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

요즘, 오래 전에 나온 앨범들을 듣고 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나온 앨범들. 그러며 ‘상식’이라서 잊고 지내는 명제를 떠올린다. 좋은 앨범은 히트 싱글 두어 곡이 있거나, 히트 싱글들을 모은 앨범이 아니라 유기적으로 잘 짠 앨범이라고. 물론 좋은 앨범에 히트 싱글이 두어 곡 실려 있으면 좋겠지만 이런 싱글 하나 없어도 상관없다. 정말 좋은 앨범은 앞의 곡과 뒤의 곡이 잘 이어지고, 첫 번째 곡과 마지막 곡이 유기적으로 이어지도록 구성한 앨범이란 걸, 새삼스레 깨닫고 있다. 그래서 베스트 앨범, 히트 곡을 모은 앨범이 좋은 앨범이 되긴 어렵다. 베스트 앨범, 히트 곡을 모아서 좋은 앨범으로 만들기도 어렵고. 이런 이유로 베스트 앨범 혹은 히트 곡을 모은 앨범을 별로 안 좋아한다. 개개의 곡은 좋은데 전체적으로 듣기엔 좀 지겹기 때문이다. (이건 내가 음악을 듣는 습관 때문이기도 하다.)

글도 마찬가지다. 밑줄 긋고 싶은 문장이 많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글은 아니다. 그럴 수도 있지만, 이런 문장이 튀어서 글이 난잡할 수 있다. 밑줄 긋고 싶은 문장이 많은 글이라면, 차라리 잠언집이 나을 지도 모르고. -_-;; 개개의 문장도 빼어나면 좋겠지만 그 전에 전체적으로 잘 짠 글이 좋다. 그래서 나는 한참 멀었다. 난 전체적인 구성도 별로 안 좋고, 잠언집을 쓸 능력도 안 된다.

예전에 마루야마 겐지의 책, [소설가의 각오]를 읽었다. 꽤나 오래 전에 읽어서 이젠 읽었다는 사실도 가물가물하다. 그럼에도 몇 가지는 인상적이라 기억한다. 마루야마는 이 책을 통해 계속해서 주장하는 내용이 있는데, 그건 소설(문학작품)은 영화와도 다르고 연극과도 다르다는 것. 그리고 자기는 이게 뭔지 안다고 얘기했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하지만 책이 끝날 때까지 어떤 점이 다른지는 밝히지 않는다. 짐작할 수는 있다. 그건 문장이다. 이야기나 소재는 어느 장르에서도 가능하다. 영화에도, 연극에도 없는 건 문장이다. 문학작품 혹은 활자로 이루어진 작품은 문장으로 진행하고 문장으로 소통한다는 점에서 문장의 묘미를 최대한 살리는 것이 중요했다.

요즘 나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문장을 보고 있노라면, 부끄럽다.

신내림

사는 곳 근처에 만화책과 비디오/DVD를 싸게 처분하는 가게가 생겼다. 이른바 폐업정리. 하지만 그곳은 처음부터 만화와 비디오 대여를 하던 곳이 아니다. 몇 달을 못 가고 재고정리, 폐업처분이란 이름으로 종류를 바꿔가며 장사를 하는 곳이다. 그리고 이번엔 만화책과 비디오/DVD를 팔았다.

가끔 그곳에 들러 만화책을 산다. 잠 들기 전에 만화책을 읽는다. 낮에 읽기엔 시간이 빠듯하니, 잠들기 전에 읽는다. 이렇게 하루의 긴장을 풀고 있다.

최근에 읽은 만화는 귀신과 관련있는, 신내림이 소재인 만화였다. 어릴 때부터 신기가 있었던 건 아닌 듯 한데, 우연히 신이 내렸다. 그리고 벌어지는 일들을 그린 만화다. 이런 만화를 읽으면 어김없이 만화 소재와 비슷한 상상을 한다. 아니, 재밌는 소설이나 만화를 읽으면, 소재를 내 멋대로 바꿔가며 신나는 상상의 세계로 도망친다.

