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에서 살아가기

얼마 전에 야후에서 용량 무제한의 ymail.com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메일 주소에 가입하고 싶은 바람이 상당했지만 관뒀다. 몇 번 사용하다가 방치할 게 뻔하다. 최고 5기가 용량을 제공하는 파란메일을 사용하다가 관뒀다. 물론 파란메일은 애초 부가적인 용도였지만. 네이버메일은 4개 모두 방치 중이다. 그 중 두 개는 카페 이용을 위해 사용하지만 다른 두 개는 용도가 없다. 내가 좋아하는 단어나 어떤 구절로 메일을 만들고 싶어 만들었을 뿐이다. 딱히 필요해서 만든 건 아니다. 대용량은 파이어폭스를 지원하는 엠파스의 엠팔을 쓰고 있다.

지금 주로 사용하고 있는 건 구글의 지메일gmail.com이다. 몇 개의 아이디로 사용하고 있는데 각각의 용도가 있다. 더 이상 USB를 신뢰할 수 없어 각종 자료만 모아두는 아이디, 메일의 용도로 사용하는 아이디, 후치가 아닌 다른 컴퓨터에서 로그인해야 할 때 사용하는 아이디 등등.

그나마 요즘은 메일을 어느 하나에 정착하는 느낌이다. 예전 같으면 수시로 메일사이트와 아이디를 바꿨다. 몇 사람에게 메일 주소를 알려 주곤, 새로운 아이디로 만들고 싶어서 기존의 메일을 없애는 행동을 반복했다. 그러다보니 스팸을 받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그런 만큼 이전의 아이디로 받는 메일들도 모두 잃어버렸다. 어떤 경우, 메일 제공 회사가 유료로 전환하는 바람에 포기해야 했다. 이런 경우, 어딘가 메일을 저장했다고 기억하는데, 찾을 수가 없다.

구글에서 제공하는 각종 무료 서비스 중에, 구글 독스(닥스? Docs)와 구글 기어스를 사용해볼까 고민 중이다. 근데 선뜻 결정하기가 어렵다. 어느 날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비용으로 유료전환을 하면 어쩌지? 구글은 그럴 리 없다고 믿고 싶지만, 구글이라고 믿어야 할 이유는 없다. (웹을 사용하는 습관은 수집하려 하지만 공부상의 정보-주민등록번호 같은 거-는 요구하지 않는 곳과 공부상의 정보를 제시하지 않으면 사용이 불가능한 곳, 굳이 믿어야 한다면 어디를 믿어야 할까? 나의 소소한 웹 사용 습관 중 하나는, 웹 브라우저를 닫으면 사용기록을 모두 삭제하는 것.) 주로 사용하던 메일의 제공업체가 유료로 전환해서 더 이상 사용할 수 없었던 경험은, 이 순간 선뜻 결정할 수 없게 한다. 지금 runtoruin 메일은 언제까지 안전할까? 구글은 10년 아니, 20년 뒤에도 여전히 구글일까? 지금도 계속해서 용량이 늘어나고 있는 구글은 어느 정도의 용량을 제공할까? 그리고 이미 800메가가 넘은 나의 메일 사용량은, 결국 몇 기가에 육박할 텐데, 어느 순간 유료로 전환하면 나는 꼼짝 못 하지 않을까? 그래서 한 땐, 메일도 나의 계정으로 만들고 싶었다. 뭔가 복잡해서 관뒀지만.

이럴 때마다 코카콜라의 전략이 떠오른다. 처음엔 무상 제공해서 사람들이 공짜로 마시게 하고선, 입맛이 길들어 이젠 코카콜라가 아니면 안 되는 순간 유료로 전환한다는.

다른 한 편, 이런 체계로 기록을 남길 경우, 웹에 접근할 최신 도구는 필수다. 한때 플로피 디스크에 저장한 자료들은 이제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자료와 같다. CD에 저장하면 반영구적이라지만, 이젠 CD도 점차 DVD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추세다. 몇 년이 지나면 CD에 저장한 자료를 사용할 수 없는 시대가 오겠지. USB라고 다르겠는가. 어디 여행을 갔다가 중요한 메모를 확인해야 하는데 컴퓨터가 없어서 확인 못 한 일은 다들 한 번 정도 있겠지. 기계가 발달할수록, 기술이 발달할수록 과거와 단절되어 간다. 뭐, 이건 호환불가의 기술독점이 빚어낸 일일 수도 있겠지만.

