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 우분투, 등등

01
요 근래 귀가 많이 건조하고 조금 아픈 듯 했다. 그러려니 하다가, 오늘 아침 면봉에 후시딘을 묻혀 귓구멍에 넣었더니… 피가 묻어 나왔다. 켁. 흐흐흐. 오른쪽 귀만 그랬다. 왼쪽 귀는 문제가 없는 것 같고. 오른쪽 귀에서 문제가 생긴다면, 사실, 그러려니 한다. 아는 사람은 알지만, 나의 경우, 오른쪽 귀와 왼쪽 귀의 청력이 다르다. 더 정확하게는 왼쪽 귀가 더 잘 들린다(같은 뜻이지만 다르게 표현하면, 오른쪽 귀가 잘 안 들린다. 흐흐). 어릴 때, 교통사고라기 쓰기엔 무척 민망하지만, 암튼 그 비슷한 사고의 여파랄까. 아무려나 오른쪽에서 피가 나자 심드렁하다. 그럼 왼쪽이었다면? 사실 왼쪽 귀에서 피가 났어도 심드렁했을 거 같긴 하다. 흐흐. 다만, 조금 더 신경 쓰일 뿐.

02
요즘 밤이면 玄牝에서 한 시간 정도 우분투로 인터넷을 한다. 얼추 열흘 정도 전, 후치(노트북)에 우분투(ubuntu)를 설치했다. 엄밀하게는 윈도우 XP에서 간단하게 설치할 수 있는 Wubi(http://wubi-installer.org/)를 설치해서 우분투를 사용하고 있지만. Wubi는 윈도우 사용자들이 우분투/리눅스를 간단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든 것. 정말 설치도 쉽고, 제거하기도 쉽다(인터넷 연결은 필수며, 제거는 uninstall을 더블클릭하면 깔끔하게 지워진다).

굳이 玄牝에서 사용하는 이유는, 우선 인터넷을 연결해서 지속적인 업데이트를 시켜야 하는 이유가 첫 번째고, 우분투/리눅스에 적응하기 위한 것이 두 번째. 그리고 가장 큰 이유는 우분투에서 무선인터넷이 안 잡혀, 그 방법을 배워야 하는데, 유선인터넷은 玄牝에서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분투/리눅스를 사용하면서 느끼는 건, 의외로 사용하기 쉽고, 예상한 것 이상으로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는 것. 예상 이상의 공부는, 그동안 윈도우에 너무 익숙했기 때문일 터. 기억이 정확하다면 윈도우를 처음 사용할 때, 더 정확하게는 컴퓨터를 처음 사용할 때도 무언가를 배웠다. 고장 내면서 배웠건, 누군가에게 물어가면서 배웠건. 그렇게 배우다 보면 어느 순간, 몸에 익은 습관이 되겠지.

우분투/리눅스를 사용하며 놀란 것 중엔, 기본적으로 윈도우용 프로그램은 리눅스에서 사용할 수 없다는 이유로 바이러스에 감염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 예전엔 막연하게만 알았는데, 이번에 우분투/리눅스 관련 글을 이것저것 읽으며 배운 것이, 바이러스도 컴퓨터 운영체제에 따라 작동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고(하긴, 어떤 바이러스는 웹브라우저도 가린다니까, 당연한 걸지도). 웹상에 떠도는 많은 혹은 거의 대부분의 바이러스들이 윈도우에서 작동한단다. 그래서 재밌는 건, 윈도우에 안티-바이러스 제품을 설치하면 실시간 감시기가 작동하는데, 우분투/리눅스에 안티-바이러스 제품을 설치하니 실시간 감시 기능이 없더라. ;;; 첨엔 깜짝 놀랐다. 제대로 설치가 안 된 건가 싶어서. 대신 바이러스에 감염된 파일이 우분투에선 문제가 없는 듯 인식되어도, 윈도우를 사용하는 이들에게 파일을 전송하면 감염되기에 리눅스 운영체제가 바이러스 유통경로가 되기도 한다고. 흐흐.

