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과 젠더 정치

Transability 모임에서 쓰려고 쓴 초고입니다. 나중에 수정해서 어딘가 공개(출판?)할 예정입니다.
글은 2016.06.15.에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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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 특히 여성과 남성으로 구분하는 화장실의 기본 역할은 대소변과 같은 생리작용을 해결하기 위함이 아니다. 일견 화장실은 대소변을 해결하는 것이 그 첫 번째 역할로 인식되지만 화장실은 누가 그 공간을 이용할 수 있느냐를 질문하고 검열하는 젠더-몸 규제 장치다. 예를 들어 여성화장실을 이용하기 위해선 그 공간을 이용할 수 있는 몸이어야 한다. 즉 여성으로 통할 법한 젠더 표현을 적극 인용하며 여성화장실에 입장함에 있어 별 무리가 없어야 한다. 여성으로 통하지 않을 법한 외모라면, 그 자신이 여성이라고 해도 치한이나 범죄자로 인식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런 점에서 여성화장실 이용에 있어 젠더 표현 규제는 젠더퀴어를 규제하는 작업인 동시에 젠더퀴어를 (잠재적)치한이나 범죄자로 만드는 작업이다. 젠더 표현만 문제가 아니다. 여성화장실을 이용하기에 적절한 몸의 형태를 갖추어야 한다. 남성화장실 역시 마찬가지다. 남성으로 통하는 방식으로 젠더 표현을 하고 외부성기재구성수술을 하지 않은 젠더퀴어나 ftm/트랜스남성이 남성화장실을 이용하고자 했는데 그 화장실에 좌변기는 없고 소변기만 있다고 하자. 이런 경우는 많다. 이때 그는 남성이거나 남성은 아니지만 남성화장실 이용이 자신의 젠더 범주에 조금 더 가깝다고 인식하지만 남성화장실을 이용할 수 없다. 여성화장실 역시 출입할 수 없다. 공공장소에서 화장실을 이용하기 위해선 적절히 이원젠더화된 몸, 이원젠더에 부합한다고 가정하는 몸의 형태를 갖추어야 한다. 많은 트랜스젠더퀴어가 이원젠더에 따른 화장실 구성이 아니라 젠더 중립 화장실 혹은 개별화장실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단순히 트랜스젠더퀴어의 중요한 의제여서가 아니라 젠더 표현을 규제하는 사회 전반에 대한 강력한 문제제기다. 당장은 이것이 여의치 않기에 공공장소에 트랜스젠더퀴어가 사용할 수 있는 화장실은 공용화장실 정도다.
강남역 살인사건이 발생한 뒤 몇몇 사람은 이 사건으로 불거질 대안이나 정책 중 하나랍시고 ‘공용화장실 해체’가 나올 것을 염려했다. 여성혐오 살인사건에 대항하는 애도와 같은 움직임에 반응한다며 공용화장실이 문제고 그러니 공용화장실을 없애겠다는 정책이 나온다면 이는 비트랜스여성(시스여성)과 트랜스젠더퀴어를 대립, 갈등 관계로 만들기 때문이다. 슬프게도, 이미 다들 알겠지만, 경찰 및 정부 관계 부처는 향후 건설하는 건축물은 이원젠더에 따라 여남으로 구분하는 화장실을 만들어야 하며 기존의 공용화장실을 분리한다면 인센티브를 주겠다고 발표했다. 이것은 여성화장실에서 이미 많은 성폭력 사건이 발생하고 있음을 은폐하고, 공용화장실이 아니라면 여성화장실이라면 안전하다는 착각을 사실인 것처럼 재생산한다. 뿐만 아니라 이런 정책은 화장실이 성역할 규제, 젠더-몸 규제 장치로 기능하는 역할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데 공모한다. 이것은 트랜스젠더퀴어에게만 문제가 아니다. 트랜스건 비트랜스건 상관없이 여성화장실을 이용하려면 여성답거나 최소한 여성으로 통할 법한 젠더 표현에 따라야 함을 일상에서 규율한다는 점에서 모두에게 문제다. 나아가 모든 개인을 여성화장실과 남성화장실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젠더 실천을 통제한다는 점에서 이것은 트랜스젠더퀴어를 삭제하고 비트랜스여성의 복잡한 삶을 누락한다. ‘여성’을 특정 이미지로 규정하고 그것에 부합하느냐 하지 않느냐로 평가할 수 있다는 믿음 및 행동이 여성혐오의 일종이라면 이원젠더에 따라 분리된 화장실은 여성혐오르 유지하고 재생산하며, 어떤 의미에서 이런 화장실 자체가 여성혐오일 수 있다.
개별화장실 혹은 젠더 중립 화장실이 최선의 대안 혹은 유일한 대안이란 말은 아니다. 사실 화장실은 더욱 복잡하게 구성되어야 한다. 또한 일상에서 젠더를 규제하는 장치를 더욱 복잡하게 살피고 질문해야 한다. 아울러 강남역 살인사건으로 고인을 애도하는 행위, 애도의 일환으로 말하는 대책이나 정책이 이원 젠더 규범을 강화하는 방식이어선 안 된다. 성폭력 혹은 여성혐오가 기존의 성역할 규범, 이원 젠더 규범에 공모하고 재생산하는 행위란 점에서 이에 공모하는 방식의 정책은 무엇도 ‘해결’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현 체제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나와 나와 나

