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커 이야기

01
ㄱ은 ㄴ을 스토킹한다. ㄴ은 ㄷ을 스토킹한다. ㄷ은 ㄹ을 스토킹한다. ㄹ은 ㅁ을 스토킹한다. ㅁ은 ㄱ을 스토킹한다. 돌고 도는 관계에 있는 스토킹과 스토커들. ㄱ은 ㄴ의, ㄴ은 ㄷ의, ㄷ은 ㄹ의, ㄹ은 ㅁ의, ㅁ은 ㄱ의 일거수일투족을 스토킹하기에 ㄱ, ㄴ, ㄷ, ㄹ, ㅁ은 이 스토킹 관계를 알고 있다. 알고 있지만 암묵적인 합의에 따라 서로 모른 척 한다. ㄷ은 ㄴ이 자신을 스토킹하고 있고, ㄱ이 ㄴ을 스토킹하고 있고, ㅁ이 ㄱ을 스토킹하고 있고, ㄹ이 ㅁ을 스토킹하고 있고, 자신은 ㄹ을 스토킹하고 있다는 것을 모를 수 없다. 현재로선 스토킹에 그치고 있기에 서로는 침묵하고 이 관계를 유지한다.

-나는 이 부분에서, 스토커야 말로 이름만으론 상대를 결코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아는 존재란 걸 깨달았다. 상대의 이름, 생활 반경, 행동 방식, 오늘 입고 있는 옷, 저녁에 먹은 밥, 즐겨 사용하는 펜의 색깔… 이런 것을 안다고 상대를 아는 것이 아니란 것을, 스토커들은 너무도 잘 안다. 이 모든 것을 기록하고 수집해도 상대를 완벽하게 알 수는 없다. 그래서 스토커들은 더욱더 상대에 집착한다. 그리고 종종 상대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암묵적인 합의는 이 관계를 유지하는 방법일 뿐 아니라 자신들의 삶과 생명을 유지하는 방법이다. 이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는 것이 문제였다. 아니 알고 있지만, 이 암묵적인 합의가 자신들의 삶과 생명을 유지시키는 힘이란 것을 알고 있지만, 그래서 문제였다. ㄱ은 스토킹, 그 이상을 욕망했다.

상대를 완벽하게 알고 소유하는 방법은 한 가지 뿐이다. 이 방법 외엔 없다. ㄱ이 ㄴ을 완벽하게 소유하고 알고자 하는 욕망을 끝까지 밀어 붙인다면 결론은 하나뿐이다. ㄴ의 죽음. 살아 있는 유기체를 완벽하게 소유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상대를 어떤 공간에 가두고 생활을 모두 통제한다고 해서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유기체를, 사고와 감정의 움직임이 없다고 가정하는 무기물로 만들어야만 그나마 소유는 할 수 있다. 이것이 소유라면. 모든 소유는 유기체를 무기물로 만드는 과정이다. 어쨌거나 무기물이 된 상대에게 여전히 관심이 있다면, 그리고 무기물로 만들어서라도 소유하고자 한다면.

ㄴ의 죽음으로 연결고리는 깨졌지만 ㄷ의, ㄹ의, ㅁ의 스토킹은 유지된다. ㄱ의 스토킹은 이제 무기물로 변한 ㄴ을 소유하는 것, 이 소유를 유지하고 소유 과정을 들키지 않는 것뿐이다. 하지만 연결고리의 암묵적 합의에 익숙했던 ㄷ, ㄹ, ㅁ 중 한 명이 분노를 느낀다면 어떻게 될까? 이 관계는 파국으로 치달을까? 만약 ㄴ의 죽음으로 누군가 분노를 느낀다면 누가 ㄱ을 공격할까? 누가 살아남을까? 만약 ㄱ이 죽는다면 가해자는 ㅁ일 가능성이 크다. ㄱ은 ㅁ에게 너무도 무심하고, ㅁ은 ㄱ을 너무도 소유하고 싶을 테니까. 혹은 ㄱ의 소유욕망을 ㅁ이 모방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반드시 ㅁ만이 ㄱ을 모방하는 것은 아닐 거야. ㄱ의 욕망과 실천을 누가 먼저 모방하느냐에 따라 마지막 생존자는 달라져.

근데 ㄱ이 ㄴ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보다, ㄴ이 스토킹 하는 ㄷ에게 질투를 더 크게 느낀다면? ㄴ은 ㄱ에게 관심이 없고 오직 ㄷ만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에 질투와 분노를 느낀다면? 어떻게 해서라도 ㄴ이 자신에게도 관심을 가지길 ㄱ이 욕망한다면? 이 욕망에 따라 ㄱ은 ㄷ을 없앤다. ㄷ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ㄴ이 ㄷ의 죽음을 막지 못 한 건 의외였다. 그럼에도 ㄱ은 ㄴ의 안중에 없었기에 가능했다. ㄱ은 ㄴ이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길 바랐고 이 바람은 성공했다. ㄴ은 이제 ㄱ에게 관심을 쏟았다. 그것이 분노와 저주, 복수의 형태이긴 해도, 어쨌든 관심은 관심이다.