아직은 많은 시간을 사용하지 않아, 우분투를 주로 사용할 수 있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다만 무선인터넷 연결(계속해서 공부할 필요가-_-;; 현재 알 듯 말 듯 ㅠ_ㅠ)과 한글 워드프로그램 사용만 해결되면 윈도우를 사용하지 않아도 큰 불편함은 없을 듯. 그 이유가, 어차피 후치로 인터넷 결제를 안 하기 때문. 아래아 한글은 wine으로 해결할지 리눅스 버전을 구할지 고민 중. 아…! 그러고 보니, 무한도전을 보려면 ActiveX가 필요하구나;;;

어쨌거나 뭔가 낯설고 신기하고 재밌는 세계다.

+
불편하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사실 윈도우에서 내가 사용하고 있는 방식이 더 불편할 듯. -_-;;
그리고 [Run To 루인]을 처음 시작했을 때, 내가 우분투/리눅스는커녕 컴퓨터 운영체제와 관련한 주절거림을 끼적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

03
생활이 조금씩 자리를 잡고 있다. 좋은 징조다.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2009.02.21. 16:40. 아트레온 1관 지하3층 V-14.
스콧 피츠제럴드.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김선형 옮김. 서울: 문학동네, 2009

00
지난 토요일 오전, 자꾸만 영화관에 가고 싶었다. 딱히 끌리는 영화가 있었던 건 아니다. 물론 [다우트]와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영화관에 가리라고 체크한 영화이긴 하지만. 🙂 하지만 영화관에 가고 싶게 하는 영화가 있다는 것과 영화관에 가고 싶다는 것은 다른 욕망. 영화관에 가고 싶은 날, 영화관에 가고 싶게 하는 영화가 있는 게 최상의 궁합. 하지만 그날 난 몸이 피곤했고, [다우트]를 보고 나왔을 땐 조금 지쳐있었다. 그럼에도 언제나 계획에 따라 움직이는 나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를 위해 아트레온으로 향했다.

그리고 벌써 며칠이 지났다. 영화 감상문은 영화관에서 나온 당일 혹은 그 다음날 쓰는 게 가장 좋다. 그렇지 않을 경우, 감흥이 많이 떨어져 쓸 말이 있어도 쓸 동기가 안 생기기 때문. 쓰고 싶은 다른 주제의 글이라도 있다면 자꾸 미루게 되어 결국 안 쓰게 된다. 그러니 지금 이 글이 어떤 형태를 갖출지는 나도 모르겠다. 흐흐흐. -_-;;;

01
미리 말하자면 영화 중간에 난 종종 몸을 비틀었다. 그건 토요일의 두 번째 영화였기 때문일 수도 있고, 무려 166분에 이르는 상영시간 때문일 수도 있다. 혹은 중간에 좀 편집했으면 좋으련만, 얘기가 종종 늘어지는 느낌이 들어 좀 지루해서일 수도 있고. 아무려나, 영화가 끝났을 때 난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을 읽고 싶었다. 스콧은 어떻게 썼을지 너무 궁금했다.

스콧 피츠제럴드에 대한 나의 인상은 상당히 부정적이다. 스콧과 관련한 이야기를, 젤다 피츠제럴드(Zelda Sayre Fitzgerald)와 함께 들었기 때문이다. 글 재능이 너무도 뛰어났던 젤다가 글을 쓸 수 없었던 이유, 젤다가 생의 후반기에 고통을 겪어야 했던 이유 중 스콧으로 인한 경우가 너무 많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젤다의 많은 작품이 스콧과 공저로 출간되거나 스콧의 이름으로 출간되었다는 걸 알았을 때, 놀라지는 않았다. 지금도 이런 경우는 너무도 빈번하니까. 다만, 놀랍지 않음이 스콧을 읽지 않게 하는 이유는 되었다. 그러니 영화가 끝났을 때, 스콧의 소설이 궁금했던 건 스콧의 스타일을 알아서가 아니다. 영화의 원작에 해당하는 소설이 어떤 형태일지가 궁금했다.

