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들켰을 뿐인, 지극히 사소한 끄적임.

몸 한 곳에 짙은 그늘이 드리웠다. 나는 글쓰기를 계속해서 망설인다. 쓰고 지우기를 반복한다. 다른 날 같으면 공개했을 법한 내용을 그냥 지운다. 쓰고 지우길 반복하는 나날. 하고 싶은 말을 못 해 체한 느낌이다.

… 지금도 무언가를 썼다가 그냥 지웠다. 써서 뭐하나, 싶다.

요즘은 사람들을 최대한 피하고 있다. 업무가 아니면 사람 만날 일이 전혀 없는 나날이다. 업무로 인해 누군가를 만날 일도 없는 나날이다. 피하지 않아도 사람을 만날 일이 없다. 그래서 다행이다. 너무 다행이다.
유형 4의 7번째 수준과 8번째 수준 사이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우리는 뭔가를 해야 한다.”

+다 쓰고 나서 깨달았는데, 이 글은 블로깅을 해야 한다는 강박이 만든 산물이니 두서가 없어도 그러려니 하셨으면 합니다. -_-;;;

어젠 얼결에 논문 한 편을 단숨에 읽어버렸다. ‘얼결’인 건, 원래는 이틀에 걸쳐 나눠 읽을 계획이었는데 읽다보니 탄력이 붙어 몇 시간 만에 다 읽었기 때문이다. ‘단숨’에 읽을 수 있었던 건 읽기 수월한 문장이었기 때문이다. 분량도 짧고 내용은 무척 흥미로운데 읽기 어려운 글이 있기 마련인데, 어제 읽은 글은 수월했다. 저자는 카트리나 로엔(Katrina Roen)이고 제목은 “‘But We Have to Do Something’: Surgical ‘Correction’ of Atypical Genitalia.”

이 글이 실린 잡지의 특집은 작년 말 내게 어떤 좌절을 안겨준 내용이기도 하다. 젠더의 의료적 구성, 의료기술과 체화와 관련한 내용을 다루고 있는데 그 내용이 내 논문의 내용과 상당히 겹쳤기 때문이다. 내 논문의 본문을 다 쓰고 나서야 이 특집을 알게 되었고, 심지어 작년 초에 발간한 내용이란 점에서 ‘논문을 접어야 하나’ 나름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작년에도 썼지만, 논문 쓰는 과정에서 한숨 돌리고, 최근 경향 확인을 위한 키워드 검색 겸 좋아하는 저자의 스토킹을 위한 검색 과정에서 찾은 거였다. 좀 더 일찍 찾았다면 어땠을까 싶지만, 이미 늦은 걸.)

아무려나, 이 특집은 논문이 끝나면 읽기로 했기에 요즘 읽고 있는데 로엔의 글도 그 중 한 편이다. 내용은 “‘하지만 우린 뭔가를 해야 한다’: 비전형적인 성기에 대한 외과수술 ‘교정'”이란 제목을 통해 얼추 추측할 수 있다. 외과의학에선 간성(intersex people)으로 태어난 이들의 외부성기 형태를 ‘여성’ 혹은 ‘남성’의 외부성기 형태에 적합하도록 모형을 바꾸는 수술을 시행하고 있다. 현대사회에서 개인은 규범적인 존재로서 ‘여성’ 아니면 ‘남성’으로만 살 수 있고, 둘 중 하나의 젠더로만 인지되기에 다른 어떤 젠더로 사는 건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의료기술은 이런 인식을 토대로 비규범적인 성기형태를 ‘교정’하여 규범적인 존재로 개인을 (재)생산한다.

