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절주절 또 주절

01
핑크 플로이드 박스세트가 나왔다. 정규앨범에 영화 음악 작업한 것 까지. 라이브를 제외하면 정규앨범이 모두 담겼다. 미칠 듯이 사고 싶다. ㅠ_ㅠ 현금도 있다. 돈은 없다. -_-;; 풉. 내용물은 엄청 화려하단다. 내가 카드만 있었어도 이미 질렀을 거 같다. 12개월 할부? 푸훗. 다행히 카드도 없다. 아…. 근데 사실 실제 사는 것보다 살 수 없어서 이런 저런 상상을 하는 게 더 즐겁다. 나란 인간이 원래 이렇다. 아무튼 정말 매력적인 내용물이다. 따로 사면 더 비쌀 텐데 이 기회를 노릴까 하면서도 그냥 상상만 한다.

…초 단기간 알바할 곳 없나. *힐끔* 흐흐.

02
지도교수를 만나고 왔다. 며칠 전부터 선생님께 메일을 해야지 하면서 미루다가 기어이 메일을 썼다. 다음 주에 만나길 기대했는데 메일 보낸 오늘 만났다. 만나기 전에 너무 긴장해서 다리에 힘이 풀렸다는;;; 그래서 잠시 문 앞에 주저앉아 있었다. 흐. 그래도 힘을 많이 받았다.

03
자꾸 가라앉는 요즘이다. 여름이라서 그렇다. 여름이 지나가면 좀 괜찮아지려나. 가끔 진지하게 북유럽에서 살면 여름마다 경험하는 감정변화를 안 겪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한다. 정말이지 평균기온 0~1도 사이인 나라에서 살고 싶다. 실제 그런 곳에서 살면 딴 소리 하려나? 흐

음악, 언어

01
스매싱 펌킨스의 보컬, 빌리 코건은 어린 시절부터 음악을 다양하게 들었다고 했다. 아버지가 재즈음악연주가라 다양한 앨범이 상당히 많았다고 했다. 나는 이게 참 부러웠다. 다양한 앨범이 있고, 언제든 음악을 들을 수 있는 환경이었던 어린 시절이 부러웠다. 나의 부산집엔 그 흔할 가요테이프 하나 없다. 어린 시절, 집에 덩치 큰 테이프 플레이어는 하나 있었다. 하지만 틀 음악 테이프는 없었다. 난 어쩌면 어린 시절, 세상엔 음악이란 게 없었다고 믿었는지도 모른다. 하긴 그땐 뭐가 있었고 없었고가 무어 그리 중요했겠는가. 그저 지금이니까 이런 해석을 하는 거지.

먼 친척 중에 승용차가 있는 이가 있었다. 그네 차를 타고 가는데, 세상에, 음악이란 게 나왔다. 그리고 참 부러웠다. 그 집 사람들은 다양한 음악을 듣고 있었다. 내가 처음 들은 음악은 그네 집에서 빌려온 테이프 중의 하나였으리라. 지금도 기억난다. 영화음악을 모은 테이픈데 가사는 없고 연주만 흘러나왔다. 나중에야 원래 보컬이 있는 곡이란 걸 알았다. 그리고 그게 너무도 유명한 영화들에 수록된 음악이란 것도. 난 꽤나 오랫동안 연주만 흘러나오는(소위 말하는 경음악 테이프였다-_-;; 크크) 영화음악 모음 테이프를 들었다. 물론 부모님이 집에 있을 땐 음악을 틀 수 없었다. 음악을 듣는 건 시간 낭비였나, 공부 하지 않고 노는 거였나. 집에 혼자 있을 때면 커다란 테이프 플레이어에 테이프를 넣고 음악을 들었다. 하지만 한 쪽 귀는 현관문을 향했다. 들키면 곤란!

그때 참 잡다하게 들었다. 아니, 들을 수 있는 음악 테이프는 다 들은 거 같다. 그래서 그게 어떤 종류의 음악인지는 몰랐다. 그냥 음악을 듣는다는 게 좋았다. 그러다 처음으로 테이프도 샀다. EMI였나 어느 회사에서 하얀색 종이에 명화를 표지로 사용한 클래식 음악 시리즈의 하나였다. 피아노 소품집. 듣고, 듣고 또 들었지. 이젠 다 늘어나서 들을 수도 없지만 그래도 테이프는 玄牝에 있다. 그때 난 어쩐 일인지 클래식을 들었다. 클래식이 어떤 건지 몰랐다. 그냥 그게 내가 아는 음악이었다. 클래식 음악이 고급취향이라고 여겨지는 요즘(그때도 그랬지만) 음악 테이프 하나 없는 집에서 클래식을 찾아 들었으니, 좀 웃긴다. 근데 다른 종류의 음악이 있는 줄 몰랐다. 그 뿐이다.

