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황 혹은 차이

01
어쨌든 지금은 살아 있잖아.
그럼 된 거야….

02
저에겐 새벽 2시나 3시에 전화를 해도 반갑게 받아주는 친구가 있어요. 사소한 문제는 제가 그 시간에 깨어있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거. -_-;; 그리고 밤 11시에 저에게 전화해서 불러 낼 수 있는 유일한 친구기도 하죠. (여기서 “유일한”은 앞뒤를 모두 수식해요.) 오래 만났다는 게 어떤 건지 이 친구를 통해 깨달아요. 전 현재 상황으로 미래를 약속하지 않는 편이죠. 행여 한다 해도, 전 그 약속을 믿지 않아요. 그때 가봐야 알 수 있는 거니까요. 그러니 지금 현재의 감정으로 미래를 담보하는 저의 어떤 말은 모두 거짓말이에요. 지금의 감정으로 미래를 어떻게 예측할 수 있겠어요. 그래서 “내일 봐”와 같은 인사는 공허한 관용어구라고 느껴요. 하지만 이 친구는 5년 혹은 10년이 지나도 그냥 만나고 있을 거 같아요. 모든 미래는 예측 불허지만….

아, 하려고 했던 얘기는 이게 아니고;; 제가 주행성의 원단이라면 친구는 야행성의 원단 정도랄까요. 친구가 요즘 낮에도 깨어 있어야 하는 상황인데 그게 힘들다는 말을 해서 관련 얘기를 나누다가 친구가 내린 결론: 올빼미는 참새가 될 수 없고, 종차(種差)는 어쩔 수 없다…. 이 얘기를 듣고 데굴데굴 굴렀지요. 흐. 그래서 저는, 신은 인간을 만들 때 주행성과 야행성으로 구분하셨다고 답했어요. ;;

차이라는 건 어떤 쓰임을 위해 발명하느냐의 문제죠. 개인을 “여성”과 “남성”으로 구분할 필요가 없죠. 친구와 나눈 농담처럼 주행성과 야행성으로 사람을 구분하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아요. 나눌 수는 있어요. 그럼 “나는 주행성도 아니고 야행성도 아니다.”거나 “나는 몇 시에 일어나서 몇 시에 자는 게 좋은데 이런 나는 주행성이냐 야행성이냐?”와 같은 문제제기가 쏟아지겠죠. “여성”과 “남성”이란 구분이라고 다르겠어요?

03
저의 입장에서 꽤나 당혹스러운 일을 경험하고 있어요. 지금까지 살아오며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 판단을 못 하고 있죠. 자세한 건 나중에…. 흐. 그저 그 모든 말이 어떤 의미인지 판단 할 수 없어서 당황할 뿐이죠.

+
그럼 다시 꼬르륵~
블로깅 하고 싶어 안달 난 1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