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강 후기들

사실 특강을 나가는 건 일주일짜리 자학거리를 찾으러 가는 것과 같다. 강의가 끝나고 나면 ‘좀 더 부연 설명을 했어야 했는데.’, ‘다르게 설명했어야 했는데.’와 같은 종류의 아쉬움들과 나의 부족함을 만난다.

그리고 특강 강사를 기다리는 수강생들의 기대는 또 다르다. 누군가는 변태 강사가 변태로 살아가며 경험하는 어려움을 호소해서 자신의 동정심을 불러일으키길 기대할 것이고, 누군가는 아무런 기대가 없을 것이고, 또 누군가는 자기 삶의 어떤 변화를 기대할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다양한 기대들이 강의실엔 넘쳐난다. 그럼 누구에게 초점을 맞출 것인가? 특강 강의 경력 초보인 나로선 아직도 감을 못 잡는다.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것도 알지만 특정 집단만을 위할 수도 없다. 그 사이 어딘가. 평소 변태들(트랜스젠더, 레즈비언, 게이, 바이, 동성애, 양성애 등등)에 무관심 했던 사람들은 그런 무관심한 상태에서,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그 정도에서, 상당히 고민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또 그 정도에서, 각자가 어떤 방식으로건 인식전환을 겪는다면 가장 좋겠지만, 이건 불가능한 욕망이다. 재미있는 건, 내가 회심의 역작-_-;;이랍시고 준비했던 멘트가 아니라 우연히 한 마디 한 것이 더 큰 파동을 일으킨다는 점이다. 난 여전히 어느 정도에 초점을 맞출 것인가가 고민이다.

그리고 내가 상상하는 수강생은 강의 주제 내용과 관련해서 아예 모르는 건 아니지만 상당히 아는 것도 아닌 어떤 상태에 있는 사람들. 나도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상태. 그 정도 수위에서 강의 내용을 맞춘다. 가장 기본적인 지식을 알려주면서 그것을 조금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여는 정도. 그리고 종종 나의 최근 고민을 알려 주는 정도. 물론 이것도 쉽지 않다. 어떤 강의에선 수위 조절에 완전히 실패해서 망했고 어떤 강의에선 수위 조절을 안 했는데 반응이 좋았고-_-;; 아무리 수강생의 수위를 예측한다고 해도 결과는 알 수 없는 법.

그럼에도 고마운 경우가 있다. 특강이 끝난 후, 메일이나 감상문을 통해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혹은 다른 어떤 변태임을 오랫동안 고민했는데 강의를 듣고 새롭게 고민할 수 있어서 정말 좋았다는 말을 들을 때다. 나의 강의가 어떤지는 사실 내가 가장 모른다. 그냥 이런 반응을 한 명이라도 보여준다면, 나는 너무 고마울 뿐이다. 100명이 듣는데 99명이 별로라고 말해도 단 한 명이, 자신의 상황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다고 말해주면 너무 고맙다. 힘이 많이 나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반성한다. 더 많이 고민해야 한다고, 더 많이 노력해야 하고, 더 많이 공부해야 한다고. 그리고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그리고 나 아닌 다른 활동가들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아주 오랜 세월 활동했던 활동가들이 없었다면 나 역시 없었다. 운동은 어떻게든 계속 되고, ‘우리’는 곳곳에서 계속해서 살아가고 있다.

[앤 기고글]“당신의 젠더를 어떻게 부르면 될까요?”