그냥 되는대로 들었다. 들어보고 싶은 음악이 있으면 듣고, 음악이 녹음된 테이프가 있으면 늘어날 때까지 듣고. 그냥 그랬다. 그러다 가요란 걸 처음 들은 게 초등학교 수학여행을 가는 길에서였다. 세상에 이런 음악이 있다니!!! 난 가요란 음악이 있다는 것도 놀랐고, 나 아닌 사람들은 버스에서 튼 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다 알고 있는 것 같다는 사실에 놀랐고, 악기 연주가 아니라 목소리가 녹음된 음악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이렇게 적으니까 나만 완전 외딴 곳에서 세상과 단절하고 산 거 같다. 크크. -_-;;

그 이후로도 듣는 방식은 비슷했다. 몇 달 돈 모아서 테이프 하나 사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이런 습관은 어떤 장르의 음악도 낯설지 않게 접근할 수 있는 힘을 주었다. 내겐 교향곡이란 음악이나 가요프로그램에서 1위한 음악이나 차이가 없었다. 그냥 내가 좋으면 좋은 것일 뿐. 그렇다고 “음악을 듣는 귀”(예전에 누군가 사용한 표현이다, 음악을 좀 듣는다는 사람들, 음악을 좀 들을 줄 안다는 사람들이 쓰는 표현인 거 같다, 근데 좀 웃긴 표현이다)가 생긴 것 같지는 않다. 이런 귀는 여전히 없다. 그냥 내가 즐거우면 그만인 걸. 내가 듣고 싶고 들어서 즐거운 음악이면 그게 무슨 장르고 언제 나온 장르인지 무어 그리 중요하랴.
(며칠 전 라디오에 음악평로가라는 임모씨가 나와 서양 대중음악 관련 얘기를 했다. 이 사람이 나오면 언제나 그렇듯 루이 암스트롱 얘기하고, 엘비스 프레슬리, 비틀즈, 레드 제플린 얘기하는 식이다. 암튼 중요한 건, 핑크 플로이드의 음악을 지식인들이 좋아한 음악이라고 말하는 걸 듣고 완전 빈정 상했다. 너무 잔혹하고 무뢰한 평 아냐?)

02
보이팝 그룹인 줄 알았던(흐흐흐) 뉴 트롤스 음악을 들으면서, 와, 정말 근사하고 멋진 음악을 만들었구나, 하며 몇 번을 감탄했다. 베이스-기타-드럼에 단순히 현악을 덧붙인 게 아니라 놀라웠다. 특정 주제를 변형 반복하며 클래식의 문법을 따르고 있었다. 이건 단순히 고급스런 느낌을 주겠다고 현악을 덧붙인 것과는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었다. 아예 클래식 문법으로 연주하고 노래했다. 또 어떤 음악은 재즈의 문법으로 연주하기도 했다. 와아!

난 클래식도 재즈도 잘 모른다. 하지만 좋아한다.
이 두 문장의 간극. 간극은 발생하기도 하고 발생하지 않기도 한다.

뉴 트롤스를 들으며, 와 이건 클래식 문법을 따랐구나, 저건 재즈 문법을 따랐구나, 했다. 하지만 클래식 문법이나 재즈 문법이 정확하게 어떤 건지 설명해달라고 누군가 요구한다면, 난 못 한다. 어떻게 다른지 모른다. 그냥 감으로 알 뿐이다. 타인에겐 설명할 순 없지만 나는 아는. 타인에게 설명해야 하는 순간 나도 모르는. 이 찰나. 나는 재즈나 클래식 문법을 구분할 언어가 있는 걸까, 없는 걸까? 듣는 순간 미세하지는 않아도 어느 정도 구분할 수 있지만, 누군가 설명을 요구하는 순간 구분하지 못 한다. 아니다. 구분은 해도 설명을 못해서, 둘 사이의 차이를 모르는 것과 같은 상황에 빠진다. 나는 언어가 있는 걸까, 없는 걸까?

내 삶을 설명할 언어의 필요는 어쩌면 (그것이 나건 타인이건)누군가를 설득해야 하는 상황에서 발생한다. 나는 재즈나 클래식과 같은 장르를 대충 구분할 언어가 있지만, 이 장르의 전문가들이 보기에 나는 언어가 없다. 내겐 공적인 장소에서 통용하는 방식으로 나의 감을 설명할 언어는 없다.