만약 전쟁이라도 나서 세상의 모든 서버가 파괴된다면 이제까지의 모든 기록은 사라지겠지. 종이에 기록한 문서는 개별보관이라 그나마 누군가의 기록은 남겠지만, 특정 서버에 일괄 저장한 자료들은 한 번에 사라지겠지. 이건 일전에 USB에 저장한 파일이 모두 날아가면서 생긴 불안이기도 하다. 결국 인쇄한 자료만 남아있다. 파일로 가지고 있는 자료는 나의 자료도 아니고 내가 소유하고 있는 자료도 아니다.

뜬금없이 글이 염세적으로 흐르고 있어서 당황-_-;;
구글에서 200년도 더 된 신문기사를 데이터로 바꿔서 무료(!!!)로 제공할 예정이란 기사를 읽으며 기뻐하다가 자료 보관과 호환에 관한 고민으로 빠졌다. 최근 또 한 번 1,000만 명이 넘는 개인의 정보가 유출된 일도 떠오르고. 웹이 내가 살아가는 또 하나의 환경이자 세상이라 관련 기사나 글을 종종 읽곤 한다. 조금이라도 알아야지 않겠나 싶어서. 웹 세상이나 오프라인 세상이나 어느 하나 만만치가 않다. 그래도 재밌긴 재밌다. 흐.

흥미로운 해석들

고민이 많으면 쓸 거리도 많지요. 이번 인권감수성교육 프로그램이 그래요. 참 하고 싶은 말이 많아요. 여러 고민거리를 안겨주고, 자극을 주고 있다는 의미겠죠. 지금까지 내가 안주하고 있던 틀을 다시 생각하도록 요구하고 있다는 의미기도 해요.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하는지 다 쓸 수는 없지만, 대충 쓰면요. 규범적이지 않은 몸과 성역할과 관련한 내용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요. 아울러 개인과 구조적인 틀을 연결하는 방식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요. 목표는, 비단 이 수업에서 다루지 않는 내용도 스스로 고민할 수 있는 방법을 기르는데 있어요. 목표는 그렇다고요. ㅠ_ㅠ

“남자인 몸”, “여자인 몸” 그리고 이런 몸에 수반하는 역할들을 어릴 때부터 배우죠. 이번 프로그램 중엔, 이런 역할이 배움이라는 것, 자연스럽지 않다는 걸 얘기해요. 주입하기보다는 자신이 어떤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에서 출발하지요. 뭐, 쓰고 보니 새로울 것 없네요. ㅠ_ㅠ

방법은, 사진이라는 진부한 도구를 사용해요. 단지 어떤 사진을 사용하느냐가 관건이겠죠.

자, 아래 사진을 보세요.

만약 지나가는 길에 이렇게 생긴 사람을 만났어요. 만약 당신은 이 사람이 “여자”인지 “남자”인지 궁금하다면 무엇으로 판단할 것 같아요?

이 사진은 두 번째 날 사용했는데, 첫 날 이것과 비슷한 사진을 보여주자 다들 “남자야, 여자야?”라는 말을 가장 먼저 하는 걸 듣고 상당히 놀랐어요. 사람을 판단하는 첫 번째 기준은 성별인가요? 성별을 알면 도대체 그 사람의 무엇을 알 수 있다고 믿는 걸까요? 아무려나, 이 사진을 보여주며 수강생들에게 물었어요. (참, 이 수업은 제가 진행하지 않았어요.) “이 여자일까요, 남자일까요?”를 묻고 왜 그렇게 판단했는지 질문했죠. 물론 답은 없어요.

재밌는 건, “여자”와 “남자”란 판단이 거의 반반이었어요. 그리고 그 근거는 근육이었어요. “남자”인 이유도, “여자”인 이유도 근육이라고 하더라고요. 아울러 어느 순간부턴 중성으로 수렴하는 경향도 있더라고요. “여자”도 “남자”도 아닌 “중성”-_-;;

그럼 아래 사진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할머니가 남자 코스프레를 하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저로선 결코 하지 못 할 상상력이라 감탄했어요. 저와는 꽤나 다른 방식으로 “여성성/여성다움”, “남성성/남성다움”을 배우고 있다는 의미기도 하겠죠. 🙂

교육, 강사와 수강생, 권력

01
일테면 여이연에서 했던 강의를 떠올려 봐. 나는 어쨌거나 강사로서의 위치를 점해. 그 강좌가 비록 서로의 앎을 나누는 자리라고 해도, 기본적으론 강사로서의 위치야. 그 누군가는 강사로서의 나의 위치를 기대하고 올 테고. 나는 그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야 해. 그리고 수업을 신청한 사람들은 수강생으로서의 위치를 점해. 그리하여 서로의 역할에 대체로 충실해. 내용이 재밌건 재미없건 강사와 수강생의 역할에 대체로 충실하기 마련. 나는 얘기를 할 준비가 되어 있고, 수강생은 얘기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내가 하는 얘기가 재미없고 완전 헛소리만 해도, 그 시간 동안 듣는 척은 해. 지루한 표정에 몸을 꼴 때도 자리에 앉아 있긴 해. 갑자기 자기 혼자 소리를 지르거나 하진 않지. 혹은 여이연 강좌와 같은 자리가 아니라면, 그냥 가방을 챙겨 나가면 그만. 난 이런 강의에 무척 익숙해. 내가 수업에 참여하는 방식도 대체로 이래. 종종 강사의 얘기에 나의 의견을 제시하기도 하지만, 일단 들을 준비는 하고 있어.