ㄴ은 ㄷ의 복수를 다짐하고 복수를 계획한다. ㄱ은 ㄴ의 모든 행동과 계획을 눈치 채지만 어떤 대책도 세우지 않는다. ㄴ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니까. ㄴ은 복수를 실행에 옮긴다. 희생자는 ㄹ. ㄴ이 ㄱ에게 복수하려는 것을 ㅁ이 알 수밖에 없다. ㅁ은 ㄱ의 죽음을 막으려 하고, 이 과정에서 ㅁ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ㄹ은 알고 있다. ㄱ이 죽는 것은 상관없지만 ㅁ이 죽는 것은 참을 수 없는 ㄹ. ㄴ이 ㄱ을 죽이려고 하는 순간, ㄱ의 죽음을 ㅁ이 막고, ㅁ의 죽음을 ㄹ이 막는다. 결국 ㄴ은 ㄹ을 죽이고 남은 사람은 ㄱ, ㄴ, ㅁ.

ㄴ은 의도하지 않은 ㄹ을 죽여 충격을 받을 수도 있다. 이 이야기는 ㄹ을 죽인 충격으로 ㄴ이 복수를 중단하는 식으로 진행하지 않는다.

ㅁ은 ㄴ이 ㄱ을 죽이려 했다는 것에 분노한다. 눈치는 채고 있었지만 실행에 옮겼다는 사실에 분노한다. ㄱ은 ㅁ의 행동을 확인할 수 없지만 ㅁ은 ㄱ과 ㄴ의 행동을 모두 알고 있다. 그리고 ㄱ이 전혀 눈치 챌 수 없는 바로 그 상황에서 ㅁ은 ㄴ을 죽인다. ㄱ은 다급하게 ㄴ의 죽음을 막으려 하지만 한 발 늦었다. ㄴ은 죽었고, 이제 남은 사람은 ㄱ과 ㅁ. ㄱ은 살아있는 ㄴ을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고, 살아있는 ㄴ을 소유하고 싶은 욕망을 실현할 수도 없고, ㄴ의 손에서 죽는 기쁨도 누릴 수 없다. ㄱ은 분노하고 ㄴ의 복수를 다짐한다.

02
ㅁ은 ㄱ의 복수를 순순히 받아들일까? 만약 ㅁ이 ㄱ과 완벽하게 동일시하고 있다면 ㅁ은 ㄱ이 자신에게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음에 기뻐하고 자신이 죽길 기다릴까?

ㄱ이 ㄴ과 완벽하게 동일시하고 있는 상태였고, ㄴ의 죽음을 충분히 애도할 수 없을 뿐 아니라 ㄴ의 죽음이 자신의 부주의에 따른 것이라고 자책한다면, ㄱ은 ㅁ에게 복수를 하는 대신 스스로의 죽음을 선택할 가능성이 크다. ㅁ은 ㄱ을 어떻게든 살리려고 애쓸 테고, ㄱ은 ㅁ을 용서할 수 없기에 어떻게든 죽으려고 애쓰겠지. ㅁ이 ㄱ과 완벽하게 동일시하고 있다면 ㄱ의 자살시도에 충격 받고 ㅁ도 자살을 시도할지도 몰라. 하긴 ㄱ이 죽는다면 ㅁ도 죽을 거야. ㅁ은 ㄱ의 죽음을 은근히 바라고 있을까? 그래서 같이 죽은 것을 선택할까? 아님 ㄱ만은 어떻게든 살리고 자신만 죽는 것을 선택할까? ㅁ은 차라리 ㄱ을 죽이고, 무기물로 변한 ㄱ을 완벽하게 소유하고픈 욕망을 품을까?

결론을 먼저 말하면,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사람은 ㄱ. 이 모든 파국을 일으킨 장본인인 동시에 최후의 생존자.