이건 10월 초 n[앤]이란 여성주의 자치 언론에 기고한 글. 진즉에 공개하려 했으니 게으름의 결과 이제야 공개한다는. 흐. -_-;; 공개하는 버전과 실제 잡지로 인쇄될 버전은 좀 달라요. 어느 게 더 진본이냐의 문제는 아니고. 글을 기고할 여건이 아니었음에도 청탁에 응한 건, 청탁이 고맙기도 하고, 논문이란 형식이 아닌 다른 형식의 글을 쓰고 싶기도 했고, 주제 자체가 좋았고. 글을 쓰면서도 쓰는 저 자신은 재밌었어요. 지금까지 한 번도 시도하지 않은, 하지만 해보고 싶은 형식을 택했거든요. 종이책이 나오면 어떤 방식으로 편집했을지 기대하고 있어요. 🙂

나중에 이런 형식에 비슷한 주제로 학술논문을 쓰고 싶어요. 한국의 학술논문이 워낙 고리타분해서 형식적인 제약이 상당하잖아요. 논문 제목을 정하는데도 제약이 있고요. 으으으. 그래서 앤에 기고한 글과 같은 형식의 글을 게재할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어요.

[#M_ 읽기.. | 귀찮으니 관두기.. |

“당신의 젠더를 어떻게 부르면 될까요?”
-페미니스트 트랜스 혹은 트랜스페미니즘, 초안
루인(runtoruin@gmail.com, 트랜스젠더인권활동단체 지렁이)

젠더, 기억
몇 해 전 여성학 수업을 처음 들을 때였다. 초급과목이었고 여성학의 기본 개념을 주로 다루는 수업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라는 여전히 어려운 개념들을 배웠다. 섹스는 타고 났으며 변할 수 없음, 하리수처럼 드물게 수술을 하는 경우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변하지 않음. 젠더는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됨, 여성다움-남성다움과 같은 속성. 섹슈얼리티는 성적인 것을 매개로 이루어지는 모든 활동, 성적 지향, 성관계, 임신 등등. 삶을 해석하는 언어를 배우면 늘 그래왔듯 내 삶으로 이 언어들을 고민했다. 여타의 모든 개념들처럼, 설명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섹스-젠더-섹슈얼리티란 개념들 역시 메스가 몸을 가르듯 내 삶을 부위별로 갈랐다. 깔끔하게 분리하는 설명 방식으론 내 삶을 설명할 수 없어. 세 가지로 분명하게 가를 수도 없고. 젠더에 해당하는 부위를 자르는데 섹스와 섹슈얼리티가 같이 잘려. 내가 서투른 게 아니라면 메스가 이상한 거겠지.

남자아이로 태어나면 남성으로 자라고 여자아이로 태어나면 여성으로 자란다는 가정. 하리수가 등장하고 몇 년이 지났지만 하리수/트랜스젠더는 몸을 바꾼 사람, 젠더에 맞게 섹스를 바꾼 사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남자로 태어났으면 평생 남자, 여자로 태어났으면 평생 여자! 트랜스젠더? 아무리 수술해도 걔네들은 뭔가 어색하고 이상하잖아. 자기가 아무리 여자라고 해도 진짜는 아니지….’ 이런 얘기들을 너무 많이 들었다. 트랜스젠더는 여성다움을 강화하거나 젠더를 초월하고 넘나드는 사람들이었다. ftm도 여성다움을 강화하는 거야? 트랜스젠더는 젠더규범의 수호자거나 저항자란 말은 넘쳐도 트랜스젠더 개개인이 겪는 삶의 의미와 맥락은 논하지 않았다. 트랜스젠더들은 언제나 별도의 존재(였)고 비트랜스젠더라면 누구라도 트랜스젠더를 평가하고 재단할 수 있(었)다.