02
예전에 누군가의 글에서, 영화와 소설은 장르와 문법이 너무도 다르기에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를 만들 때, 소설에 충실할 필요가 없다고 지적한 내용을 읽은 적이 있다. 소설이라는 원작을 충실하게 재현하려는 건 영화의 매력을 간과하는 것이라고 누군가는 말했다. 이 지적에 동의한다면, 벤자민 버튼에 관한 소설과 영화는 각자의 방식으로 성공적이다. 조금 심하게 말하면, 영화는 소설에서 주인공의 이름과 시간을 역행하는 인간의 일생이라는 아이디어, 두 가지만 빌렸을 뿐이다. 제목만 같을 뿐, 영화와 소설은 완전히 다르다. 사람들마다 각각의 매력을 발견할 텐데, 난 소설이 좀 더 재밌었다. 무엇보다도 짧아서… -_-;; 흐흐.

(+ 출생에 관한 아이디어만 보면, 벤자민은 중국의 노자를 닮았다. 노자는 한자로 老子, 즉 ‘늙어서 태어난 아이’란 뜻이다. 노자는 태어났을 때부터 백발의 노인이었고, 그래서 이름을 老子로 지었다고. 스콧이 노자의 얘기를 알았을지 몰랐을지는 확실하지 않다. 아, 노자가 벤자민처럼 시간을 역행했다는 기록을 읽은 적은 없다. 물론 노자가 태어났을 때부터 늙은 모습이었다는 말은, 노자를 신선으로 신화화하려는 기획 속에서 만들어진 얘길 수도 있다.)

02-1 소설의 경우
소설책을 샀을 때, 조금은 긴가민가했다. 책을 사는데 돈을 아끼지 않는 편이라 영화관을 나서서 곧장 책방에 갔지만, 영화 개봉을 앞둔 날림번역이면 어쩌나 했다. 이런 염려는 소설의 첫 문단을 읽으며 사라졌다. 지금 책이 없어서, 대충 기억나는 대로 쓰자면, 의학의 높으신 신들은 출산을 병원에서 할 것을 명령하지만 1860년대엔 그러지 않았다는 식이다(영문은 http://en.wikisource.org/wiki/The_Curious_Case_of_Benjamin_Button/I 참고). 당대의 의료기술, 의학의 권위에 대한 이런 조롱으로 시작하다니, 호감이 아니 갈 수 있으랴. 이 소설은 1920년대 초반에 출간되는데, 당시의 의학이 가지는 권력과 권위는 비슷한 시기를 배경으로 한 [체인질링]에서도 확인할 수 있을 듯.

아무려나 의학에 대한 조롱으로 시작하는 소설은, 아기의 출생 장면부터 재밌다. 로저 버튼(벤자민의 아버지)이 아이가 태어난 병원에 달려갔을 때, 의사와 간호사들은 로저를 기피하고, 어떻게든 벤자민과 관련한 얘기를 하지 않으려 한다. 아무려나, 로저가 신생아실에 도착했을 때 만난 장면은, 육십 하고도 열 살은 더 먹은 것 같은 노인네가, 아기가 침대에서 벗어나지 못 하게 막아 둔 울타리(?)에 발을 걸치고 있는 모습이다. 즉, 소설 속에서 벤자민은 태어나자마자 자신의 나이를 대충은 파악할 뿐만 아니라 말도 무척 잘 한다. 심지어 아이들이 하는 놀이를 싫어할 뿐만 아니라, 로저가 사다주는 아동용 장난감보다는 백과사전을 보는 식이다. 소설엔 전반적으로 조롱과 해악이 넘치며, 지순한 사랑이나 해피엔딩 같은 건 없다. 그것이 스콧 자신에 대한 조롱인지, 변명인지는 모호하지만.

+
방금 인터넷교보로 확인하니, 비슷한 시기에 번역본이 무려 다섯 종류나 나왔다. -_-;; 내가 간 서점엔 문학동네에서 나온 것 밖에 없었는데, 노블마인에서 그래픽노블과 소설을 묶은 것도 있네. 아쉽다. 흐.