문제는 외부성기형태재구성 수술을 시행하는 것이 간성들에게 ‘좋은가’, 수술 이후 합병증은 없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간성 본인은 이 수술을 원하는가란 질문을 탐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간성 수술(외부성기형태재구성수술)은 아이가 아주 어릴 때, 대체로 출생 후 18개월(혹은 2년) 이내에 이루어지기 마련이라 간성의 의견은 전적으로 부정된다. 수술은 부모의 동의를 얻어 이루어지지만, 수술을 하지 않으면 아이가 일찍 죽을 것이다, 동성애자가 될 것이다, 간성으로 살면 불행할 것이다와 같은 식으로 말하며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 편이라 한다(Peter Hegarty in conversation with Cheryl Chase. “Intersex Activism, Feminism and Psychology: Opening a Dialogue on Theory, Research and Clinic Practice.” Feminism & Psychology 10.1 (2000)).

수술의 경과가 좋은가란 문제에서도 정확하게 조사된 바 없다. 어릴 때 수술을 경험한 간성활동가들은 수술이 간성들에게 더 커다란 불행과 고통을 초래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의료담론은 이들의 주장을 신경 쓰지 않을 뿐더러 더 많은 간성들이 부정적인 효과를 증언하지 않으니 수술은 긍정적이라고 가정한다. 현대 사회에서 간성이 부정적이거나 무언가 문제가 있는 존재로 인지되기에 자신이 간성이란 사실을 밝히지 않는 맥락을 무시한 가정이다. 침묵은 곧 긍정이라고 이해한 셈이다.

수술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일단 수술을 하는데, 그럼 도대체 왜? 로엔의 논문 제목이기도 한데, 수술을 하는 건 어쨌든 무언가를 하는 것으로서 간성을 돕는 실천이며, 수술을 하지 않는 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말로 수술을 해야 하는 것인지, 수술의 결과가 좋은 것인지, 간성 자신이 수술을 원하는지에 상관없이 무언가(외과수술을 통한 외부성기형태재구성수술)를 하는 것이 의사로서 ‘윤리’이자 ‘의무’인 셈이다. 그렇기에 수술 후에 간성들이 경험하는 후유증, 합병증 등은 공적으로 은폐되기 마련이다. 태어난 직후에 이루어진 수술로 의사로서의 의무는 다 한 셈이다.

로엔의 글은 이와 관련해서 좀 더 파고들진 않는다. 그의 글이 기존의 문헌 재검토를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로엔의 글이 지닌 특징이기도 하다. 로엔을 비판하기엔 난 더 심하니 이런 지적은 무안하지만, 로엔의 글은 종종 무언가를 말할 즈음 끝나거나 너무 익숙한 얘기를 하는 경향이 있다. (나부터 절대적으로 반성해야 한다!)

나의 관심은 ‘하지만 우리는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의사로서의 윤리 혹은 의무감이었다. 현재 의료 체계에서 간성은 문제가 있는 존재로 다루어지고 있기에, 태어난 아이가 간성이라면 ‘치료’를 해야 한다고 의사는 느낄 것이다. ‘치료’가 정말 옳다고 믿기에 시행하는 의사도 있을 테고. 어떤 실천이 상대에게 좋은 건지, 아닌 건지를 떠나 일단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의무감, 사명감이 빚어낸 비극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내겐 옳은 것이기에 실행했는데 그것이 상대방에겐 치명적인 것일 때 발생하는 비극. 그래서 고민 없는 신념과 무지는 무서운 것이다.
(푸른기와집에 있는 누군가를 통해서도 쉽게 알 수 있잖은가. -_-;)

요즘 배려라는 것, 선물이란 것과 관련해서 이런 저런 고민을 하다 보니, 이 논문의 제목이 유난히 더 끌렸는지 모른다. 가끔씩 배려란 상대방의 전반적인 상황을 고민하는 것이라기 보단, 내가 상대방에게 관심 있는 부분만 고민하며 때때로 정말로 고민해야 할 부분은 간과하는 것이라고 중얼거리기도 하고. 배려라는 것만큼 어려운 것도 없는 것 같아. 그래서일까, “우리는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인용구절을 읽으며 ‘이 무식한!’이라고 중얼거렸기보단, 안쓰러운 느낌이 먼저 들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거나(이것 자체도 어떤 실천이긴 하지만) 시기를 놓치면 큰일이 생길 거란 불안이 있을 테다. 기존의 관행은 이런 불안을 더 부추길 테니 외과수술이 어떤 효과를 낳을 것인가를 고민은 뒷전일 수도 있겠다 싶다.