‘그래, 한 번 얘기해봐. 들어 줄 테니. 얼마나 잘 하는지 한 번 보자.’라는 태도라도 상관없어. 강사와 수강생 사이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권력관계야. (권력관계가 곧 위계관계는 아니고.) 강사는 지금까지의 제도권 교육을 통해 체화하고 있는 방식으로 자신에게 수업을 진행할 권력이 있음을 알지. 수강생 역시 몸에 밴 방식이 있기에 강사에게 권력을 부여해. 강사와 수강생의 권력관계는 강사에게 일방적으로 있지 않아. 서로가 서로에게 권력을 부여해주는 방식이지. 수강생은 일단, 자신의 시간을 통제할 권력을 강사에게 부여하고 강사는 자신에게 그런 권력이 부여되어 있음을 알아. 강사는 수강생들이 어쨌거나 자신의 얘기를 들을 준비를 할 거란 걸 믿고 있어. 수강생은 강사가 어쨌거나 수업이나 강좌를 위해 준비한 얘기를 할 거란 걸 믿고 있어. 그리하여 자신의 믿음에 부합할 정도의 지적 쾌락을 줄 거란 걸 믿고, 이런 믿음으로 그 자리에 참석해. 강사와 수강생, 선생과 학생 사이의 권력관계는 상호협력일 때만 가능해.

이런 상호협력은 각자의 위치가 어떤 의미인지를 서로 공유하고 있다는 뜻이야. 그리고 주변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아야 한다는 명목으로 권력을 용인해. 나는 이제까지 이런 권력 관계에 익숙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강의만 들었지. 때로 자신들이 편안한 자세로 수업을 듣는다고 해도, 이런 권력관계는 유지하는 형태였지. 하지만 수강생이 강사의 권력과 의미를 무시한다면? 혹은 수강생-강사의 위치가 지니는 의미를 동일한 방식으로 공유하지 않는다면?

강사의 권력행사, 통제, 그리고 규제에만 익숙한 수업 공간이 아닐 때, 내가 얼마나 당황하는지 깨달았어. 모든 권력은 개인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야. 의미를 동일한 방식 혹은 상당히 유사한 방식으로 공유할 때에만 권력이 발생해. 내가 얼마나 권력통제에 익숙한지, 의미를 공유하는 집단에 익숙한지 깨닫지 않을 수 없었어.

더 쉽게 말하면 나는 그곳에 갈 때, 나를 강사의 위치로 설정하고 준비했다는 뜻이야. 그래서는 안 되었는데. 성”교육”이고, 프로젝트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강사란 용어를 쓰다 보니, 별다른 고민 없이 내가 “강사”라고 믿었어. 오, 이런 바보 같은!

02
요즘 초등학교 4, 5, 6학년을 대상으로 하는 성-인권-감수성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어. 프로젝트는 지난 5월인가, 암튼 여러 달 전에 시작했지. 원래는 6월에 끝나는 걸로 알고 시작했어. (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중간에 참여했어.) 근데 여차하니 시범교육을 하기 직전에야 끝나네. 애초 계획에 따르면 시범교육은 7월이나 8월에 시작할 예정이었고. 생각보다 준비 과정에서 할 얘기가 많았고, 준비는 너무 어려웠고. 일정은 계속 늦추어지고. 결국 이번 주 화요일부터 어느 공부방에서 시범교육을 시작했어. 총 10시간에 걸쳐 이루어지는데, 난 그 중 3시간을 담당했지.