02-2 영화의 경우
소설이 1860년 즈음에 벤자민이 태어나, 스콧이 자신의 소설을 쓸 즈음을 벤자민의 일생이 끝나는 시점으로 잡는다면, 영화는 영화를 만들 즈음의 시기를 80 인생이 끝나는 시점으로 잡는다. 그러니 영화 속 벤자민이 태어난 시기는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1차 대전 참전 용사를 애도하는 의미로 거꾸로 가는 시계가 만들어지는데, 이 시계가 등장한 후 벤자민은 태어난다. 아기의 몸이지만 무척 나이든 모습으로.

소설에서 로저가 벤자민이 싫지만 계속해서 키운다면, 영화에서 벤자민의 생부는 벤자민을 어느 집 입구에 버린다. 그곳은 나이든 노인들이 죽기 전까지 머무는 양로원. 이 설정은 확실히 흥미롭다. 나이든 얼굴로 태어난 벤자민이 무난하게 살아가기 위한 장치로 양로원만큼 좋은 곳은 없기 때문이다. 양로원의 한 할머니는 벤자민의 얼굴을 보더니, “내 죽은 남편을 닮았네”라고 반응한다. 양로원이란 공간, 나이든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머무는 공간에서 태어날 때부터 80살의 얼굴을 한 벤자민은 특별할 것 없는 존재로 살아갈 수 있다(고 영화는 가정한다).

역사적인 차이를 의식해선지는 모르겠지만, 소설에서 벤자민의 애인이자 부인인 힐데가드는 벤자민과 결혼을 하고 별다른 능력이 없는 인물로 나온다. 반면 영화에서 데이지(케이트 블란쳇 분)는 유명한 댄서로 등장한다. 그리고 벤자민과 데이지는 결혼하지 않는다. 영화가 소설과 가장 다른 부분은 영화에서 데이지와 벤자민은 거의 80 평생을, 때때로 서로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시기가 있다 해도, 서로 좋아하는 관계로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03
이 영화가 좀 지루했다면 80 평생의 사랑이란 설정 때문이기도 하다. 좀 심하지 않나? 죽을 때까지 함께하는 사랑이란 말을 믿지 않는 이 시대에(나만 이렇게 믿나? -_-;;) 평생을 유지하는 사랑이란 이야기라니…. 그러니 이 영화는 평생을 사랑했다는 과거의 어떤 낭만적인 사랑이야기를 다시 끌어들이려는 욕망으로 읽을 수도 있다. 사랑이 더 이상 영원불멸의 것이 아니란 걸 알고 있기에, 낭만적 사랑이란 환상을 말하려는 것일지도. 혹은 사랑이 변한다는 걸 너무 잘 알기에, 일생을 함께 하는 어떤 관계에 대한 바람을 반영한 것일 수도 있고. 아마도 후자의 가능성이 크겠지? 그 어떤 관계도 안정적일 수 없다는 것을 알 때, 안정적인 어떤 관계를 바라는 욕망이 생길 수 있으니까.

그러니 각자의 집으로서 누군가와 평생 함께 한다는 상징이라면, 그럭저럭 괜찮다. 데이지에겐 벤자민이, 벤자민에겐 데이지가 멀리 떠났다가도 다시 돌아갈 수 있는 어떤 집이라면. 서로를 구속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헤어지는 것도 아닌 어떤 관계라면. 물론 데이지와 벤자민은, 젠더 이분법이 완고한 사회에서 ‘여성’으로, ‘남성’으로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기에 그들이 동일한 방식으로 살 수는 없다.

