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늘

자신을 향해 바늘을 찔렀는데 그 바늘이 너무 길고 커서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바늘에 찔리는 경우가 있다. 단지 나 자신만을 겨누었는데, 결과적으론 곁에 있는 사람도 피해를 보는 경우다. 요즘 나의 바늘 길이가 어느 정도 되는지 나도 잘 모른다. 조금 위험한 상태란 것 외에 내가 알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

이론을 배운다는 건 자신을 치유하는 과정에 참여하는 건데, 난 아직 멀었나 보다.

근황

01
아침 7시. 학교 오는 길. 공기가 차가웠고 나는 기뻤다. 난 오늘 아침과 같은 기온을 무척 좋아한다. 차가운 초겨울 아침. 귀에선 핑크 플로이드의 첫 번째 앨범에 수록된 음악들이 흘렀다. 하루아침에 떨어진 노란 은행잎들이 거리를 덮고 있었다. 나는 꿈을 꾸고 있는 건지 헷갈렸다.

02
어떤 논문을 볼 때, 참고문헌이나 인용문헌을 확인하면 저자가 대충 어떤 내용을 쓰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다고 한다. 난 아직 훈련이 부족하여 잘 모르겠지만. 근데 가장 심각한 건, 지금 내 논문의 인용문헌을 보고 있노라면 도대체 이 인간이 무슨 내용을 쓰고 있는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가장 황당한 인용문헌이 될 듯. 훗… ㅠ_ㅠ

03
글을 쓰다보면 종종 어떤 누군가의 글이나 어떤 이론가를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경우가 있다. 논할 가치가 없기 때문일 수도 있고, 이미 자신의 언어가 되었기에 논하지 않을 수도 있고, 언급하기엔 부담스러워서 논하지 않기도 한다. 이번 글쓰기에서 난 몇몇 유명한 사람들을 의도적으로 외면했다. 부담스러웠다.

일례로 ㄱ이란 이론가와 그의 이론을 내가 알고는 있지만, 난 ㄱ을 언급하기 부담스러웠다. 나의 기준에서 그를 제대로 읽은 적이 없기 때문. 그러니 나의 기준에서 내가 ㄱ에 대해 아는 건 이름뿐이다. 안다고 말하기도 민망한 상황에서 인용문헌에 하나 더 추가하는 것만큼 부끄러운 일도 없다. 하지만 나의 선생님은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인용하기 부담스러우면 이름이라도 언급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미 적잖은 사람들이 알고 있으니 이름 정도라도 언급하면 된다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명백한 표절이라고 지적하며.

…나는 나의 선생님에게서 이런 엄격함 혹은 꼼꼼함도 훈련받고 있는 중이다. 이런 훈련을 받고 있어서 기쁘다. 이런 훈련을 기대했지만 실제 받고 있을 때 느끼는 기쁨은 더 크다. 히히.

특강 후기들

사실 특강을 나가는 건 일주일짜리 자학거리를 찾으러 가는 것과 같다. 강의가 끝나고 나면 ‘좀 더 부연 설명을 했어야 했는데.’, ‘다르게 설명했어야 했는데.’와 같은 종류의 아쉬움들과 나의 부족함을 만난다.

그리고 특강 강사를 기다리는 수강생들의 기대는 또 다르다. 누군가는 변태 강사가 변태로 살아가며 경험하는 어려움을 호소해서 자신의 동정심을 불러일으키길 기대할 것이고, 누군가는 아무런 기대가 없을 것이고, 또 누군가는 자기 삶의 어떤 변화를 기대할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다양한 기대들이 강의실엔 넘쳐난다. 그럼 누구에게 초점을 맞출 것인가? 특강 강의 경력 초보인 나로선 아직도 감을 못 잡는다.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것도 알지만 특정 집단만을 위할 수도 없다. 그 사이 어딘가. 평소 변태들(트랜스젠더, 레즈비언, 게이, 바이, 동성애, 양성애 등등)에 무관심 했던 사람들은 그런 무관심한 상태에서,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그 정도에서, 상당히 고민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또 그 정도에서, 각자가 어떤 방식으로건 인식전환을 겪는다면 가장 좋겠지만, 이건 불가능한 욕망이다. 재미있는 건, 내가 회심의 역작-_-;;이랍시고 준비했던 멘트가 아니라 우연히 한 마디 한 것이 더 큰 파동을 일으킨다는 점이다. 난 여전히 어느 정도에 초점을 맞출 것인가가 고민이다.

그리고 내가 상상하는 수강생은 강의 주제 내용과 관련해서 아예 모르는 건 아니지만 상당히 아는 것도 아닌 어떤 상태에 있는 사람들. 나도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상태. 그 정도 수위에서 강의 내용을 맞춘다. 가장 기본적인 지식을 알려주면서 그것을 조금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여는 정도. 그리고 종종 나의 최근 고민을 알려 주는 정도. 물론 이것도 쉽지 않다. 어떤 강의에선 수위 조절에 완전히 실패해서 망했고 어떤 강의에선 수위 조절을 안 했는데 반응이 좋았고-_-;; 아무리 수강생의 수위를 예측한다고 해도 결과는 알 수 없는 법.

그럼에도 고마운 경우가 있다. 특강이 끝난 후, 메일이나 감상문을 통해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혹은 다른 어떤 변태임을 오랫동안 고민했는데 강의를 듣고 새롭게 고민할 수 있어서 정말 좋았다는 말을 들을 때다. 나의 강의가 어떤지는 사실 내가 가장 모른다. 그냥 이런 반응을 한 명이라도 보여준다면, 나는 너무 고마울 뿐이다. 100명이 듣는데 99명이 별로라고 말해도 단 한 명이, 자신의 상황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다고 말해주면 너무 고맙다. 힘이 많이 나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반성한다. 더 많이 고민해야 한다고, 더 많이 노력해야 하고, 더 많이 공부해야 한다고. 그리고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그리고 나 아닌 다른 활동가들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아주 오랜 세월 활동했던 활동가들이 없었다면 나 역시 없었다. 운동은 어떻게든 계속 되고, ‘우리’는 곳곳에서 계속해서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