트랜스섹슈얼들은 월경을 할 수 없다. 그들에게는 음핵이 결여되어 있다. 아이를 낳을 수 없다. 계속 호르몬 투여를 받아야 한다. 여성으로서의 역사와 배경이 없다.
-매리 데일리

강간은 … 몸적 완결성에 대한 남성주의의 침해다. 모든 트랜스섹슈얼은 진짜 여자의 몸을 인공으로 환원하고, 자신들을 위해 여성의 몸을 전유함으로써 여성을 강간한다. … 강간은 대부분 강제력으로 행하지만, 기만으로 완성할 수 있다.
―재니스 레이먼드

여성과 남성은 다른 종 혹은 인종(이 두 단어는 서로 바꿔 쓸 수 있다)이다. 남성은 생물학적으로 여성보다 열등하다. 남자의 폭력은 생물학적 필연이다.
-안드레아 드워킨

성전환 이전에는 남자의 명예를, 성전환 이후에는 미인의 명예를 따르고 있는 하리수는 명목상 소수자이며 사실상 다수자로 존재한다. … 트랜스섹슈얼이 금세기의 여성이 잃어가고 있는 여성성을 거의 완벽하게 잘 복원해서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가 여성성에 대한 일종의 명령어로 기능한다. 오죽하면 남자가 다 나섰겠냐 하는 탄식으로 유도되기 때문이다.
-이경

젠더는 완고하다. 섹스와 젠더는 필연적인 관계를 유지한다. 젠더는 사회적 구성이지만 ‘여성’과 ‘남성’은 생물학적 본질이다. 본질에 부합하지 않는 이는 인조인간이며 머물 곳이 박탈된다. 남성답다고 여기는 규범이 발생하는 몸과 여성답다고 여기는 규범이 발생하는 몸은 정해져 있(었)다. 남성다움이란 규범과 나를 비교하면 난 남성답지 않았다. 여성다움의 규범에 더 가까운 것도 아니었다.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의 이항대립구조에서 나는 어느 쪽에도 적합하지 않았고 어느 쪽도 날 환영하지 않았다. 여성학 수업에서 젠더를 듣기 전 난 그냥 좀 이상한 변태였고, 젠더를 들은 후 난 트랜스젠더가 되었다. 이런! 난 이제 추방되는 건가? 일부 페미니스트들이 그토록 혐오하는 바로 그 존재가 되는 건가? 그럼, 안녕!

트랜스/젠더, 경계
트랜스젠더/하리수가 유명해도 ‘여성’과 ‘남성’만이 존재할 뿐이라고 인지하는 세계에서 나는 둘 중 하나로 사라져야 하는 동시에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난 내가 참 잘 지내고 있다고 믿었는데, 돌연 내가 머물던 기반이 사라졌어. 근데 참 이상하지. 섹스-젠더의 구분은 트랜스젠더의 경험이며 주장인데 구분을 이론화 하는 과정에서 트랜스젠더는 머물 곳을 상실해. 정신병 목록과 젠더규범 수호자란 비난을 제외하면. 섹스와 젠더의 구분 가능성, 변형 가능성에서 출발한 논의는 트랜스젠더를 추방하고 비트랜스젠더를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존재로 승인하는 도구로 변했지. 섹스-젠더 구분은 ‘그렇게 구성된 것이지 타고난 게 아니다’를 증명하는 도구로 바뀌었어. ‘충분히 여성(남성)’스러우면 과잉 재현에 이성애-젠더이분법 규범을 강화한다는 얘기를 듣는다. ‘충분히 여성(남성)’스럽지 않으면 진정성이 의심스럽다는 얘길 듣는다. 트랜스젠더의 젠더만 문제고 비트랜스젠더의 젠더는 문제 삼지 않는다. 문제는 트랜스젠더에게만 있다. 트랜스젠더는 어떤 식으로 젠더를 표현해도 비난을 들을 준비를 해야 한다. 결국 섹스와 젠더의 필연성에 문제제기하지 말고 주민등록제도가 지정하는 젠더에 맞춰 살라는 경고인가?

