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번째 상상더하기] 익숙한 이방인, 이주민씨 이야기

<반차별공동행동> 2008 세번째 반차별 상상더하기
“익숙한 이방인, 이주민씨 이야기 – 이주를 둘러싼 다양한 시선”

대학에서 유치원까지, 도시에서 농촌 마을까지… 이제는 내 주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낯선 얼굴, 이주민. 그러나 다문화 사회, 이주민 100만명 시대라는 거창한 말들이 무색하리만치 한국 사회는 아/직/도 ‘이주’와 ‘이주민’에 경직되어 있습니다. 반차별공동행동은 이번 상상더하기에서 함께 그 차별과 경계 너머의 세상을 열고, ‘이주’에 관한 다양한 상상을 풀어놓고자 합니다!

프로그램
1부 : 이주를 둘러싼 경험과 이야기
2부 : 이주를 보는 또 다른 시선, 불꽃 튀는 접점들

일정 : 10월 1일(수) 오후6:30~9:30
장소 : 서강대학교 인문관 234호 (약도 http://www.sogang.ac.kr/about/campus/guide.php)
주관 : 반차별공동행동 (http://chachacha.jinbo.net)

動, 名, 옥편이거나 왕편이거나

動(움직일 동)은 重(무거울 중)과 力(힘 력)으로 이루어진 글자다. 重은 人(사람 인)과 東(동녘 동)과 土(흙 토)로 이루어져 있다. 東이 비록 동쪽을 뜻할 때가 많지만 여기선 관통한다는 뜻이다. 重은 사람이 발로 지면을 쿵쿵, 꿰뚫을 기세로 밝고 무게를 가하는 것을 나타낸다. 이러한 重에 力을 더한 動은 원래 발로 땅을 밟는 동작을 뜻 했고, 발이 아래위로 움직이는 동작을 뜻 했으나 나중에 전반적인 움직임을 뜻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어원을 따라가면 動은 한 자리에서 발생하는 움직임을 의미한다. 그러니 動적인 상태는 한 자리에서 꼼지락 거리는 것일 수도 있고, 끊임없이 제 자리를 유지하기 위한 움직임일 수도 있다. 모든 움직임, 흐름은 제 자리를 유지하는 방식일 수도 있고, 움직임과 정착은 동일한 의미일 수도 있다. (난, 수학에서 사용하는 벡터를 떠올렸지만, 나도 잘 모르는 벡터를 끌어들이고 싶진 않다.)

名(이름 명)은 夕(저녁 석)과 口(입 구)로 이루어진 글자다. 어두컴컴한 곳에서 입으로 “아아아~~~” 소리를 내어 자기가 그곳에 있음을 남에게 알리는 일을 나타낸다. 밤에 자동차를 타고 꼬부랑길을 가다보면 불빛을 켰다 껐다를 반복해서 차가 있음을 알리는 것과 같고, 한 밤에 산속에서 길을 잃었을 때 소리를 질러 위치를 알리는 것과 같다. 나의 위치는 변경 가능하단 점에서 名이 고정된 위치를 가정한다고 볼 수 없고, 소리를 질러 위치를 알려주는 것은 마치 어렴풋이 위치를 짐작하게 할 뿐이다. 이러한 방식의 신호는 대개 짐작할 수 있되 명확하게 파악할 순 없다는 점에서 名이란 한자는 그 의미에 꽤나 충실하다. 타인의 이름, 어떤 사물의 이름을 알고 불러주면 마치 그 사람이나 사물을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어렴풋이 짐작만 할 수 있을 뿐 이다. 비오는 날 버스를 탔을 때의 유리창, 바깥이 흐릿하기만 한 유리창 너머로 세상을 보는 것처럼 뭔가 있다는 것만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명사(noun, 名詞)는 사물의 이름을 나타낸다고 한다. 동사(verb, 動詞)는 움직임을 나타내는 품사로, 움직임이나 작용을 나타낸다고 한다. 영어논문을 읽다보면 어떤 개념어를 설명하고는 “○○는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라고 표현하는 걸 발견할 수 있다. 일례로 “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정도? 영어의 어원에 따르면 이런 표현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영어의 어원은 몰라서 생략-_-;;), 내 멋대로 해석하는 動과 名은 서로 대립하는 뜻이 아니라 서로의 뜻을 보완한다. 뭐, 믿거나 말거나. -_-; 흐.
(참고한 ‘왕편’은 금성판 활용옥편 1992년 판)

얼마 전에 옥편(근데 난 “왕편”이라고 부르는 걸 좋아한다)이 생겼다. 근래에 생긴 물건 중 가장 기쁜 물건이다. 3년 전 전자사전을 샀을 때 다른 건 다 참을 만 했는데 한자사전이 너무 허술해서 아쉬웠다. 물론 국어사전이나 영어사전도 여러 모로 아쉽긴 마찬가지지만, 한자사전은 특히 심했다. 名을 찾으면 “이름 명”이란 설명만 나와 있었다. 포털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한자사전도 마찬가지여서 아쉬웠다. 動과 名으로 장난친 것처럼 난 아주아주아아아아아아주 가끔 이런 식의 장난을 좋아한다. 근데 전자사전이나 포털사이트에서 제공하는 한자사전엔 상세한 설명이 없다.