다른 한편, ‘남자’의 일생이란 측면에서 독해하면, 벤자민의 일생은 새로울 게 전혀 없다. 물론 미국의 맥락에서 ‘남자’의 일생이 어떤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남자들은 나이 들어서도 애다.’라고 말하는 한국의 어떤 맥락에서 읽으면, 벤자민의 거꾸로 가는 시간은 ‘남자’로 지정받아 자신을 ‘남성’으로 이해하며 살아가는 이들의 평균적인(!) 삶 아닌가?
(+ 평균적: 개개인에게 일괄적으로 적용해선 안 되지만 어떤 경향으로 이해할 수는 있는.)
데이지와 벤자민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났을 때, 벤자민은 자신의 변화로 인해 아이를 제대로 양육할 수 없다며 떠난다. 하지만 이는 아이 양육에서 벗어나려는 욕망으로도 독해 가능하다. 데이지가 아이 두 명을 키우게 할 수 없다는 벤자민의 말과 달리, 벤자민은 자신이 10대의 몸을 지니면서 데이지에게 돌아가고, 결국 데이지는 어린 아이가 된 벤자민을 돌본다. 이성애-젠더 이분법에서 ‘여성’과 ‘남성’에게 요구하는 역할이, 시간이 거꾸로 가는 것과 상관없이 이 영화에서도 반복한다. 읽기에 따라선 시간이 거꾸로 가니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 핑계를 대는 거 같다. 또한 영화의 설정에서, 벤자민은 생계부양자나 소위 ‘남성’의 역할이라고 불리는 어떤 규범도 실천하지 않는다. 부잣집 도련님의 운 좋은 일생이라고 해야 할까?

04
그나저나 케이트 블란쳇은 멋있다. +_+
아울러, 댄스 공연을 다니는 팀들 간의 관계와 관련한 이야기는 상당히 흥미로웠다. 흐흐흐. 너무 짧게 나와서 길게 얘기하긴 난감하지만, 가장 흥미롭고 재밌었던 부분. 히히.

[영화] 다우트

[다우트] 2009.02.21. 토. 14:14 아트하우스모모. B4층 1관 F-3

※토요일의 교훈
토요일엔 영화관에 가지 말 것: 평일이면 사람이 별로 없을 영화에도 사람이 너무 많음.
몸이 피곤한 날 영화관에 잇달아 가지 말 것: 두 번째 영화에 집중력이 현저히 떨어짐.

01
게일 러빈(Gayle Rubin)은 1984년에 “섹스를 생각하기Thinking Sex”란 논문을 썼다. 이 논문을 독해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그중 하나는 이성애-젠더 이분법에 적절하지 않은 방식으로 젠더와 섹슈얼리티를 실천하는 이들이 제도를 통해 어떻게 가시화(혹은 위계화) 되는지를 기술하는 역사서로 읽는 것이다. 러빈의 지적에 따르면, 미국은 1950년대 이후(특히나) 동성애자를 비롯한 규범적인 이성애가 아닌 성적 실천을 하는 이들, 트랜스젠더들을 정치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했다. 일례를 들면,

1955년, 아이다호에 있는 보아이즈에서, 학교 선생은 조간신문을 읽으며 아침을 먹으려고 식탁에 앉았다. 그는 아이다호 제 1 국립 은행의 부총장이 소도미의 중죄로 체포되었다는 기사를 읽었다. 지역 검찰관은 지역에서 모든 동성애를 소탕할 작정이라고 말했다. 선생은 결코 아침식사를 끝낼 수 없었다. “그는 의자에서 뛰어 올랐고, 그의 슈트케이스를 꺼냈고, 할 수 있는 한 빨리 짐을 꾸려선 차를 타고 샌프란시스코로 향했다. 학교 직원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려고 왔을 땐, 차가운 달걀, 커피, 그리고 토스트가 그의 식탁에 남아있었다.”
(Rubin 1993, 쪽수는 기억이 안 남-예전에 발제한다고 날림 번역한 것의 일부를 사용한 것)

이런 식이었다. 동성애자라는 이유만으로 그 자리에서 체포될 수 있는 시대. 러빈이 인용한 어떤 사례엔 다음의 얘기도 있다: 한 겨울 동성애자들이 자주 사용하는 목욕탕에 경찰들이 급습하였다, 경찰들은 목욕탕에 있던 이들이 수건으로 몸을 간신히 가린 상태로 모두 거리로 몰아냈다고 한다. 이것이 가능했던 건 동성애, 더 정확하게는 이성애-젠더 이분법에 부합하지 않는 모든 행동은 불법이었기 때문이다. 태어났을 때 남성(여성)으로 지정받았지만 자신을 남성(여성)으로 인식하지 않아 여성(남성)의 복장을 입는 이들, 동성애자들, 양성애자들, “소아성애”로 싸잡아 비난받는 세대 간의 사랑 실천자들 등등 규범적인 성도덕을 실천하지 않는 이들은 경찰이 그 자리에서 체포할 수 있었다. 그러니 ‘의심’ 받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의심만으로도 경찰에 잡혀갈 수 있었다.