퀴어락 급여로는 생활비가 부족하다. 그래서 매달 허덕이며 살고 있다. 물론 10여년 전엔 50원 단위로 생활비를 계산하며 살았지만 지금은 그래도 1000원 단위로 생활비를 계산하니 그때에 비해 지금은 많이 좋아진 것일까? 물론 그때와 지금의 생활물가가 다르니 좋아진 건지 여전한 건지 어떤지는 모르겠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어떤 최소 단위로 생활비를 끊임없이 계산하며 살고 있다. 돈 천 원에 전전긍긍하고 통장 잔고를 끊임없이 신경 쓰는 것이 내가 알고 있는 나의 모습이다. 이것이 나의 삶이고 내 모습이다. 다른 모습은 그냥 다른 사람이 만든 이미지일 뿐이라 나랑은 별 상관없는 일이다.
트랜스젠더퀴어로 살며, 트랜스젠더퀴어 이론과 역사를 연구하는 연구활동가로 살며, 국가 지정 자격증을 받지 않은 퀴어 아키비스트로 살며, 나는 늘 전전긍긍하고 생활비 부족에 시달린다. 그 와중에 덕질은 하겠따고, 한 푼이라도 생기면 덕질에 투자하려 한다. 그러니까 나이가 들어도 삶은 별로 달라지지 않는다. 10년 전엔 10년 뒤의 내가 어떻게 살지 상상하지 않았다. 그때 나는 한두 달만 여유가 있으면 대충 어떻게 살겠거니 했다. 지금도 나는 10년 뒤의 나를 상상하지 않는다. 다만 10년이 지나도 지금처럼 전전긍긍하며 살고 있을까란 고민 정도는 한다. 10년이란 세월을 살며 변했다면 나름 변한 부분이고, 배웠다면 나름 배운 부분이다. 물론 10년 뒤에 내가 살아 있다는 보장도 없다. 늘 죽음 혹은 자살을 고민하고 내 삶의 가능성으로 여기고 있기에 10년은커녕 한 달 뒤의 삶도 모르겠다. 내일은 있는 걸까?
이 블로그는 2019년 어느 순간까지는 계약이 되어 있다. 호스팅을 그때까지 결제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내일 내가 사라진다고 해도 그때까지는 지속될 거란 의미다. 그리고 그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겠지.
물론 사람마다 전전긍긍하고 생활비가 어려운 방식의 정도는 다르겠지만. 그래서 내가 가장 불행하지는 않다. 나는 늘 어정쩡하고 고만고만해서 별 것 아닌 삶일 뿐이고 그래서 내가 매우 잘 살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이런 반성을 잠시라도 놓지 말아야 하지만, 가끔은 그래봐야 전전긍긍하는 삶이 다 무슨 소용인가 싶기도 하다. 다 무슨 소용일까.
그냥 기분이 그저 그런 날이라 이렇게 구시렁거린다. 비염이 터져서, 약을 쏟아부어서 정신이 몽롱하기도 하고.

화장실에서

사무실 화장실에서 미끄덩하며 넘어졌다. 나는 신음소리만 낮게 냈다고 생각했는데 사무실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달려왔다. 넘어진 당시엔 바닥에 부딪힌 부위만 아팠다. 그래서 괜찮다고 했다. 그런데 한 시간 정도 지나면서부터 온 몸이 서서히 아파왔다. 퇴근한 지금은 드러누워있다. 온 몸이 다 아프다. 끄응… 올해 왜 이러는 것이냐. 흐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