03
몇 해 전, 헌책방에서 알바를 할 때였다. 오후 시간에만 일했는데 오후 시간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한산했고, 나는 시험을 앞두고 괜히 헌책을 뒤적이고 있었다. 그때 읽은 소설의 내용이다. 다섯 명의 스토커들이 벌이는 사건. 1970년대 즈음 문고본 시리즈 중의 하나로 나온 책이었다. 안타까운 건 저자와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ㅠ_ㅠ 책을 거의 다 읽었을 즈음 저녁시간을 담당하는 사람과 교체해서 중간에 덮었다. 다음날 나머지를 마저 읽으려고 했을 때 그 책은 이미 팔리고 없었다. ㅠ_ㅠ 그래서 어떻게 ㄱ이 마지막 생존자인지 알 수 없다. 책 소개글과 도입부에 있는 가상의 저자를 통해 짐작할 수 있을 뿐. (혹시 이 책을 아는 분 계세요? ㅠ_ㅠ)

가끔 이 소설의 이야기를 떠올려. 스토커야 말로, 상대방에게 집착하는 사람이야 말로, 상대방을 완벽하게 소유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아는 사람들이야. 상대방의 이름은 상대에 대한 어떤 정보도 알려주지 않아. 그저 막연하게 부를 수 있고 지시할 수 있을 뿐. 하지만 내가 소설 속 주인공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 하듯, 상대방의 이름을 몰라도 나만의 기호로 지시할 수 있어. 이름은 그 사람의 무엇도 알려주지 않아. 이름뿐이겠어? 그 사람의 취향, 행동 방식, 생활 반경 등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려주는 단서일 뿐. 알고 싶다는 욕망, 알 수 있다는 욕망, 그래서 아무리 애를 써도 알 수 없다는 좌절의 욕망이 뒤섞인 상태에서 벌어지는 비극을 스토커들은 체화하고 있어.

좀 더 자주 이 소설을 떠올려. 나는 이 소설의 스토커 중 어느 위치에 있는 사람일까, 하고. 가장 먼저 죽는 ㄷ일까, 대신 죽는 ㄹ일까,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ㄱ일까. 나는 어떤 순환구조에 빠져 있는 걸까?

멀리, 아주 멀리, 돌아서

한 번 떠난 곳을 다시 돌아가는 건 힘든 일이야.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 그렇지. 그랬지.
아쉬움과 막연한 기대가 있었던 거 같아. 멀리, 멀리 돌아서 다시 돌아가는 건 불가능한 걸 알았기에, 기대했는지도 몰라.
아쉬운 건 없어. 그냥 내가 좀 바보 같아. 히히.

특강, 퀴어 단상

작년 가을 즈음이었다. 학과 사무실 문에 붙은 “This Is Queer”란 포스터를 보며 사람들이 얘기를 나누는 소리가 났다. 그들의 목소리가 울려서 사무실 안에서도 들렸다. 퀴어가 뭐냐고 서로에게 물었고, 누구도 몰랐다. 그런 와중에 한 명이, 퀴어가 뭔지는 몰라도 퀴어영화는 동성애영화니까, 퀴어는 동성애일 거라고 추측했다.

학사일정에 따르면 11월 중순 즈음엔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겨야 한다(“생긴다”가 아니라 “생겨야 한다”에 주의! ㅠ_ㅠ). 그래서 특강을 하기로 했다. 아는 분이 특강을 청탁했고, 그 분이 날짜를 조율해줘 11월 중순으로 낙찰. 하지만 다른 활동은 다 접어도 원고와 강연은 하겠다고 내심 다짐했으니 일정 조정이 안 되어도 했으리라. 요즘과 같은 시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움직임은 원고와 강연이니까.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이것만은 해야겠다는 어떤 다짐이 있었다. 트랜스젠더 운동이 워낙 협소하고 생소해서, 원고나 강연 등이 조금이나마 지평을 넓히는 계기가 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물론 운동이 의무감으로만 가능한 건 아니다. 그러니 지평 확대를 위한다는 말은 대외홍보문건을 만들 때나 쓰는 거고. 그냥 내가 좋아서 한다. 나 행복하게 살려고 한다. 그 뿐이다. 글을 잘 쓰는 편이 아니라 원고를 발송하면 곧장 자학하며 퇴고를 모색하고, 강연이 끝나면 그때부터 한 이틀 정도는 자학하지만, 그래도 좋다. 어쩌면 내가 아주 쓸모없는 인간은 아니란 걸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고(이건 가족사와 나의 열등감 등이 뒤엉킨 부분).

흥미롭게도 11월에 있을 특강은 수강생들의 요구로 개설되었다고 한다. 첨엔 퀴어를 별도의 주제로 잡지 않고 전체 주제에서 퀴어를 녹이는 방식으로 진행하려 했단다. 근데 수강생들이 “왜, 퀴어를 별도로 다루지 않느냐?”며 퀴어 주제를 별도로 요구했다고 한다. 그리고 나의 특강이 잡혔고, 사람들이 어떤 내용을 듣고 싶은지 미리 알면 좋아서 질문지를 받았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질문을 올렸다고 했다. 고무적인 현상이다. 딱, 여기까지만 고무적인 현상이다.