물론 “이 자리에 동성애자가 있다면 이성애 중심으로 얘기해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강사들도 있었다. 내가 처음 들은 여성학 수업의 강사가 이렇게 말했다면 내 삶은 좀 달라졌을까? 내가 트랜스인 건 여전하겠지만. 난 이 말을 듣고 기분이 복잡했다. “있다면”이란 표현은, “있다”란 표현과 달리, 있을 수도 있지만 없을 수도 있다는 의미며 기본적으로 부재를 전제한다. “있다면”이란 표현은 동성애자를 모호한 위치로 내쫓고 이 과정에서 규범적 이성애와 동성애에 속하지 않는 이들을 모두 인식 가능성의 외부로 추방한다. 레즈비언이기도 한 나는 그 수업에 머물러 있는 걸까, 추방당한 걸까? 내 육신은 수업 강의실에 머물러있는데 내 몸에 의미를 부여하는 언어는 그곳에 없다. 나는 강의실에 존재하면서도 부재한다. ‘나’는 ‘육신’에서 ‘유체이탈’하고 몸을 ‘초월’하는 주체가 되는 당혹스런 사건을 겪는다. 몸이 아니라 (이분법의)언어가 실제인 그곳에서 나는 반투명인간이다. 기계를 조작하는 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해, 보이기도 하고 안 보이기도 하는 반투명인간. 나는 인식 불가능한 곳에 머문다. 이성애-젠더이분법의 언어론 포착할 수 없지만 부재하는 것도 아닌 위치가 나의 위치다. 이분법이 내 삶에 개입하며 나는 내 위치를 잃어버렸지만 이분법의 한계가 빚은 문제일 뿐 나의 문제는 아니다.

주위를 둘러봐도 나[프랑켄슈타인의 창조물]는 나와 같은 이를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 그렇다면 나는 모든 사람들이 달아나고 부인하는 이 세상의 오점, 괴물인가?
-매리 셸리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오만하게 말한다: 나는 트랜스섹슈얼이다, 고로 나는 괴물이다. (…) 신체를 파악하기 위해 살을 가공품으로 변형하는 특정한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방식을 통해서만, 몸은 의미 있게 된다. (…) [프랑켄슈타인의]창조물처럼, 나의 괴물성이 내게 마주하길 요구하는 조건들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가치를 주장하고 살 가치가 있는 삶을 다시 정의한다.
-수잔 스트라이커

사람들은 [트랜스젠더인]내가 젠더 구조를 위반한다고 말하지만 젠더 구조가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을 위반한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리키 앤 윌킨스

젠더해석
어느 캠프에서 ‘불편한 상황인데 그 자리에서 문제제기를 못 했던 경험’을 공유했다. 난 ‘사람들을 여성 아니면 남성 둘 중 하나로 나눠서 설명하는데 불편함을 느끼지만 이것에 문제제기를 너무 많이 해서 이젠 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공감했다. 한국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가기 너무 힘들고 성차별이 너무 심하다고, ‘여자는 이렇고 남자는 저렇고’와 같은 말들이 너무 많다고. 나의 의도와는 상당히 다른 반응에 잠시 당황했다.

나의 문제제기는 젠더이분법이란 틀이었지만 반응을 보인 사람들은 이분법의 틀 안에서 얘기했다. 나는 개인을 둘로 나눌 수 없고 둘로 나누는 권력이 문제며 타인의 젠더를 함부로 판단할 수 없다는 의미로 얘기했다. 사람들은 ‘여성’과 ‘남성’ 둘로 나누는 건 당연하고 이것은 문제가 아니며, 둘을 차별하고 다른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이 문제라는 의미로 이해했다.