이것이 트랜스젠더 하리수의 등장이 준 효과와 닮았다는 걸 깨달았다. 하리수의 등장은 한국사회에 트랜스젠더란 용어를 알렸고, 대충이라도 트랜스젠더 어떤 사람인지 인지할 여지는 주었다. 그리고 하리수와 유사한 고민을 하던 사람들은 자신을 트랜스젠더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하리수를 보며, “그래, 저 사람이 바로 나야.”라는 말을 할 수 있었다. 이것은 언어가 ‘생긴 건가’. 아니다. 트랜스젠더란 단어, 하리수란 인물이 있기 전에도 자신을 설명할 수는 있었으리라. 그저 설득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으리라. 나는 알지만, 결코 공적 언어로 통용할 수 없음. 이것이 괴로움이었는지도 모른다. 설명을 요구하는데, 나는 알지만 내가 아는 방식으로는 타인(나)과 소통할 수 없어 괴로운 건지도 모른다. 트랜스젠더 하리수의 등장은, 공적으로 나를 설명할 가능성을 줬다. 적어도 하리수란 인물을 매개로 설명의 가능성이 발생했다. 트랜스젠더 하리수의 등장은 공적인 방식으로 나를 재현할 가능성을 줬다. 이것은 내가 정확하게 하리수와 같지 않을 때에도 하리수와 동일하게 여겨진다는 점에서 문제이기도 했다.

언어란, 언어 획득이란 얼마나 권위적인 과정인가. 어떤 의미에선 권력체계에 승인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나의 존재를 권력체계에 편입시키는 과정이기도 하다. 기존의 체제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과정은 저항인 동시에 체제유지이다. 언어의 속성이자 언어 획득 과정의 속성이다.

나는 재즈나 클래식을 설명할 수 없지만, 그래서 이 방면의 전문가들이 보기엔 언어가 없겠지만, 차라리 없는 게 낫다. 침묵은 말 없음이 아니라, 발화의 한 형태란 걸 인지하지 못 하는 이들에게 나는 언어 없는 인물로 보이는 게 낫다.

03
그나저나 오늘도 나는 파이어폭스의 애드온 기능을 만든 이에게 감사를!
푸훗.

음악 주절주절

동서남북의 “나비”란 곡을 들었다. 동서남북의 1988년 즈음에 나온 곡이다. 듣다보면 종종 1960년대 후반 1970년대 초, 중반에 나온 유사 장르의 곡들과 헷갈린다. 정말 잘 만들었다. 마치 1970년대 잊힌 명곡을 발굴해서 듣는 느낌이랄까. 물론 이 말은 꽤나 역설적인 평가이긴 하다. 아무려나 정말 잘 만들었다. (궁금하면 다방으로…)

언니네이발관의 새 앨범 [가장 보통의 존재]를 들었다. 초반의 세 곡은 정말 아름답다. 언니네이발관은 첫 번째 앨범을 들은 이후 안 들었다. 싫어서가 아니라 그냥 나의 관심이 다른 곳으로 바뀌어서. 그랬기에 두 번째로 듣는 앨범인데 다른 앨범도 챙겨서 듣고 싶을 정도다. 무엇보다 가사가 좋다. 가장 소중했던 사람이, 가장 특별했던 사람이 가장 평범한 사람으로, 보통의 존재로 변해가는 순간을 그린 가사들. 하지만 “이런, 이런, 큰일이다, 너를 마음에 둔 게”란 가사가 특히 좋다. 대충 어떤 가사와 기획인지 알고 들었기에 다행이었다. 아님 많이 당황할 뻔 했다. 너무 절실했던 어떤 상황이 어느 순간 아무렇지도 않은, 이제는 희미하고 무덤덤한, 그래서 ‘아, 그래, 그런 일이 있었지’로 떠올리는 걸, 최근 경험하고 있었다. 그래서 미리 준비하고 듣지 않았다면 큰일 날 뻔 했다. (다방;;;;;;;)

음악을 듣다가, 3분 내외의 짧은 곡보다는 꽤나 긴 곡을 좀 더 좋아한다는 걸 깨달았다. 10분이 넘어가는데 조금도 지루하지 않고, 다양한 변주를 구사하는 곡에 매력을 느끼더라는. 이건 정말 최근의 깨달음이다. 그리고 재밌었다. 이런 취향도 가능하구나 싶어서. 풉. 하지만 짧은 곡을 밀도 있게 완성하는 것도, 긴 곡을 밀도 있고 지루하지 않게 다양한 아이디어를 내보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며칠 전엔, 오랜 만에 캣 파워를 들었다. 꽉 막혀 있던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었다. 뭔가 답답한 일이 있었는데, 그래서 음악으로 풀려고 했는데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늦은 밤 玄牝으로 돌아가는 길에 묘력을 들었다. 아! 말 그대로 숨통이 트였다.

음악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정말 고마워.
그리고 파이어폭스(특히 애드온 기능)도 감사. 크.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