내게 특강을 청탁하신 분은 나를 퀴어 운동과 관련한 활동가로만 소개했다고 한다. 이 소개를 듣고 수강생이 보인 첫 번째 반응. “그 사람 게이예요?” 질문지에 등장한 질문의 대부분은 “동성애”와 관련 있다. 그러니까, 퀴어는 곧 동성애고 동성애는 곧 게이다. 아님, 퀴어는 곧 게이고 게이는 곧 동성애다. ∥OTL 정말 오랜 만에 쓰는 좌절표시다. 흐흐. 질문은 익숙한 내용들뿐이다. 동성의 어떤 점이 끌리냐, 성전환도 생각해 봤냐, 게이는 왜 다 여성스럽냐, 동성애에도 남녀 역할이 있냐, 등등. (사실 좀 더 큰 게 있는데 이건 차마 여기에 못 쓰겠다. ;;; 흐흐.)

특강을 청탁하신 분은 내게 미안해하며 특강 관두고 싶으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했다. 수강생들이 먼저 퀴어 주제를 요구했으니 꽤나 ‘괜찮은’ 질문들이 나올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으니까. (청탁하신 분과도 나눈 얘기지만, 어느 정도 ‘괜찮다’*고 여기는 질문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이 강좌의 맥락에서, 질문을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근데 난 재밌었다. 좀 웃기기도 했고. 내가 원래 이런 질문을 좋아해서 그럴 수도 있고. 흐흐.

무엇보다 난 질문지에 나오는 질문들이 괜찮은 내용이라고 판단한다. 천박한 질문이 가장 좋은 질문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위에서 언급한 질문들이 사실은 정말 많은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이 정도는 기본적으로 알아야지.’라는 ‘상식’이 사실은 질문과 소통을 가로 막으니까. 나 자신부터 ‘이런 질문을 하면 무식하다고 찍히는 거 아닐까’ 싶어서 못 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그래서 특강 가서 질의응답 시간에 가장 먼저 하는 말은, “천박한 질문이 가장 좋은 질문이고, 정치적으로 올바른 질문은 없으며, 어떤 질문이 상처가 될지 안 될지는 말을 꺼내기 전까진 알 수 없으니, 일단 하고 싶은 질문은 다 하세요.”다. 그 질문이 아무리 심각한 혐오발화라고 해도, 그런 말을 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의 맥락을 분석하는 거고.

LGBT 인권운동**을 한지 15년 정도 지났고, 잘은 모르지만 퀴어란 용어가 한국사회에서 유통되기 시작한 게 10년 정도다. 그리고 지금 “동성의 어떤 점이 끌리느냐”란 질문을 하기 시작하고 퀴어를 별도의 특강 주제로 요구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성과가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는 거겠죠?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비슷한 질문이 나온다 해도, 그 안에서 조금씩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거겠죠. 그 오랜 시간을 꾸준히 운동해 온 활동가들, 정말 멋져요! 앞으로도 화이팅!


이리하여, 이 글의 주제는 … 없다. 이젠, 새삼스럽지도 않다는 말이 무색하다… ㅡ_ㅡ;; 이젠 주제 없는 나의 글에 내가 뻔뻔해질 필요가 있다. “저 원래 이런 인간이잖아요.”라고 되레 큰소리치면서. 흐흐. ;;;

*예전에 영화 [3×FTM] 상영활동 중, 감독과의 대화를 진행할 때였다. 어떤 분이 “영화 상영을 진행할수록 커밍아웃과 아웃팅 문제가 발생할 텐데 이 부분은 어떻게 고민하고 있나요?”란 질문을 했다. 어떤 분은 “ftm과 여성 간의 연대를 어떤 식으로 모색하면 좋을까요?”란 질문을 했다. 사실 이런 질문은 처음이라 깜짝 놀랐고, 살짝 감동적이었지만 이런 질문이 나오는 경우는 드물다.

**난 “동성애 인권운동”이 아니라 “LGBT 인권운동”이라고 썼다. 당시의 운동이, 단체 이름엔 동성애만 표방했다고 해도 그 내부에선 레즈비언, 게이, 바이, 트랜스젠더가 함께 있었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단체 이름에 “동성애”만 사용하고 있었다고 해서 그 단체에 레즈비언이나 게이만 있었던 건 아니라고 알고 있다. 그렇다면 당시의 “동성애”는 변태♡를 포괄하는 용어였을 가능성이 있다. 아직은 잘 모르겠다. 단지 단편적으로 아는 것을 조합해서 혼자 추측하는 것일 뿐. 언젠가 인터뷰도 하고 여러 자료를 모아서, 역사 (다시)쓰기를 해도 재밌겠다. 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