그렇다고 내게 신이 내리는 상상을 한 건 아니다. 물론 내게도 신이 내리면 좋겠다는 바람은 있다. 만화와 같다면 뭔가 재밌을 거 같기도 하다. 하지만 내가 사는 삶은 만화와 같지 않다. 그리고 이미 내게 신이 내렸는데 내가 자각을 못 하는 건지, 언젠간 신이 내릴 건데 아직은 시기가 아닌지, 신이 내릴 가능성 자체가 없는지는 알 수 없다. 그래도 신이 내린다면, 나는 어떤 삶을 살까?

하지만 이번에 한 상상은 내게 신이 내리는 상황이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귀신이 되었을 때 나는 어디로 갈까, 하는 상상을 했다. 내가 만약 상대방을 선택할 수 있다면 나는 어디로 갈까.

아마도 서울에 머물지는 않으리라는 걸 깨달았다. 아니, 깨달을 필요도 없었다. 내가 귀신으로 살아간다면, 그곳에 가고 싶은 건 자명한 일이다. 그곳에서 살아가리라.

아직도 이런 바람에 머물러 있는 자신을 깨달으며, 조금 슬펐다. 그리고 조금 기뻤다.

소리로 이루어진 세상

난 이어폰을 끼고, 음악 소리를 높여 주변에서 발생하는 소리를 다 차단해도 돌아다닐 수 있어. 좀 불편하지만 물건을 살 때도 문제가 되진 않아. 하지만 난 눈을 가리고 돌아다닐 수는 없어.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돌아다니던 어느 날 했던 상상. 만약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거리를 돌아다닐 수 있다면, 어떤 장치를 이용해 영화를 보면서 거리를 돌아다닐 순 있을까? 영화 같은 데 보면, 눈에 안경도 아닌 것이, 좀 이상한 걸 쓰면 아예 그 현장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의 영상이 펼쳐지는 기기가 있잖아. 그런 것처럼, 그런 기기를 쓰고 영화를 보면서 거리를 돌아다닐 순 있을까? 이런 질문 앞에서 난 내가 얼마나 시각경험에 의존하고 있는지를 새삼 깨달았어.

물론 난 처음부터 길에서 음악을 들으며 돌아다닌 것에 익숙하진 않았겠지. 하긴. 지금도 뭔가를 주문해야 할 때, 물건을 사고 결제를 해야 할 때면 지지(mp3p)를 꺼. 상대방의 소리를 듣지 않았을 때, 제대로 계산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서 불안하거든. 하지만 지지를 끄지 않고 음악을 계속 듣고 있다고 해서 일처리를 못 하는 건 아냐. 단적으로 글을 쓸 때, 책을 읽을 때, 거의 항상 음악을 듣는 걸.

하지만 지금의 나는 영상을 보면서 다른 무언가를 하긴 힘들어. 이건 내가 얼마나 시각경험에 의존하고 있는지, 나의 생활에서 시각경험은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를 알 수 있어. 아울러 사회가 얼마나 시각경험을 가장 기본적인 경험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알 수 있고.

그럼 만약에, 시각경험이 아닌 청각경험을 가장 기본적인 경험으로 이루어진 사회는 어떤 곳일까? 그런 곳이라면 난 영상을 보거나 책을 읽으면서는 거리를 돌아다닐 순 있어도, 음악을 들으면서 돌아다닐 순 없겠지. 근데 그런 곳은 어떤 곳일까. 청각을 기본적인 경험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이 청각을 기본적인 경험으로 이루어진 세상.

아마 지금과 같은 방식의 색채로 이루어지진 않겠지. 대신 거리엔 더욱더 다양한 소리가 넘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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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이 글은 구글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워드프로그램인 StarSuite8로 썼어요. 제가 비록 기계치지만, 뭔가 새로운 걸 사용하는 건 좋아하는 거 같아요. 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