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이곳에 쓴 글을 읽었다. 부끄러웠다. 문장도 엉성하고 비문도 많고. 어쩌자고 공개했나 싶었다. 예전 글을 모두 비공개로 돌릴까 했다. 하지만 그 글들도 모두 나의 역사고 모습이다. 숨기고 싶을수록 드러내는 게 좋다는 지론에 따라 그냥 뒀다.

문장을 읽으면 그 사람이 보인다는 말, 잔혹한 진실이다. 적어도 내겐 잔혹하다. 나의 천박함, 아는 체 하고 싶고 잘난 척 하고 싶어서 안달하는 모습이 단어와 단어 사이, 문장과 문장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글을 읽는데 단어와 문장 사이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내가 부끄럽다. 문장은 거울이다. 내가 만드는 거울이고, 내가 드러나는 거울이고, 속일 수가 없는 거울이다. 특정 시기의 자신이 궁금하면 그 시기에 쓴 글을 읽으면 되리라. 결국, 예전 일기장과 글을 쓴 공책을 모두 버린 건 잘한 일? 흐흐. -_-;;

지금 쓰고 있는 글, 어제 1차로 넘긴 글도 걱정이다. 몇 주 지나 다시 읽으면 얼마나 부끄러울까. 글을 쓸 때면 어떻게든 폼을 잡고 싶어 하는 나를 만난다. 본업에 충실하지 않고 다른 일에 집착하는 모습이다.

애도

장례식장에 몇 번인가 참가하며 깨달은 건, 죽음도 자본주의사회에선 상품이란 점이다. 죽음을 진행하는 모든 과정에서 돈이 오고간다. 그렇다고 과거의 죽음 의례를 낭만적으로 평가하려는 건 아니다. 과거엔 관의 재질과 무덤 주변을 꾸미는 정도로 계급을 과시했고, 지금은 화장 가루를 담는 도자기의 수준으로 계급을 과시하니까. 커다란 장식 꽃의 개수로도 죽음을 평가하고.

최근엔 회사의 부흥을 위해 죽음을 소비하는 장면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기사를 써라, 그럼 트래픽 초과로 회사 가치가 올라갈 것이니” 라고. 분노를 어찌할 수 없는 이 상황에서 나는 어떤 사람을 애도한다.

[소년은 울지 않는다 Boys Don’t Cry]란 영화로도 유명한 브랜든 티나/티나 브랜든의 죽음은, 트랜스젠더 운동에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영화의 주인공이 트랜스젠더라고 주장하려는 건 아니다. 그저 그 사람의 죽음이 트랜스젠더 운동에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걸 말하고 싶을 뿐이다. 그의 죽음은, 이후 트랜스젠더들이 혐오 폭력으로 죽을 때마다 트랜스젠더 활동가들이 모여 항의집회를 여는 계기를 만들었다. 인터넷이 활성화되자 혐오폭력으로 죽은 이들이 몇 명인지를 알려주는 사이트도 생겼다. 하지만 영화의 주인공이기도 했던 그가 그토록 파급력을 지닐 수 있었던 것은 백인이었다는 점을 무시할 수 없다. 그 전에도 많은 트랜스젠더/트랜스섹슈얼들이 혐오폭력으로 추정되는 사건으로 죽었으니까. 죽음을 애도하는 과정에도 인종, 계급 등이 개입한다. 그러니 죽음을 애도하는 건 정치적인 행위다.

“여장남자”로 방송에서 유명해졌다 하고, “성전환수술”을 해서 다시 한 번 유명해진 장채원씨의 죽음을 이제야 들었다. 상품성의 여부로 죽음을 대하는 사회에서 모든 죽음은 동등하지 않다. 포털 메인은커녕 주요기사에서도 접할 수 없었던 그 사람의 죽음 소식에 슬픔과 씁쓸함을 동시에 느꼈다. 내가 전혀 모르는 사람. “성전환수술”을 했다는 이유로 떠들썩할 때야 비로소 이런 사람도 있구나를 알았을 뿐 사람. 그 후론 잊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냥 넘길 수가 없다. 이 사람의, 아마도 마지막일 소식을 그냥 넘길 수가 없다.

슬픔이 만조인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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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여기도
기사 제목과 내용은 언론의 태도가 조금도 변하지 않았음을 알려준다. 이젠 화도 안 날 정도다.

어떤 깨달음

예전에 읽은 글 중 몇 편을 다시 검토할 필요가 있었다. 글을 읽으면서 재밌는 사실을 깨달았다. 예전에 너무 어렵게 읽어서 다시 읽기 전부터 엄청 긴장한 글은 너무 쉬웠다. 예전에 너무 재밌고 쉽게 읽었다고 기억하는 글은 너무 어려웠다. 예전엔 술술 읽은 글인데도 한 문장을 읽기가 버겁다. 예전엔 모르는 건 그냥 무시했나, 싶을 정도다.

몇 달 전, 한 석 달 정도 ㅎ이론을 집중해서 읽었다(여기서 ㅎ이론이 뭔지는 중요하지 않다ㅠ_ㅠ). 난 ㅎ이론이 중요하며 꼭 필요하다고 판단했기에 집중해서 읽었다. (석 달 동안만 읽은 건 아니고 그 전부터 조금씩 읽었지만 꾸준히 읽지 않아서 문제였다.) 석 달 정도 읽고 나서 내린 판단. 지금 당장은 이것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 나중에 좀 더 차근차근 읽어야겠다는 것. 간단하게 말해서 바쁜 시간 중에서 석 달을 당장 필요하지 않은 일에 사용했다.

하지만 그 석 달 동안 ㅎ이론을 읽지 않았다면 난 아직도 미련을 못 버렸을 거다. ㅎ를 읽어야 하는데, ㅎ를 읽어야 하는데, 하면서. 흐흐. 확실하게 미련을 버릴 수 있는 기회였다는 점에서 무의미한 시간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그 석 달은 여태껏 내가 모르던 걸 깨닫는 기회였다. 내가 좋아하는 이론가들 대부분은 ㄷ과 ㅎ의 접점을 모색하고 있거나 ㄷ과 ㅎ을 분리하는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연결하고 있었다.

예전엔 무심하게 읽고 넘긴 단어들에 상당한 배경과 역사가 있다는 걸 깨닫기도 했다. 일테면 구성을 뜻하는 construction과 형성을 뜻하는 constitution은 의미하는 바가 전혀 다르다. 물론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른지는 아직 잘 모른다. 아니, 잘 모르는 게 아니라 전혀 모른다. 그저 지금은 이 두 단어를 사용할 때 저자가 의도하는 배경과 의미가 다를 수 있다는 걸 깨달은 정도다. 예전엔 왜 앞의 단어를 안 쓰고 뒤의 단어를 쓸까, 궁금하기만 했다. 지금은 이 두 단어의 의미가 다르니 유의할 필요가 있다는 것 정도만 알고 있다. 현재로선 이 정도지만, 이것만이라도 상당한 수확이다. 나의 밑천이 얼마나 빈약한지 깨닫는 것 만한 공부가 또 어딨으랴. 🙂

헛되이 보내는 시간은 없다. 그러니 잘못 들어선 길도 없다. 하다가 아니다 싶으면 그때 방향을 바꿔도 늦지 않다. 어쨌든 그 길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잖아. 이것마저 몰라서 미련을 가지는 것보다는, 뭉그적거리지 말고 아무거나 하다보면 뭔가 보이니까. 실수하지 않고 어떻게 배움을 얻겠어.

…이상 명상의 시간이었습니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