‘젠더란 무엇인가’란 질문을 ‘여성과 남성은 어떻게 다른가?’, ‘성차란 무엇인가?’ 혹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들은 어떤 어려움을 경험하고 있는가?’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젠더는 성차가 아니다. ‘여성’과 ‘남성’은 뇌의 구조가 다르다, 염색체가 다르다, 권력의 위계가 다르다와 같은 말들은 상황에 접근하는 방식엔 차이가 있다. 인간을 ‘여성’과 ‘남성’으로만 구분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성’과 ‘남성’은 어쨌든 다르다고 전제한다는 점에서, 젠더이분법 자체를 질문하지 않는다는 점에선 차이가 없다. 젠더이분법은 모든 개인을 ‘여성’ 아니면 ‘남성’으로 사라지게 한다. 태어났을 때 지정받은 젠더로 평생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이분법의 규범에 적합하지 않는 이들은 둘 중 하나로 사라지거나 부재하는 존재로 배제된다. 젠더이분법을 전제하는 성차이론에서 젠더는 본질이다. 성차에서 말하는 젠더를 체화하는 과정은 ‘생물학적 여자’가 ‘문화적인 여성’이 되는 과정이다. ‘여자’가 ‘여성’이 되는 건 당연하고 ‘여성’이 되어야 하며, 문제는 어떻게 ‘여성’이 되는가이다. 하지만 젠더를 질문하는 건 ‘여성’과 ‘남성’이란 구분을 ‘생물학적 사실’로 만드는 과정과 ‘내’게 지정된 젠더를 의심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사실로 받아들이는 체계를 질문하는 것이다. 젠더는 성차가 아니라 인간을 인식할 수 있게 하는 권력/범주다.

모든 페미니즘이 성차이론은 아니며 나의 주장은 진부하지만, ‘이론적인 지식’과는 별개로 사람들은 젠더를 성차로 이해하고, 개인을 이분법으로 분류한다. 젠더이분법 사회에서 ‘남성’에 가까워 보이는 나의 외모로 나는 ‘남성’ 범주로 사라진다. 이성애 사회에서 나는 이성애자로 사라진다. 한 모임에 참가한다. 사람들은 트랜스젠더 혹은 퀴어를 논하면서 나를 ‘남성’으로 대한다. 내가 ‘남성’이 아닐 수 있다는 점을 의심하지 않는다. 내가 아무 말도 안 한다면 그 공간에서 나는 ‘남성’이다. 내가 트랜스 활동가이자 트랜스라고 말하면 그제야 나는 트랜스로 ‘승인’받는다. 젠더는 사후수정이 가능하다해도 사전심사를 피할 순 없다. 젠더가 둘이 아니란 걸 ‘안다’는 사람들은 나를 둘 중 하나의 젠더로 환원했다가 ‘커밍아웃’을 듣고 나면 트랜스로 재분류한다. 난 단지 예외가 된다. 그들의 태도는 실수일 뿐이며, 미안하다는 말로 무마된다. 트랜스라고 먼저 ‘고백’하지 않은 나의 잘못만 남는다. ‘커밍아웃’은 나를 예외로 승인하는 절차가 된다. 나는 예외로 추방되고 ‘여성’과 ‘남성’ 이분법은 견고하게 남는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나를 ‘남성’ 혹은 ‘여성’으로 판단하는 거지? 나를 ‘남성’으로 판단한 사람들은 이런 판단을 가능하게 한 자신들의 믿음체계는 질문하지 않는다. ‘커밍아웃’에 따른 반응도 정해져 있다. “당신은 언제부터 어떤 과정을 거쳐 젠더정체성이 다르다고 느꼈나요?” 나의 진부한 답변. “당신은 언제까지 당신의 젠더를 질문하지 않고 당연하다고 여길 건가요?”

젠더/폭력
‘페미니즘과 트랜스젠더(이론)’과 같은 구절을 접할 때마다 곤혹스럽다. 나의 입장에서 둘은 별개가 아니지만, ‘페미니즘과 트랜스젠더(이론)’과 같은 구절은 서로를 별개의 것으로, 서로 간의 접점이 없는 것으로 가정한다. 이건 ‘여성과 인권’이란 구절과 같다. 모든 트랜스젠더가 페미니스트는 아니며 모든 페미니스트가 트랜스젠더는 아니란 점에서 트랜스젠더 이론과 페미니즘이 동일하진 않다. 하지만 범주로서 젠더가 주요관심이란 점에서 둘 사이엔 공유할 수 있는 지점이 상당하다. 그러니 ‘페미니즘과 트랜스젠더(이론)’이란 구절을 사용하기 위해선 이 구절을 사용하는 사람이 해석하는 ‘페미니즘’과 ‘트랜스젠더(이론)’를 먼저 밝혀야 한다.