그렇다고 외부성기형태재구성수술에 동의하는 건 결코 아니다. 간성 이슈가 트랜스젠더 이슈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지점이다. 개인의 젠더를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의사들이 결정하는 의료체계, 모든 개인을 ‘여성’ 아니면 ‘남성’으로 환원하는 실천들, ‘여성’ 아니면 ‘남성’에 적합한 신체 형태(피부 표면)가 있다는 논의들은 트랜스/젠더 이슈에서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니까. 그래서 간성 관련 글을 읽다보면 덩달아 나도 화가 나고, 때때로 분기탱천한다. 물론 나의 논리를 위해 간성을 동원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 조심스러울 때도 많고.

음식과 트랜스/젠더 정치

아침에 밥을 먹으러 어느 식당에 갔다. 주문을 할 때면 음식에 들어가는 내용물과 관련해서 여러 가지를 요구한다. 내가 먹지 않는 종류의 음식이 들어가는지 확인하고 뺄 것을 뺀다. 이 과정은 아직도 불편하다. 몸에 쉬 익숙해지지 않아, 주문 시 요구사항을 말하기 전까지 두어 번 옹알댄다. 때로 “그걸 왜 안 먹느냐?”고 핀잔을 주는 식당도 있으니 조심스레 요구한다.

아무려나 아침엔 그럭저럭 넘어갔다. 주문은 순조로웠다. 근데 밑반찬은 내가 주문할 때부터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때로 곤란을 겪는다. 오늘 아침도 그랬다. 계란 프라이가 나온 것. 음식을 가져다주시는 분에게 계란을 안 먹는다고 말하고, 물렸다. 밥을 먹고 있는데, 식당 주인인 듯 한 사람이 내 식탁을 보더니, “계란도 없고, 반찬이 없어 어떻게 한 대…”라고 걱정한다. 하지만 식탁엔 나물 반찬만도 이미 여럿이다. 결여한 한 가지는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한다. 더욱이 육식의 한 형태인 계란은 반찬의 핵심. 계란을 안 먹어 물린 나의 식탁은 반찬이 없는 것과 같다. 그러며 지나가는 말로 다시 한 마디 한다, “요즘 젊은이들은 계란을 잘 먹던데….”

만약 나의 외모가, 피부 껍질이 지금과 같지 않았다면 반응은 어땠을까? 나의 외모가 소위 ‘여성’이라고 불리는 외모에 좀 더 가깝다면, 혹은 ‘어쨌든 여성’이라고 수렴할 법한 외모라면 어땠을까? 어쩌면 “다이어트 해?”라고 물었을 지도 모른다. 아침 식당 주인도 그랬으리라 단언할 수는 없다. 하지만 경향성으로 지레짐작할 수는 있다. 대충 어떻게 반응했겠지, 하는 짐작은 가능하다.

외모는 언제나 그 사람의 젠더를 단정하는 단서로 작동한다. 외모는 ‘여성’ 아니면 ‘남성’으로 구분할 수 있는 기호들이 넘치는 장이다. 조금이라도 헷갈린다면 아주 작은 단서라도 하나 포착하여 특정 범주로 수렴한다. 그래서 내게 음식은,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는 과정은 트랜스/젠더 정치가 발생하는 장이다. 아침에 내가 겪은 일은 음식이 트랜스/젠더 이슈에서 중요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려주고 있는 사소하지만 일상적인 경험이다. 그냥 그런 거다.

+
사실 제작년 가을 즈음부터 이와 관련한 글을 쓰고 싶었는데 미루고 있다. 자꾸 미루다보니 이젠 내게 너무 진부해서 말할 흥이 안 난다. 글이란 제때 써야 하는데…, 암튼 이렇게라도 짧게 기록하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