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큘라』 : 드라큘라가 영국에서 하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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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흥미로운 텍스트는 참 오랜 만이다. 『드라큘라』 얘기다. 만약 내가 이 책으로 수업을 할 수 있다면, 한 달 동안 이 책을 분석하면서 다양한 이야기를 할 거 같다. 젠더 역할, 섹슈얼리티, 식민주의, 기독교와 근대 과학, 사실과 허구의 관계, 일기와 ‘경험’ 등등. 물론 나는 이런 주제들로 수업을 진행할 능력이 안 된다. 『드라큘라』라는 책이 가진 풍부한 내용이 이런 다양한 주제로 얘기할 거리를 제공한다는 의미일 뿐.

02
한동안 나는 ‘이 책이 기독교 선교문학인가?’ 했다. 이국의 관습을 (부정적인 의미의)미신으로 치부하고, 기독교로 타파하는 이 책의 내용은 유럽의 제국주의가 기독교를 앞세웠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이 책을 읽는 초기엔 잠시 헷갈렸다. 『드라큘라』가 나온 19세기 후반이면, 세상을 판단하고 해석하는 기준이 신에게서 인간 이성으로 이동했던 시기다. 19세기 초에 나온 『프랑켄슈타인』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고자 하는, 인간으로서 신이 되거나 신과 동격이고자 하는 욕망을 드러낸다. 근대는 비합리적인 종교와 합리적인 과학이란 이분법의 세계이기도 했다. 그러니 스스로를 합리적인 이성으로 자부하는 『드라큘라』의 등장인물들이 기독교의 전통에 따라 드라큘라를 퇴치하는 행동에 잠시 당황했다.

난 망각하고 있었다. 서구가 비서구 지역을 침략하고 식민지로 만들 때, 비서구 지역에 가장 먼저 들어가고 식민지 지배를 정당하게 만드는데 가장 큰 역할을 했던 것이 기독교 선교였다는 것을. 기독교 혹은 서구의 어떤 종교와 서구의 과학은 대립관계가 아니다. 적어도 비서구 지역에서 기독교는 서구의 과학과 ‘진보,’ ‘문명’을 상징한다. 『드라큘라』는 기독교와 과학이, 이국의 문화를 폄하할 때 얼마나 잘 영합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텍스트다.

03.
난 드라큘라가 성적 욕망을 상징한다고 느꼈다. 흡혈 욕망은 또한 성적 욕망이다. 이 소설에서 이 둘은 거의 동의어다. 근데 이런 논의는 이미 너무도 많이 진행되고 있다더라. 책 말미에 옮긴이의 설명이 있는데, 읽지는 않았지만 몇 장에 걸쳐 설명하고 있는 걸 보면서 흡혈 욕망과 성적 욕망의 관계를 얘기할 의욕을 잃어버렸다. 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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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을 읽었을 때, 내가 가장 좋아한 부분은, 샤무니 언덕에서 괴물/창조물이 그를 창조한 프랑켄슈타인에게 자신의 얘기를 하는 부분이다. 괴물/창조물이 프랑켄슈타인을 다시 만나기까지 겪었던 얘기를 하는 부분, “주변을 둘러봐도 나와 같은 존재는 보지도 듣지도 못했소. 그렇다면 나는, 보기만 해도 모든 인간이 달아나고 외면하는 이 세상의 오점, 괴물이란 말인가”와 같은 말을 하는 부분이다. 물론 이 모든 말은 프랑켄슈타인의 기록을 통해 전해진다는 점에서 괴물의 말은 또한 프랑켄슈타인의 해석이다. 그럼에도 괴물의 말은 텍스트의 한 가운데 위치하고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반면 『드라큘라』에서 드라큘라의 말은 극히 적다. 초반에 조금 나올 뿐이다. 『프랑켄슈타인』처럼 다른 화자들의 해석을 거친다는 점은 말할 것도 없고. 『드라큘라』를 계속해서 읽어나가며 뭔지 모를 갑갑함을 느꼈던 것도 이 때문임을 뒤늦게 깨달았다. 나는 드라큘라의 말을 듣고 싶었지만, 『드라큘라』에서 드라큘라의 말은 없다.

04-2
어느 강의에서 들은 내용. 미국에서 인종차별은 노골적으로 이루어지기 보다는 은근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고 했다. 백인이 아닌 것으로 여겨지는 사람이 강당에서 발표를 하면, 아무리 영어를 잘해도, 미국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의 영어라 해도, 백인 청중들은 못 알아듣겠다는 식으로 반응한다고.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나는 이와 유사한 경험을 했다. 서울에 온 초기에 난 부산사투리를 쓰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적어도 미디어가 전시하는 비서울지역 사투리는 낯섦, 이질감, 코미디/웃음거리, ‘촌스러움’을 상징했다. 실제 서울사투리가 아닌 억양은 언제나 낯설고 이질적인 분위기를 만들었다. 종종 ‘못 알아듣겠다.’는 반응도 들은 적 있다. (나의 발음이 부정확하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긴 하다. 흐흐.)