더욱이 1940년대 후반 이후, 맥카시의 광풍으로 공산당이라는 의심만으로도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질 수 있다는 분위기가 남아있는 1960년대에 의심은 그 자체로 위협이자 공포다. 특히나 동성애와 같이 증명도 반증도 어려운 일들로 ‘의심’받는다는 건 곧 그것으로 결정되는 것과 같다. 그러니 ‘의심’은 상대를, 그리하여 나 자신을 규제하는 장치다. 한국에서, 소위 민주화 운동을 했다는 정치인의 자서전을 읽어보면 의심만으로 경찰에게 끌려가선 고문당하는 장면들이 등장한다. 박정희 시절엔 술자리에서 고위층의 비리에 불만을 표했다는 것만으로 잡혀갔었다. 그러니 의심은 가장 무서우면서도 효율적인 정치제도이자 규제 장치다.

#영화 줄거리를 쓰는 과정에서 스포일러일 수 있는 내용들이 포함되었습니다. 후훗.
02
영화 [다우트 Doubt]는 주인공들 중 한 명인 플린 신부의 연설(?, 설교는 아닌데, 그 뭐라고 하죠? -_-;;)로 시작한다. 그 내용은 의심에 관한 것으로, “의심은 확신만큼이나 확고하고 지속적이다”고 끝맺는다(정확하진 않지만 거의 비슷하게 인용;;). 의심은 확신만큼이나 확고하고 지속적이라는 말, 이 말이 이 영화의 시작이자 끝이다.

이 영화는 케네디가 죽은 다음 해인 1964년, 성 니콜라스 교구 학교를 배경으로 한다. 사건은 간단하다. 플린 신부(필립 세이무어 호프만 분)와 학생 도널드 사이의 알 수 없는 어떤 일을 알로이사(메릴 스트립 분) 교장 수녀와 제임스(에이미 아담스 분) 수녀가 의심하는 것, 의심하는 행위가 유발하는 일련의 연쇄반응들이 이 영화의 표면적인 사건이다. 알로이사 교장수녀는 플린 신부가 명확하게 밝히지 않는 도널드(인종범주로서 흑인, 이 영화에서 인종은 상당히 중요한 변수다)와의 일을 계속해서 의심하고, 결국 의심을 확신한다. 이제 알로이사 교장수녀는 학교를 보호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플린 신부를 학교에서 쫓아내려 하고, 결국 플린 신부는 학교에서 나간다. 물론 종교계에서까지 떠나는 건 아니다. 오히려 더 좋은 자리로 옮긴다. 재단은 무슨 이유로 플린이 성 니콜라스 교구 학교를 떠나는지 알지만 플린 신부를 승진시킨다.

알로이사 교장수녀가 최초로 의심한 사건은, 플린 신부는 세대 간의 사랑 실천자이자 게이로 도널드를 강제 추행했다는 것. 제임스 수녀가 수업을 하고 있는 중간에 플린이 도널드를 부르는데, 플린에게 갔다 온 후 도널드는 얼굴 표정이 안 좋았고, 술 냄새가 났다. 제임스 수녀는 교장수녀에게 이 사건을 상담한다. 교장수녀는 게이 신부가 나이와 지위, 인종이란 여러 권력을 통해 도널드에게 성폭력을 가했다고 믿는다. 교장수녀는 결국 도널드의 엄마, 밀러(비올라 데이비스 분)를 불러 사건을 넌지시 설명한다. 하지만 밀러는 관련 얘기를 듣고 싶어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어떤 사건도 드러나지 않고 조용히 지나가길 바란다. 알로이사 교장수녀가 밀러의 모성을 의심하자, 밀러는 도널드가 게이라고 밝히며 도널드가 성 니콜라스 교구 학교로 전학해야 했던 이유가 흑인인 동시에 게이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며 밀러는 알로이사에게 조용히 지나가줄 것을 요청한다. 성 니콜라스 교구 학교를 졸업해야 좋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공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며. 교장수녀는 도널드가 게이라는 사실을 통해, 플린 역시 게이임이 확실하다고 믿으며 기어이 플린을 학교에서 쫓아낸다. 그리고 플린은 떠난다. 이제 교장수녀는 기뻐하는가? 영화의 가장 마지막 장면은, 알로이사 교장수녀가 제임스 수녀에게 자신의 행동이 의심스럽다고 말하며 우는 모습이다. 확신에 차서 플린 신부를 쫓아냈지만, 그 확신이 의심스러워지는 찰나. 의심의 다중주.