만약 페미니즘이 존재할 수 없고 실현할 수 없는 ‘여성’을 주체로 삼는 이론이라면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만약 페미니즘이 젠더이론이되 ‘여성’과 ‘남성’이라는 이분법을 토대로 하는 이론이라면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만약 페미니즘이 젠더 자체를 질문하고, 젠더가 개인에 내재하는 본질이 아니라 개인을 인식 가능하게 하는 범주로 해석하는 이론이라면 나는 페미니스트이다.

나는 개인을 ‘여성’과 ‘남성’으로 나누는 것이 폭력이라고 주장한다. 상대방에게 젠더를 묻지 않은 채 ‘쟤, 여자야.’ 혹은 ‘쟤, 남자야.’라고 판단하고 이 판단이 옳다고 믿으며, 이 판단에 따라 상대방을 대하는 것이 젠더폭력이다. 어릴 때 의료-제도를 통해 지정받은 젠더를 공리로 삼고, 지정받은 젠더를 토대로 평생 살아야 하고 이것이 당연하다는 믿음이 젠더폭력이다.

-그럼 현재 한국에서 남성과 여성 사이의 권력 불균형이 분명하고 폭력이 명백하게 발생하는데 이런 폭력이 없다는 건가요? 남녀 간의 폭력이 존재하는데 남성과 여성을 판단하지 말라뇨?

-젠더가 없다는 게 아니고요. ‘젠더’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가 논쟁점이죠. ‘여성’ 아니면 ‘남성’으로 만드는 과정, 한 개인을 특정 젠더에 복속시키고 지정한 젠더에 맞는 행동을 실천하도록 하는 규범, 이 규범을 따르지 않을 때 발생하는 억압과 폭력이 모두 젠더이분법 구조에서 발생하는 젠더 폭력이에요. 젠더를 이미 주어진 것으로 가정하고 이것이 자연스럽다고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인식하는 순간부터 폭력은 잠재하죠. ‘여성’과 ‘남성’ 사이에서 발생하는 폭력의 상당수가 젠더규범에 복속시키는 방법이란 점을 감안하면, 폭력은 주어진 젠더에서 발생한다기보다 둘 뿐인 젠더에 끼워 맞추는 과정에서 발생하죠. 판단하지 말자는 건 상대방의 젠더를 판단하는 ‘나’의 근거, 토대 등을 먼저 질문하자는 의미기도 해요. ‘내’가 상대의 젠더를 판단하는 근거들, 젠더를 해석하는 방식들은 사회가 개인의 젠더를 이분법으로 나누고 이것을 본질적인 것으로 구성하는 방식이기도 하죠. 아울러 ‘여성-남성’ 이분법으로 설명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미 발생한 폭력이 없어지나요? 이항대립의 양극에 개인을 복속시켜야만 발생한 폭력을 인식할 수 있나요? 만약 젠더이분법으로 나눠서 설명해야 젠더폭력을 드러낼 수 있다면, 이건 이성애-젠더이분법 규범을 지지하는 것으로 젠더는 ‘자연’이 아니라 범주임을 증명하는 역설이기도 해요. 이항대립으로 나눠서 폭력을 설명하다보면, ‘동성’ 간에 발생하는 젠더폭력은 은폐되고요. 제 고민 속에서 트랜스페미니즘의 시작 혹은 페미니스트 트랜스 정치학의 출발은 아주 간단해요. “당신의 젠더를 어떻게 부르면 좋을까요?” 상대의 젠더를 판단하지 않고 물어보는 거죠. 간단해요.(←근데 이런 문답법은 재수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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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괄호 속의 구절은, 사실 발송하기 전까지도 있었다. 근데 아무래도 글을 읽는데 방해가 될 것 같아 삭제했다. 그래서 여기선 한 번 살려 본다는. 흐.;;