이런 나의 경험을 일반적인 것으로 설명할 순 없다. 다만 ‘다른 억양,’ ‘다른 언어'(일례로, 부추와 전구지처럼)는 그러한 억양과 언어를 사용하는 이를 이방인으로 만드는 경향은 있다. 그래서일까? 드라큘라가 여러 화자 중 한 명인 조너선 하커와 얘기를 나누는 자리에서, 영국식 영어를 완벽하게 구사하고 싶다고, 영국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어, 외국인이잖아!”란 반응을 듣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부분이 너무 와 닿았다. 이 부분은 내가 이 책에서 처음으로 밑줄을 그은 부분이기도 하다.

드라큘라의 목소리를 전해주는 부분은 이 책에서 크게 두 곳 정도다. 첫 번째는 드라큘라가 고향에 있을 때다. 조너선 하커는 드라큘라의 고향에서 드라큘라와 만나는데, 이 공간에서 드라큘라는 자신의 얘기를 참 많이 한다. 이렇게 많은 얘기를 하는 드라큘라가 영국으로 간 순간부터는, 더 정확하게는 작품의 배경이 영국으로 바뀐 순간부터는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영국에서 드라큘라는 실체가 없다. 그저 부연 안개처럼 어렴풋이 존재할 뿐이다. 그의 존재와 모든 행동은 묘사될 뿐이다. 그는 자신의 고민을, 자신의 행동을 직접 말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 한다.

그의 말은 책 후반부에 다시 한 번 등장한다. 하지만 그의 말은 그의 입을 통해서 등장하지 않는다. 미나 하커의 입을 매개한다. 그것도 드라큘라가 미나 하커의 피를 빤 이후, 드라큘라가 미나 하커를 자신의 동반자이자 조력자로 정한 이후부터다. 미나 하커가 드라큘라와 유사한 종족으로 변한 이후부터, 미나 하커는 드라큘라의 말을 전할 수 있다. 미나 하커는 드라큘라와 유사 종족이면서 영국인이기도 하단 점에서, 결국 드라큘라는 이국의 땅에서 결코 자신의 언어를 직접 발화할 수 없다.

나는 이런 모습들을 읽으며 드라큘라를 이주민, 이방인의 모습으로 이해했다. 아무리 능숙하게 그 나라의 언어를 구사해도 결국 외국인이라 어색하거나 대단할 뿐이란 반응을 접할 수밖에 없는 존재. 그래서인지도 모른다. 드라큘라가 자신의 고향에서 영국으로, 영국에서 고향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도움을 받는 존재들은 각 지역에서 가장 비천한 존재들이다. 지역 사회에서 가장 반감을 많이 사는 존재들, 혹은 하층 일용직 노동자들만이 드라큘라를 돕거나 그에게 고용된다. 드라큘라를 추적하는 이들이 의사나 변호사, 귀족과 같은 상류층임은 말할 것도 없고.

어쩌면 이런 상황, 이방인은 이국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상황이 드라큘라가 영국에서 하는 말인지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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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1818/1831)-『드라큘라』(1897)-『투명인간』(1897)의 연결고리를 찾는 작업도 재밌을 듯. 흐흐.

간통제, 가족, 그리고 사랑: 여이연 강좌

요즘 여이연(www.gofeminist.org)에서 “시대난독”이란 겨울강좌를 듣고 있어요. 여이연으로선 이번에 처음으로 무료 강좌를 개설했네요. 전 부담 없이(?) 신청했어요. 금전 부담은 없지만 내용까지 부담이 없는 건 아니지요. “간통죄,” “종부세,” “군가산점제”와 같은 이슈로 강좌를 진행하는데, 지난 이틀간은 재밌었어요. 무엇보다도 어제는 “간통제”를 가족제도, 사랑과 같은 주제와 연결해서 임옥희 선생님이 진행했는데 상당히 즐거웠어요.
(전체 일정은 여기로)

일테면 현재 이성애-규범적인 가족제도 속에서 간통죄는 사랑을 확인하는 방식이기도 하다고 선생님은 지적했지요. 고개를 주억거릴 수밖에요. ‘불륜’을 저지른 상대방에게 “결혼관계를 유지할래, 간통죄로 이혼할래?”라고 물었을 때, 구속을 살더라도 이혼하겠다는 의사표현은 ‘진짜로 사랑’하고 있음을 역설하죠. 이런 의미에서 간통죄는 사랑의 감정을 확인하는 방법이기도 해요. 흐흐.