누군가를 의심하고, 의심이 확신으로 용어가 바뀌는 경험을 하고, 확신으로 실천했던 일을 다시 의심하는 의심의 다중주. 사실 의심과 확신은 어감상의 차이는 있어도 내용상의 차이는 별로 없다. 영화 서두에서 플린 신부가 말했듯, 의심은 확신만큼이나 확고하고 지속적이며, 어떤 의심은 그 자체로 이미 확신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의심한다는 것은, 의심하는 내용을 100% 수준은 아니어도 확신한다는 뜻이다. 긍정적인 의미라 할 수 있은 어떤 확신 역시 100% 순도라고 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의심하는 내용을 확신하는 것과 농도가 비슷하다.

영화 중간에 제임스 수녀는 미국의 역사를 가르치는 와중에 루즈벨트의 유명한 말, “우리가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이다”를 학생들에게 들려준다. 이 말이 지닌 문장구조는 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의심과 확신을 이해하는 키워드에 해당한다. 의심을 의심하는, 의심을 의심(확신)하는, 의심(확신)을 의심하는, 결국 확신을 재차 확신하고자 욕망하는 긴 과정 속에서 무엇을 의심하고 무엇을 확신하는 것일까? 확신한다고, 확고하게 믿는다고 믿는 순간 의심이 꿈틀거리며 몸을 감쌀 때, 이렇게 몸을 감싸는 의심이 다시 한 번 확신으로 변할 때, 무엇이 의심이며 무엇이 ‘진실’인지 구분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끊임없는 번복과 의심의 순환 구조 속에서 긴장하고 갈등할 뿐이다.

이런 이유에서 이 영화의 결말부분은 매력적이다. 이 영화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요 계기인 플린 신부와 도널드 사이의 어떤 일이 무엇인지는 결코 드러나지 않는다. 어떤 정황들은 있지만 드러나는 건 정황들뿐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명확하게 발생한 사건은 ‘의심’ 뿐이다. 의심이 어떻게 확신으로, 의심이 어떻게 사건으로 바뀌는지만 드러날 뿐이다.

03
의심의 정치학을 복잡하게 다루는 이 영화는, 또한 소위 남성들 간의 연대가 얼마나 돈독한지를 드러내는 정치서사이기도 하다. 남성들 간의 연대 혹은 신부라는 지위와 수녀라는 지위 차이는 이 영화 곳곳에서 드러낸다. 그것을 가장 극단적으로 드러내는 장면 중 하나는 식사 장면. 세 명의 신부들은 고기를 썰고 뚱뚱한 여성을 비하하는 발언을 농담이랍시고 웃으며 나누며 식사를 한다. 여덟 명의 수녀들은 간단한 음식과 우유를 마시며 조용하고 조촐하게 식사를 한다. 이 장면은, 만약 플린 신부가 도널드에게 정말로 성폭력을 행사했다 해도, 1960년대 동성애자란 의심만으로 불심검문과 구속이 가능한 시대에 플린 신부가 게이였다 해도, 남성간의 연대, 신부간의 연대, 종교의 성스러움을 유지하기 위한 종교재단의 욕망이 플린 신부를 보호해준다는 걸 암시한다.
(+만약 종교 재단이 플린 신부가 게이란 걸 인정하고 재단에서 추방한다면, 이는 신부 중에도 게이가 있다는 것, 게이여도 신부가 될 수 있다는 것, 게이 역시 신의 선택을 받을 수 있고 대중을 인도하는 인물이 될 수 있다는 걸 자인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따라서 동성애를 혐오하고 신의 뜻에 위배되는 행동이라고 비난하던 1960년대 당시, 종교 재단이 취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플린 신부의 ‘의심스럽지만 확증할 수 없는’ 행동을 묵과하며 승진시키는 길 뿐이다. 재단이 플린 신부를 추방하지 않고 승진시키는 것으로 플린 신부에게 가해진 모든 의심을 일축할 수 있는 동시에 종교재단에 게이 혹은 동성애자는 없다는 것을 공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플린 신부가 게이인지 아닌지, 플린 신부와 도널드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밝혀지는 건 아니다.)

