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모습

얼마 전 신문 인터뷰에서 어느 뛰어난 뮤지컬 배우가 “무대는 냉정합니다. 춤을 못 추는 사람은 걷는 것조차 어색하지요.”라고 말했는데, 바로 지금 내 처지를 정확히 표현한 것 같아 한참 괴로웠다. (…중략…) 그나마 위안은, 책을 내는 과정에서 두 가지를 깨달았다는 것이다. 내가 더 성실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어차피 준비된 인생은 없다는 것이다. “최선을 다할 수 있었는데… 더 잘할 수 있었는데.” 이런 생각은 자신을 괴롭히는 욕심이고 오만일 뿐이다. 지금 초라한(그러나 변화하고픈) 내가 바로 나인 것이다.
-정희진, 2005: 26-27

정희진 쌤의 책, [페미니즘의 도전] 서론을 읽다가 위의 구절에서 멈췄다. 딱 나의 상황이다. 제대로 아는 것도 아닌데 아는 척 하려고 안달하고 있는 모습이 지금의 내 모습이다. 그리고 지금 나의 부족함을 어떻게든 인정하려고 고군분투하고 있는 게 지금의 내 모습이다. “조금만 더 하면 좀 더 잘할 수 있는데.”란 말로 지금의 초라함을 어떻게든 외면하려 하고, 그럼에도 인정하려하는 내 모습이 요즘의 내 모습이기도 하다.

솔로몬

한 사람이 말했다, 산자는 나의 아들이며 그대의 아들은 망자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말했다, 아니오, 그대의 아들이 망자고 나의 아들은 산자요. 그리고 왕이 말했다, 내게 칼을 가져 오너라. 그리고 그들은 왕에게 칼을 가져갔다.
그리고 왕이 말했다, 살아 있는 아이를 둘로 갈라라, 그리고 반은 저 사람에게 반은 다른 사람에게 주어라(1 Kings 3:23-25 in Hale 1998:311).

이어지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ㄱ은 반이라도 달라고 한다. ㄴ은 울며 차라리 ㄱ에게 아이를 주라고, 아이를 죽이지 말라고 말한다. 솔로몬 왕은 ㄴ이 진짜 어미라고 판단한다. 다들 의아해 하자, 진짜 어머니라면 자기 자식이 죽길 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사람들은 솔로몬 왕의 현명함에 감탄한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 얘기는 솔로몬의 현명함을 증명한다. 그리고 사건은 종결된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교훈은 솔로몬의 현명함이 아니라 당대 규범이 어머니에게 요구하는 태도다. 어머니라면 아이의 죽음을 바라지 않을 정도로 아이/자식에게 헌신해야 한다는 것이 이 이야기의 교훈이며, 죽은 아이와 산 아이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논쟁에서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솔로몬은 당대의 어머니 역할에 대한 규범을 확인해줬을 뿐이다. 지배규범으로 개인의 행동을 판단하고 재단할 줄 아는 것이 현명함이라면 솔로몬의 태도가 현명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내가 좋아하는 가정법으로 얘기해서.

만약 ㄱ이 진짜 어머니라면? ㄴ은 어머니라면 아이가 죽길 바라지 않을 것이란 문화적 규범을 너무도 잘 알고 있어서 ‘연기’를 한 것이라면? ‘연기’를 하면 ‘진짜’로 승인받을 수 있다는 것을 영민하게 알고 있었다면? ㄱ은 죽은 아이의 몸, 절반이라도 가질 수 있길 절실히 바랐다면? 나의 감정은 ㄱ에게로 향했다. 살아있는 몸이 아니라도 좋으니, 내가 절실히 바라는 몸의 절반이라도, 유기체가 아닌 무기물로 변한 절반이라도 가질 수 있길 바라는 마음. 이런 마음을 상상하자 나는 흔들렸고, ㄱ에게 끌렸다. 그 간절함. 나는 이 간절함에 매력을 느낀다.

다른 한편, 만약 ㄱ과 ㄴ 모두 아이의 절반이라도 원했다면? 그래서 아이가 죽었다면? 이때도 아이는 두 사람이 원하는 아이일까? ㄱ과 ㄴ이 원한 아이는 살아있는 아이지, 죽은 아이가 아니다. 살아있는 아이를 원하는 건 살아있기 때문이며 죽은 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 이제 반을 원하는 욕망에 아이가 죽었다면 그때도 ㄱ과 ㄴ은 아이를 원할까? 그리고 만약 둘 다 반을 원했다면 솔로몬은 어떻게 판단했을까? 둘 다를 가짜라고 판단했을까? 죽은 몸이라도 반을 원했다면 둘 다 진짜인 걸까? 진짜와 가짜를 판단하는 기준의 근거는 누가 정할 수 있는 걸까? 마찬가지로 ㄱ과 ㄴ 모두가 울며 아이가 죽지 않길 바랐다면? 이 상황에서 솔로몬은 어떻게 판단했을까?

솔로몬의 이야기를 읽으며 이런저런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뭔가 좀 더 재밌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근데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면서 나의 이야기는 길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