다른 한 편, 간통죄가 ‘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법안이라는 논리는 상당히 취약하죠. ‘어떤 여성’을 보호하는지를 묻지 않거든요. 간통죄가 성립하기 위해선 이성애관계여야 하는데, 간통죄는 ‘아내’는 보호할지언정 ‘남편’의 애인(그 사람이 비혼 ‘여성’이건 미혼 ‘여성’이건 ‘유부녀’이건 간에)은 보호하지 않지요. 보호하지 않을뿐더러 가장 취약한 상태로 내몰기도 해요. 간통죄를 통해 더 많은 위자료를 받아낼 수 있다지만, 이건 위자료를 줄 수 있는 계급일 때에나 가능하고요. 간통죄를 존치해야 한다, 폐지해야 한다는 논의를 하기 전에 찬반 논쟁이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를 고민해야겠죠.

하지만 어제 제가 꽃힌 말은 따로 있어요.
“사랑만큼 허약한 토대도 없잖아요.”라는 선생님의 말이었죠. 언제 깨어질지, 상대방이 언제 나를 떠날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계가 유지될 거라고 믿어야 하는 상태. 전 이 말이 너무너무 좋았어요. 조금 바꿔서 말한다면, 사랑은 위치도 없고 토대도 없는 공간 같아요. 막연히 있다고 믿어야만 유지할 수 있는. 매순간 전전긍긍하는 상태. 가장 불안정한 상태. 이 불안정한 상태를 안정적으로 묶어내는 방법 중 하나가, 제도로 편입하는 결혼이겠죠. 결혼은 사랑을 잃고 의무와 권리를 획득하는 방법이랄까요.

아니, 아니. 이런저런 부연 설명은 다 불필요하고. 전 그냥 ‘사랑은 가장 허약한 토대’란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어요. 저의 맥락에선, 사랑이란 말 대신 관계란 말을 대입하면 더 좋고요. 🙂

그나저나, 강의를 듣던 와중에 온다 리쿠의 소설에 나오는 구절이 하나 떠올랐죠. 정확한 건 아니지만 대충 기억나는 대로 정리하면, 우리는 상대방이 내게 보이는 호감은 금방 눈치 채지만 상대방이 나를 좋아하는 경우엔 눈치를 못 챈다고. 읽으며 고개를 주억거렸죠. 그런 거 같아요.

수도관이 얼었지만

어제 밤, 玄牝에 돌아가 씻으려고 수도밸브를 돌렸다. 찬물은 잘 나왔다. 밤엔 찬 물로 씻으니 그러려니 하며 온수로 수도밸브를 돌렸다…. 이런! 물이 안 나왔다. 수도관이 얼었다. 이런, 이런.

수도관이 언 것이 몇 년 만의 일이냐. 예전에 살던 방은 겨울이면 수시로 수도관이 얼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일 수 있는 건, 동파로 파손되진 않았단 것. 하지만 조금만 추워도 수도관이 얼었다. 그땐 찬물조차 안 나왔다. 그러길 몇 번 반복하자, 난 수도관이 어는 걸 막아준다는 기구를 샀었다. 별 효과가 없었던 거 같기도 하고, 효과가 있었던 거 같기도 하고. 긴가민가하네. 하지만 현재 사는 곳에서 수도관이 언 건, 이번이 처음이다. 아무리 추워도 수도관이 얼어서 물이 안 나온 적이 없다.

수도관만 언 것이 아니었다. 방은 얼음장이었다. 하얀 입김이 선명하게 보였다. 흐흐. 사실 난 아직까지 난방용 보일러를 안 틀고 살았다. 온수는 매일 사용하지만 보일러로 난방을 할 엄두가 안 나서 그냥 냉방에서 살았다. 전기장판이 있었기에 가능하다. 조금 따뜻한 방에서 살고자 난방용 보일러를 틀면, 기름값이 일주일에서 열흘 치 생활비 정도로 나왔다. 몇 년을 이러다가 결국 올 겨울엔 따뜻한 방을 포기했다. 어차피 아침 7시엔 玄牝에서 나오고, 밤 10시가 넘어서야 玄牝에 돌아가니 큰 문제는 없었다. (자치방이 아니라 잠만 자는 방? 흐흐) 근데 이런 상황이, 수도관을 얼게 한 것 같았다. 별 수 있나? 보일러를 틀어 난방을 해야지. 아울러 수도밸브를 조금 열어뒀다. 그래야 얼지 않을 뿐 아니라, 언 수도관을 녹일 수 있으니까.

다행히 얼었던 수도관은 녹았고, 아침에 사용하는데 지장 없었다. 하지만 라디오에서 수도관 동파 사고가 많다는 소식이 남일 같지 않았다. 흐흐.

+
쓰기 전엔 웃겼는데, 쓰고 나서 다시 읽으니 지지리 궁상이다. 푸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