처음 하는 일들

11월이 되면 여유가 생길 줄 알았다. 11월이면 어쨌거나 초고가 나오니까 이후엔 원고를 수정만 하면 된다는 안이한 계획. 하지만 아니었다. 모든 글쓰기는 퇴고부터이듯 나의 모든 초고는 다 뜯어 고쳐야 하는 상황이라 새로 글을 쓰는 시간, 딱 그 만큼 혹은 그 이상이 필요하다. 석사논문이란 걸 처음 쓰니 겪는 시행착오다. 그리고 내가 다니는 학과에서 나오는 첫 번째 졸업논문이라 겪는 문제다. 모든 게 제도 혹은 어떤 체계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시행착오들이다. 다른 과는 잘 모르겠지만, 난 논문 쓰다가 잘 모르거나 헷갈리는 부분이 있으면 죄다 나의 선생님에게 물어본다. 만약 이미 경험을 한 사람이 학과 내에 있다면 달랐을까? 그랬을 거 같다. 난 자간에 글씨크기까지 선생님에게 물어본다. 흐. 하지만 선생님에게 물어보는 게 가장 확실하다. 그래도 처음 하는 일이라 실수투성이다.

난 1호라는 게 그렇게 의미 있는 줄 몰랐는데, 다른 사람들이 상당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상당히 놀랐다. 그리고 원래는 나보다 한 학기 먼저 쓸 예정인 사람이 있었기에 완전 태평이기도 했고. 아무려나 1호라서 난 부담이 없다. 적어도 내가 다니는 학과 내에선 “전에 썼던 누구보단 잘 써야지.”라는 얘길 들으며 비교 당할 일은 없으니까. 그리고 나 다음에 쓰는 분들은, 나 보다 못 쓸 리가 없을 테니 부담이 없을 거고. 난 사실 석사논문을, 정희진 쌤의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나 버틀러(Judith Butler)의 [젠더 트러블]Gender Trouble 정도로 써야 하는 줄 알았다. 그렇지 않다는 걸 깨닫자 부담을 덜 수 있었다. 물론 글쓰기 자체는 언제나 부담스럽지만. 그리고 다른 학교에서 나온 여성학과 논문들과 비교하기 시작하면 한 없이 부끄럽다. 난 항상 나의 부족함과 무능력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자학하는 경향이 있어 나의 이런 부끄러움이 새삼스럽진 않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부끄럽다.

어쨌거나 11월은 10월보다 더 바쁠 예정이다. 하지만 블로깅은 다시 조금씩 할 거다. 난 그저, 블로깅을 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놓여나고 싶었다. 다른 때라면 이런 강박이 좋지만 지금은 무리. 이제는 조금 여유가 생긴 거 같다. 그냥 틈이 생기면 하고 틈이 안 생기면 건너뛰고.

근데 바쁜 건 단지 논문 때문이 아니다. 12월부터 본격적으로 해야 할 일을 인수인계 받아야 하는데 그게 딱 지금이다. ㅠ_ㅠ 내년을 계획하면 하는 게 맞는데, 지금으로선 괜히 하겠다고 말한 거 같다. 인수인계만 있는 게 아니라 준비하기에 부담스러운 행사도 있어서 더 그렇다. 좀 익숙한 일이었다면 괜찮은데 이 일 역시 아예 처음 하는 일이다. 여성학과에서 이 행사는 상당히 크고 중요한데 난 별 관심을 안 두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다 낯설다. 무엇보다 나의 정치학을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협상할 것인가, 이게 관건이다.

참, 11월 중순에 우에노 치즈코가 온다. 관심 있는 분은 기억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