러니 단선적 생애사를 구성할 수 있는가의 여부는 지배규범에 얼마나 잘 부합하는 방식으로 삶을 설명할 수 있는가의 문제다. 단선적 생애사는, 비규범적 실천들, 금기시하는 실천들의 존재를 은폐하려는 규범의 얄팍한 수작일 뿐이다.

과거를 부정하고 새롭게 태어날 것을 요구하는 상담심리규범은 영상의 흔들림과 겹친다. 내면의 불안, 갈등, 끊임없이 뭉그적거리며 결단을 늦추는 삶 등은 뭔가 문제가 있거나 사회생활에 부적합하다고 가정한다. 영화의 화면은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는 관습 속에서, 시종일관 흔들리는 화면은 흔들림 없는 삶이란 어떤 인위적인 장치를 통해서만 가능할 뿐이란 걸 암시하는 듯하다.
(↑이거 왠지 꿈보다 해몽 같다. -_-;; 흐흐. 하지만 독후감이란 원래 꿈보다 해몽이지 않나?)

03
난 이 영화, 꽤나 몸에 들었다. 아니 온 몸이 흔들렸다(여러 의미로-_-;; 흐흐). 아쉬움이 남는 부분도 있지만.

앤 해서웨이 멋지다. @_@

촬영 및 편집과 관련해서 꽤나 흥미로운 부분 중 또 다른 하나는 극중 등장하는 홈비디오 혹은 캠코더와 영화 카메라를 일치시키는 부분이다. 극중 인물이 결혼식에 참가한 이들을 찍는 캠코더와 영화의 카메라가 일치할 때마다 종종 배우가 관객을 쳐다보는 순간이 발생한다. 영화의 관습에서 배우는 카메라를 정면으로 보지 않는다고 들었기에, 배우가 정면으로 쳐다볼 때마다 재밌었다. 물론 이 영화의 기본적인 흔들림 속에서 이 정도의 연출이 없다면 말이 안 될 거 같기도 하고. 흐흐.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