오, 이런. 난 초등학생을 너무 과소평가했거나 과대평가했어. 모든 걸 과소평가하는 동시에 과대평가했어. 나의 환상에선 다들 강사가 얘기할 땐 그래도 집중할 줄 알았어(뒤늦게 이런 환상이 있음을 깨달았지). 그리고 질문에 대체로 적절한 답을 할 줄 알았어. 착각했지, 뭐야. 이건 뭐, 탁상행정으로 정책을 펴는 것과 같은 감각이지. 그리고 초등학생이 어느 정도 인권과 관련해서 알고 있는지 감을 못 잡았어. 근데, 6학년을 기준으로 하면 어지간한 내용은 한 번 이상은 들어 봤다는 거지. 그리고 강사가 원하는 대답이 뭔지 너무 잘 안다는 거야. 4학년도 별로 다르진 않았어. 어떤 이는 너무도 영민하게 답했어. 맞아. 예전에 쓴 적 있는데, 초등학생은 내게 미지의 세계였어. 그래서 난 학년 별로 다르다는 걸 전혀 예상 못 했지. 마치 타자를 동일한 집단으로 대하는 것처럼. 트랜스젠더라면 단 하나의, 이견이 있을 수 없는 이익과 의견으로 환원하려는 이들의 태도처럼. 트랜스젠더 개개인의 복잡한 욕망을 얘기하면 “그래서 너희들이 원하는 게 도대체 뭐야?”라고 반응하는 이의 자세처럼.

물론 가장 당혹스러운 순간은, 왕따 동영상을 보고 난 뒤, “재밌어요. 기분 좋아요.”와 같은 대답이었지. 정말 재밌거나 기분이 좋다는 의미가 아냐. 그렇게 대답한 자신이 왕따 가해를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단지 강사가 원하는 대답을 간파하곤 의도적으로 이런 답을 하는 거지. 혹은 장난치거나 놀리려는 의도로 이런 말을 하기도 해. 순발력 없는 나는 이런 순간마다 당황해. 하지만 거의 모든 순간, 상황이나 맥락과 상관없는(←”상관없음”은 나의 판단일 뿐) 얘길 하는데, 오 이런,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지?

강의가 길어지면 다를 너무 지루해서 딴 일을 하기 시작해. 친한 친구들끼리 떠들거나 소리 지르거나 놀거나. 나 혼자 허공에다 떠드는 셈이야. 나는 얼마나 권력과 통제에 익숙한 몸인가. 강사-수강생이란 위치가 지니는 의미를 공유하지 않는 집단에서 너무 당황하는 나. 내 몸은 권력에 얼마나 익숙한가. 이 상황에서, 그들의 관계 방식에 녹아들지 못 하곤, 뻣뻣한 상태였지. 무려 세 번이나 진행했지만 난 내 몸에 익은 습관을 유지했어. 하긴, 사흘 만에 바꾼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너무 경직된 건 아닐는지.

그러다가도 이 수업과 가장 잘 어울릴 법한 대답을 곧장 하면 또 한 번 당황해. 나는 대답을 강요하는 걸까, 혹은 감수성을 기르는 프로그램인데 주입식 교육으로 바뀌고 있는 건가, 싶거든. 수업에 가장 잘 어울리는 답을 하면, 답을 한 이를 칭찬하는 식으로 진행해야 하는데, 솔직히 좀 참담한 기분이었어. 수업을 하는 도중에 내가 당황하니까, 이제 이들이 내가 원하는 어떤 답을 하기 시작하는 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거든. 모든 질문엔 원하는 답이 있지. 정답을 말하는 게 아니라, 대체로 이런 정도면 적당하다 싶은 범주의 답. 그런 답이 나오는 순간, 강의안에 예상한 그대로의 답이 나오는 순간, 그 강의는 실패한 거야. 내 느낌은 그래. 그냥 이건 나의 느낌이야. 난 그 시간 동안, 다른 수업처럼 주입식 교육을 했거나 정답을 유도했거나. 어차피 실체도 없고, 진실도 없어. 그저 나의 느낌을 끊임없이 분석해야 할 뿐.

03
확실히 강의나 강좌를 나가면 배우는 사람은 수강생이 아니라 강사의 위치를 점하는 사람이야. 그럼에도 초등학생을 만난다는데 약간의 노이로제가 생겼어. 내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이 있는 날이면, 정말 긴장했어. 조금은 가기 싫었고. 초등학생 정도의 사람들만 봐도 살짝 경기 혹은 노이로제가 생길 정도랄까. 흐. -_-;; 권력과 통제에 익숙한 몸과 아직은 덜 그런 몸의 만남에서, 권력에 익숙한 몸이 보이는 두려움과 경기가 이런 것일까 싶기도 해. 자신과 달라, 낯설다고 여기는 이를 만나면 혐오와 두려움을 표하는 이들의 반응이 이런 걸까 싶기도 하고.

다른 한 편으론 단발성 만남이라서 그런 건가 싶기도 해. 만약 내가 단지 5일간 만나는 관계가 아니라, 최소한 한 학기를 만나는 관계라면 어땠을까? 어떤 이와는 좀 더 개인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형성할 필요가 있는데, 너무 조급하고 서두르는 나를 발견했거든.

아무려나, 현재의 프로그램은 전면 수정해야 할 거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