영화는 극히 단순하게 플린 신부를 진보적이고 종교를 가족처럼 편안한 공간으로 만들려는 인물로 그리고, 알로이사 교장수녀를 학교(기존의 제도 혹은 지배체제)를 지키고 규율을 지키기 위해 통제와 공포를 적절히 사용하는 인물로 그린다. 하지만 영화의 흐름 속에서 지배체제에 의해 보호받는 인물은 변화를 주창하는 플린 신부다. 체제 유지를 위해 애쓰는 알로이사 수녀는 자신의 확신을 의심해야 하는 처지에 빠질 뿐이다.

지배 권력을 획득하지 못 한 인물은 자신의 의심-확신을 끊임없이 의심해야 하는 위치에 처하며, 지배구조를 의심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의심해야 한다. 그러니 의심을 의심해야 하는 인물은 자신을 설명할 언어를 획득하지 못 한 이들이며, 자신을 설명할 언어가 부인당하는 경험을 한 이들이다.

04
이 영화에서 가장 많은 말을 토해내고 싶지만 결코 말하기 쉽지 않은 부분은 인종 논쟁.

밀러 부인과 알로이사 교장수녀가 만난 자리에서, 밀러 부인은 도널드가 복사 일을 못 하게 되자 아버지에게 얻어맞았다는 얘길 전한다. 처음엔 복사 일을 못 하게 된 것, 즉 도널드가 무언가를 잘못 해서 구타당한 걸로 알로이사는 이해한다. 하지만 밀러 부인은, 복사 일을 못 하게 된 잘못 때문이 아니라, 도널드가 게이여서 그렇다고 정정해준다.

나는 이 장면이, 나의 과도한 방어기재라 해도, 흑인들이 동성애혐오가 더 심하다는 편견을 강화시키는 장면으로 읽힐까봐, 혼자 괜히 염려했다. 흑인사회에 동성애 혐오가 더 심한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한 사회에서 소위 소수집단이라고 불리는 집단의 사건은 언제나 과장되기 마련이다. 일테면 한국인의 절도는 그냥 한 개인의 사건이지만, 한국에 이주한 필리핀 사람의 절도는 필리핀 사람들 전체의 속성으로 이해되듯. 그러니 도널드를 이해한다고 여겨지는 유일한 인물이 플린 신부란 점은, 흑인은 아니어도 백인은 상대가 게이여도 개의치 않는다는 듯 한 인상을 줄 뿐만 아니라, 영화의 배경이 되는 시대적인 맥락에서 백인들 간의 동성애혐오 폭력을 은폐하는 기묘한 효과를 낳는다. 물론 이건 나의 과도한 독해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미묘하다. 못내 찜찜하다.
(+밀러 부인과 알로이사 교장수녀의 대화중에, 알로이사 교장수녀가 당시의 인종차별이란 맥락을 전혀 무시하는 듯 한 태도를 보였다는 점 역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05
으악. 쓰다 보니 글이 길어졌다. -_-;; 그만큼 할 말이 너무 많은 영화란 의미겠지. 지금 어딜 가야 하는 관계로 이쯤에서 중단. 흐흐.

곧 쓸 또 다른 영화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일단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을 읽고 나서 같이 쓸 예정. 영화관에서 나오며 원작이 너무 궁금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