어릴 때 왕편을 사용하는 법, 한자를 찾는 법을 배웠는데, 참 유용한 배움이다. (←결론이 왜 이래? 새삼스럽진 않지만-_-;; 흐흐.)

고마움

얼추 열흘 전, 지도교수에게 논문의 서론 중 일부를 제출했어요. 그리고 며칠 전 선생님에게서 전화가 왔지요. 서론을 읽다가 저에게 질문하거나 지적할 내용이 있었거든요. 그러다 결국, 가져가서 새로 써오란 얘길 들었어요. 흐. 선생님 연구실에 가서 제가 제출한 서론을 봤는데요…. 총 11쪽의 분량 중 2쪽까지 읽고 중단하셨더라고요. 그리고 그 두 쪽은 몇 문장을 제외하면 선생님의 지적을 피해간 곳이 없었습니다. 학과 사무실에 돌아와 몇 사람들에게 이걸 보여주니 기겁을 하더라는. 사람들은 저에게 괜찮으냐고 물었지요. 걱정은 서론을 돌려주는 과정에서 선생님이 먼저 하셨어요. 다음날 아침에도 사무실로 전화해선, 저에게 충격 받아서 쓰러지지 않았나 걱정해서 전화했다고 하셨고요. 🙂

논문심사와 관련해서 선생님과 관련해서 제가 전해들은 두 가지 일화가 있어요.
선생님에게 논문을 쓰던 한 학생이 선생님께 논문 초고를 제출했는데, 선생님의 논평이 적힌 걸 돌려받곤 다음날 병원에 입원했다는 거, 하나. 석사학위논문 심사를 선생님께 부탁했는데, 박사학위논문 심사는 선생님께 부탁하지 않았다는 거, 둘.

그럼 저도 충격을 많이 받았냐고요? 아뇨. 전 너무 기뻤어요.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도끼를 만난 느낌이었거든요. 내가 조금이라도 대충 쓰면, 그걸 그냥 넘어가지 않고 지적해 줄 사람이 있다는 거, 정말 든든하잖아요. 그래서 기뻤어요. 이 문장엔 주어 없고, 이 문장과 저 문장은 비슷한 내용으로 중복이고, 이 문장과 저 문장은 한 문장으로 줄이고, 이 두 문장은 논리적인 연결이 약하고…. 이렇게 지적받은 두 쪽을 수정하는데 세 시간이 걸렸지요. 그러며 석사논문은 글쓰기 훈련이란 말을 실감했어요. 전 지금 문장 쓰는 법부터 글쓰기 방법을 하나하나 배우고 있고, 훈련하고 있어요.

선생님의 논평이 적힌 서문을 받아들고 나서, 초고를 제출하지 말고 일단 다 쓴 다음에 어느 정도 퇴고를 해서 제출할까 하는 고민을 했어요. 이 고민을 말씀드렸더니, 그렇게 하면 나중에 조율하거나 수정할 수가 없다는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그러며 만약 자기와 처음부터 조율을 하고 논문을 쓰면, 나중에 논문심사 중에 자기와 조율한 부분이 문제가 될 때 지도교수 탓이라도 할 수 있지만 다 쓴 다음에 가져오면 그럴 수도 없다는 말을 덧붙였어요. ㅠ_ㅠ (제가 다니는 학과의 특성상 운영위원 교수들의 전공이 다 다르고, 전공마다 논문을 쓰는 방법이 달라 이런 고민을 해야 하죠. 근데 전 영문학 형식을 따른 것도 괜찮다고 고민 중이에요.) 너무 고마웠어요.

사실 전 석사가 끝나고 계속 공부를 한다면 어디서 할지 아직 결정을 안 한 상태죠. 근데 만약 한국에서 계속 공부를 한다면, 지금 다니는 학교에서 할 거 같아요. 물론 다른 곳으로 옮길까 하는 고민을 진지하게 해요. 이건 학제의 문제는 아니고 한 곳에 너무 오래 있어서요. 하지만 계속 다니고 싶다는 고민도 해요. 유일한 이유는 지도교수죠. 하긴. 그러고 보면 한 때 지도교수 믿고 영문과 갈까 하는 고민도 했었죠. 흐.